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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만 유대인 학살’ 서막 알린 히틀러의 총리 등극

  • 입력 2019.02.01 10:53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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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1889~1945)는 현대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다.

1933년 1월 30일,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를 총리로 임명했다. 1929년의 경제 대공황 이후 큰 타격을 입은 경제와 민주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당이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으로 떠오르는 등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나치는 1926년 총선에서 선전, 괴벨스와 괴링 등 12명을, 1932년 총선에서는 전체 득표의 1/3을 차지해 230명을 국회에 진출시켜 제1당이 됐다. 당시의 정치·경제적 혼란 속에서 히틀러는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해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자본가 계급과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히틀러 총리 임명, ‘홀로코스트’의 서막

히틀러는 1932년 4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힌덴부르크에게 패했지만, 1,340만 표(36.8%)를 얻는 기염을 토했다. 정국 안정을 위해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내각 수반으로 임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는 보수 정당인 독일국가인민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했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조를 받아 좌파 세력과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하거나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 등의 방법으로 탄압했다. 히틀러는 1933년 3월 5일 총선거를 하기로 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히틀러는 기존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을 강조해 인기를 끈 뒤 1933년 7월 일당독재 체제의 기틀을 확립했다.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바꿨다. 이 겸직 지위를 ‘총통 및 총리’, 약칭 ‘총통’이라 하니 마침내 ‘히틀러 총통’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뒷날 ‘히틀러 만세(하일 히틀러)’, ‘나의 총통 만세(하일 마인 퓌러)’와 같은 나치 경례에 담긴 바와 같은 열광적 지지로 이어졌다.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이 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병 아돌프 히틀러는 1919년 독일노동자당(DAP)에 입당한 지 14년 만에 나치와 독일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야만성을 전 인류에게 상기시킨’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Holocaust)로 가는 길의 서막이었다.

▲ 1933년 총리로 지명되면서 권력을 잡은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히틀러가 노동자당에 입당한 후 지도자로 떠오르는 과정은 단기간인 데다 매우 순탄했다. 타고난 선동 능력 덕분에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돼 지도위원으로 일하게 됐다. 이듬해에는 당 선전부 책임자가 됐다.

1920년 2월 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천여 명 앞에서 히틀러는 그의 동지들이 추구하는 운동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그것은 짧게 ‘나치스(Nazis)’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이었다.

▲ 나치당은 1932년 선거에서 이겨 이듬해 히틀러는 총리가 됐다. 국회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히틀러는 민주공화제 타도와 독재 정치 강행, 베르사유 조약 타도,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다국적 기업 공격 등을 포함한 25개 조항으로 된 나치당의 강령을 발표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의 로마 진군에 자극된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받지 못해 실패했다.

▲ <나의 투쟁> 독일어판 원본

이 쿠데타로 투옥된 히틀러는 옥중에서 쓴 <나의 투쟁(Mein Kampf)>(1925)을 통해 반유대, 반공산주의를 천명하고 독일의 재무장,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 인종투쟁 따위를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전복할 기반을 마련해줬다.

대역죄로 투옥됐으나 9개월 만에 석방된 히틀러는 이내 재기에 성공한다. 그의 나치당은 1926년과 1932년의 선거에서 선전하면서 마침내 1933년 내각 수반에 올랐고 힌덴부르크의 사망 이후 총통이 돼 단독으로 집권하게 됐다.

마침내 전권위임법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히틀러의 제3제국(신성로마제국과 독일 제국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로 선전용으로 쓴 명칭)이 시작됐다. 지방 의회는 해산되고 사민당도 불법화됐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통치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해 민족의 발전을 꾀하였다.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뒀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뤘으며 군비를 확장해 독일을 유럽 최강국으로 발전시켰다. 히틀러가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된 이유다.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가 그에게는 독약이었다. 그는 세계 정복을 꿈꾸면서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공습과 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독일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항복을 받았고 프랑스에도 승리했다.

1940년 말까지 히틀러의 독일은 서부 유럽과 북부 유럽 전체(중립국인 스페인, 포르투갈, 스위스, 스웨덴 제외)를 점령하면서 승리를 거듭했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그의 야망은 마침내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포로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1941년 소련을 침공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이어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함으로써 결국 독일은 항복(1945. 5. 4.)할 수밖에 없었고 비로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1945년 4월 30일 전세를 돌이킬 수 없다는 데 절망한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향년 57세.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아리아 인의 민족적 우월성을 믿었던 이 인종주의자는 600만 명의 유대인을 희생시킨 홀로코스트를 저지르고 실패한 삶을 스스로 마감해야 했다.

