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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

  • 입력 2019.04.19 12:49
  • 수정 2019.04.19 13:36
  • 기자명 부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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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라는 책을 펴낸 엄마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에서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질문을 나눕니다.


엄마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 ⓒ이성경

결혼하고 애 낳은 여자 열 명이 모여서 결혼하고 애 낳은 여자들의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글을 쓰기로 했다. 각자에게 주어진 원고 분량은 A4 일곱 장. 쉽게 써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생계를 부양해야 하는 프리랜서인 내게는 단기 일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냉장고에서는 오래된 콩나물이 정체불명의 생명체로 변신하는 중이었다. 일을 마치고 온 남편이 생존을 위한 빨래와 청소, 요리 정도를 할 뿐이었다. 남편이 함께함에도 아이와 집안 곳곳에는 여전히 내 손길이 필요했다.

내 글을 기다리고 있는 편집자와 주변 엄마들에게 미안했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페미니스트'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인 남편과 아이, 친정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남편은 내가 과로사할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고 미안해했다. 이렇게 우리 부부·가족의 페미니즘 이야기는 ‘미안함’에서 시작된다.

가장이 되지 못해 미안한 남편

남편은 ‘배우’를 꿈꾸는 사람이다. 연극을 했고 독립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지만, 상업 영화에는 엇! 하면 지나갈 정도로 아주 가끔 등장하는 초단역 배우다. 내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돈을 빌려 사업을 시작했는데, 임신과 출산을 지나는 동안 산더미 같은 빚을 남기고는 쫄딱 망해버렸다. 나이는 많은데 특별한 기술은 없고 배우의 꿈도 놓을 수 없던 남편은 저녁 여섯 시부터 새벽까지 시간제 일용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남편과 나는 공동 양육, 공동 살림, 공동 경제 활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남편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일을 나가면, 남편은 아이를 돌보고 가사 노동을 했다. 오후에 내가 일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제야 남편이 일하러 나가 새벽에 돌아왔다. 그동안 내가 아이를 돌보고 재우고 나머지 가사 노동을 했다.

ⓒtvN ‘신혼일기’

하루 중 유일하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새벽마다 우리는 두세 시간씩 대화를 나눴다. 어느 날 남편이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이 ‘경력단절남성’이라고 말했던 날이 기억난다. 아이와 함께 오디션을 보러 갈 수도, 감독들과 미팅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극심한 무력감을 느낀다고 했다.

나 역시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일을 쉰 건 5개월뿐인데도 사람들이 ‘경력단절여성’이라고 부르는 데 지쳐 있었다. 그날 우리는 경력 단절이 아니라 육아를 통해 ‘경력을 보강하는 사람들’이라고 서로를 위로했고, 다음날 남편은 배우 프로필 특기란에 ‘육아’라고 적어 넣었다.

나는 남편이 꿈을 버리고 생계를 위해 뛰어들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없다. 남자이기에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꿈을 버리지 않고 노력하는 그를 응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여유 있게 돈을 벌어오지 못함을 자책한다. “당신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도 마음대로 사지 못하는 거 볼 때마다 많이 미안해”라고 스치듯 던지는 남편의 말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가장’의 무게를 느낀다.

모든 게 미안한 나

ⓒtvN ‘미생’

나는 비정규직 프리랜서 워킹맘이다.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둬야 했고, 생계를 위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이가 생후 5개월일 때였다. 출산 후 수면 부족으로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극심한 유방 통증과 39도의 고열에 시달렸다. 그리고 한포진이라는 병이 왔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병에, 숭숭 빠지는 머리카락과 틈만 나면 쏟아지는 코피와 잊을 만하면 돋아나는 다래끼를 보면서, 임신과 출산 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나에게, 내 몸에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미안함도 잠시, 엄마는 아프면 안 됐다. 특히나 ‘일하는 엄마’는 아프면 안 된다. 아이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하는 건 어디까지나 아이와 나의 문제였지만, 일은 달랐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어떻게든 일을 했다. 제때 해서 보내지 않으면 다음 일이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돼 멈출 수가 없었다.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아이를 재우다 잠든 다음 날에는 몸은 개운했지만 마음은 죄책감으로 무거웠다. 허겁지겁 남편에게 아이의 아침밥을, 친정 부모님에게 아이 돌봄을 부탁하고 노트북을 챙겨 일하러 나갔다.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밥, 청소, 설거지까지 하고 일하러 나가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 딸 일 하라고 예정에 없던 일정에도 부리나케 와준 친정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 엄마랑 같이 있는 게 너무 좋은데 왜 자꾸 일하러 가는지 알 수 없다며 훌쩍이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 이 모두에게 미안해하는 나에 대한 미안함까지. 헤어날 수 없는 미안함의 홍수에 빠져 종일을 허덕이곤 했다.

나와 남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런 미안함을 계속 가지고 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살 수 없었다. 왜 우리는 늘 최선을 다하면서도 늘 미안한 걸까. 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또래 엄마들과의 육아 공부 모임을 찾아갔다. 우리는 아이를 업거나 안고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으며 ‘더 좋은 엄마’가 아니라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남편과 함께 가사노동을 하며, 남편 가족 행사나 명절에 며느리로서 일하며, 계속 변하고 성장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생각했다. 감정과 욕구를 알게 될수록 나를 이야기하는 게 두렵지 않았다.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하고 싶은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경험하는 차별과 남편이 겪는 사회적 편견이 보였다. 남편과 함께 바꿔나가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강남역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출산 이후 강남역은커녕 해가 지고 나면 집 밖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게 누구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공포스러웠다. ‘맘충’과 노키즈존, 폭력과 폭언, 도처에 넘쳐나는 혐오들... 그리고 미투(Me Too)가 이어졌다.

스마트폰의 네모난 창을 통해 여성들의 말과 글을 읽으며 울고 공감했다. 페미니즘 논쟁의 흐름을 따라가기 버거웠지만, 그만큼 더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다. 나에게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왜 페미니즘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으며 또 멈추면 안 되는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렇게 페미니즘을 다시 만났다.

결혼한 여자의 페미니즘

임신하고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병원과 자본, 국가 권력 시스템 속에 그저 '수단'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사회에서 임산부, 양육자, 그리고 아이는 아주 좋은 돈벌이 대상이 되곤 했다. 아이가 집 밖에서 마주하는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먹거리, 장난감, 책과 문화 콘텐츠들은 질이나 수준을 검증할 사이도 없이 팔리고 퍼져나갔다.

하지만 더 나은 무언가를 선택할 때마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했고 주변 사람들을 계속 설득해야 했다. 불편하고 불합리한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 예민한 사람이 됐고, 아주 작은 실수라도 하면 금세 ‘맘충’ 딱지가 붙었다.

누군가에게는 기혼 유자녀 여성인 나는 ‘가부장제의 부역자’였고, 내 아들은 ‘한남 유충’이었다. 종일 육아와 가사노동을 하는 남편은 ‘라떼파파’라는 달콤한 칭송과 ‘한남’이라는 혐오 사이를 오가야 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모두를 혐오하고 무시했다. 참고 견디기 어려웠다. 나, 남편, 아이 모두 벗어나야 했다.

나와 남편은 이런 상황 속에서 조금이나마 덜 미안하기 위해, 덜 힘들기 위해 수많은 대화와 고민을 했다. 둘 중 누구도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거나 굳이 인식하지 않았지만, 혐오와 차별을 알아차리고 이야기하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엄마나 아빠가 아닌 개인적인 욕구와 가치를 존중받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우리의 ‘페미니즘’이었다.

결혼 후 나의 삶을 휩쓸고 지나간 ‘미안함’들을 떠올린다.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동료, 남편, 아이, 그리고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처음 이 ‘미안함’을 인지했을 때에는 무방비였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다시 만나고 ‘결혼하고 애 낳은 페미니스트’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한 후 나는 조금 더 강해졌다. 아이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하지만 않고 무언가를 바꾸겠다고, 소리 높여 말하고 부지런히 쓰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결국 ‘결혼한 여자의 페미니즘’이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이 세상을 좀 더 자유로운 곳으로 바꿀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모두에게 페미니즘을,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권한다.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1. 남편에게 선언했다. “나, 페미니스트야”

2. “당신, 페미니즘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냐?”

3. 돈 벌어오라는 남편, 그래서 나갔다

4. 나는 당신의 아내이지, 엄마가 아니야

5. 결혼한 여자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6. 애는 엄마가 잘 본다? 전 비육아 체질입니다

7. 장손인 남편이 호박전 부치자 벌어진 일

8. 며느리도 시어머니 전화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9. “남자아이한테 간호사 되라니... 너무한 거 아냐?”

11. 돈 버는 유세 부리던 남편, 이렇게 바뀌었다

12. ‘애엄마를 왜 쓰냐’는 회사, 그래서 창업했다

13. 밥 안 챙겨 먹는 ‘독거남’에게 정말 필요한 것



직썰 필진 부너미

글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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