<나의 투쟁> 재출간, “절반의 진실, 혹은 새빨간 거짓말?”

히틀러가 옥중에서 썼던 자서전 <나의 투쟁>이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2016년 독일에서 출간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뒤 <나의 투쟁>의 저작권을 얻은 바이에른 주정부는 즉시 이 책의 독일 내 출간을 금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70년이 경과하였으므로 2016년부터 저작권이 소멸됐다. 이로써 1월 1일부터 누구나 <나의 투쟁>을 출간할 수 있게 됐다. 원칙적으로는 말이다.

▲ 주석본 <나의 투쟁> ⓒ오마이뉴스

재출간을 앞두고 독일에서는 이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히틀러의 증오로 가득한 장광설’이라 평가되는 <나의 투쟁>의 출간이 논란이 된 것은 누구나 책을 자유롭게 출판할 수 있게 되면서 혹시 나올지 모를 극우 네오 나치 판본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독일이 70년 만에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출간했다. 괜찮을까?)

극우 네오 나치 판본을 막기 위해 뮌헨의 현대사연구소가 내는 주석본은 두 권으로 나뉜 수천 개의 주석을 포함하고 있어 무려 2천 페이지에 이른다. 현대사연구소는 <나의 투쟁> 출간을 통해 ‘히틀러의 선동적 담론을 끊어내고, 절반만 진실인 그의 말들, 도발적 발언과 새빨간 거짓말의 실체를 드러내’려고 한다고 밝혔다.

죽고 없는 파시스트의 자서전, 그것도 그리 잘 정리되지 않은 도그마로 점철된 이 책의 출간이 문제로 떠오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당시 유럽에서 극우정당이 부상하고 반유대주의가 세를 확대하는 시점이라는 점이 홀로코스트 생존자 등 유대인 공동체의 반발을 불렀기 때문이다.

▲ 유럽에서 극우정당이 부상하고 반유대주의가 세를 확대하는 가운데 창궐했던 네오나치들

뮌헨 쿠데타 실패 후 바이에른 감옥에서 구술해 출판한 이 책은 히틀러의 성장 과정과 초기 정치활동, 홀로코스트의 바탕이 된 반유대주의적 사상이 담겨 있다. 책에서 히틀러는 유대인을 ‘영원한 기생충’, ‘악성 박테리아’ 등으로 비하하며 순수한 게르만 제국 건설 구상을 밝히고 있다.

<나의 투쟁>은 극단주의를 주의해야 한다는 충고의 이야기인가? 혹은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공급하는 위험한 책인가? 출간을 앞두고 사람들의 의견은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히틀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에 관심을 가져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이건 판도라의 상자다. 독자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이런 생각들을 퍼뜨리는 건 우익 군벌과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이득이 된다.”

“침묵을 지키거나 그 책을 아예 금지하는 게 훨씬 더 위험하다.”

- 위 ‘기사’ 중에서

문제는 <나의 투쟁>이 출간되는 곳에서는 꾸준히 팔린다는 점이다. 이 책의 영어판은 매년 2만 권 정도 팔리는 것으로 추정되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사서 읽을 수 있는 전자책은 2014년에 기록적으로 많이 팔렸다고 한다.

이어지는 문제는 이 증오로 점철된 책의 판매로 누가 이득을 보는가 하는 것이다. 2000년에 미국의 한 출판사가 수십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자 대중적 비난이 있었다. 이 회사는 수익 전부를 익명의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자선 단체의 정체가 밝혀지자 그 단체는 곧 기부금을 반환했다. 이런 상황은 모두 이 책의 예사롭지 않은 성격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상 위 기사 참조)

독일 현지 뉴스는 당초 4,000부를 찍은 <나의 투쟁>이 발간 첫날, 선주문만 1만 5,000부가 들어오는 등, 말 그대로 불티나게 팔리는 중이라고 전한다. (관련 기사: “히틀러 자서전, 지금 주문하면 3월에 받아”)

과연 <나의 투쟁>은 현대사연구소가 밝힌 대로 다음과 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나의 투쟁>처럼 수많은 ‘신화’를 몰고 다니는 책은 없다. 이 책은 거부감과 두려움을 일으키고 동시에 호기심과 추측을 낳는 등 ‘금지된 것’에 대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발간된 비판적 주석을 단 <나의 투쟁>은 이러한 신화를 깨고 과거를 진상규명하기 위한 목적이다.”

- 위 '기사' 중에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재출간 후 독일에서 비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오르내렸다.

직썰 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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