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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감독관의 멸시·구타로 촉발된 ‘원산총파업’

  • 입력 2019.01.17 10:48
  • 수정 2019.01.17 10:52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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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산총파업 당시 파업 중인 노동자들. 총파업은 일본인 감독의 폭력 때문에 일어났다. 동아일보 사진

1929년 1월 13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일제 식민지기 최대 규모의 파업이 시작됐다. 1928년 9월에 있었던 문평제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에서 비롯된 이 대규모 연대 파업은 80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지역의 모든 부문 노동자와 총자본이 맞붙은 유례없는 이 파업 투쟁은 일제의 노동정책은 물론 이후 노동운동의 활동 방식과 노선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 감독의 노동자 구타로 촉발

원산총파업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문평제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으로부터 비롯됐다.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 소재, 영국인이 경영하는 문평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는 지배인과 주요 간부가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들 일본인은 평소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심했다.

1928년 9월 초 평소 조선인에게 욕설과 구타를 일삼던 일본인 감독 고타마가 또다시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9월 16일 노동자 120여 명은 고타마의 파면과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갔다. 9월 28일 감독 파면과 파업 중의 인사조처 취소, 재해 위자료·최저임금·퇴직금 등을 ‘3개월 안에 쌍방 타협으로 결정한다’는 조건으로 협약을 맺으며 파업은 종결됐다.

▲ 치안유지법 하에서 일으킨 원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을 다룬 조선일보 기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회사는 노조와 원산노동연합회 등 일체의 노동자 단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단체교섭을 거부했다. 이에 원산노련은 최저임금제 확립, 8시간 노동제 실시, 감독 파면, 대우 개선, 단체계약권 확립 등을 요구하며 1929년 1월 13일을 기해 파업을 선언했다.

또 원산노련은 전 원산 부두노동자들에게 문평제유의 화물을 일절 취급하지 말도록 하는 등 문평제유 노동자의 투쟁을 지원했다. 또 산하 전 조합원은 파업이 끝날 때까지 금주하고 매일 1인당 5전씩 걷어 파업자금을 지원하도록 했다.

1월 14일 문평제유노동조합과 문평운송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했다. 특히, 문평제유에서는 자동차 운전사, 취사부, 수위까지도 파업에 가담함으로써 회사 운영이 완전히 정지됐다. 한편, 1929년 1월 3일 대성상회 외 9개 운수회사에 대해서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1월 10일에는 국제통운과 국제운수에 대해서도 임금인상을 요구하던 원산부두노동조합에서는 원산노련의 요청으로 문평제유 화물의 하역작업을 거부했다.

노동자 파업에 자본가들도 수수방관하고 있지는 않았다. 임금인상 등 각종 노동조건의 개선하고자 싸워온 원산노련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던 운수회사와 일본인 자본가 집단인 원산상업회의소는 1월 17일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24개 노조 2200명 총파업... 자본의 반격

원산상업회의소는 인천이나 중국의 안동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모집해 오도록 하고 원산유조업조합으로 하여금 그해 1월 21일부로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를 일절 고용하지 않겠다는 통고문을 내도록 했다. 1월 29일 운수회사는 파업 동조 노동자들에게 해고통지를 내고 문평제유에서도 파업으로 결근하는 노동자는 퇴직으로 간주한다고 고시했다.

자본의 반격에 맞서 원산노련은 1월 22일 집행위원회를 열고 원산상업회의소에 대항하는,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같은 날 원산두량노동조합·해륙노동조합이, 다음날 결복노동조합과 운반노동조합이, 24일에는 원산중사조합과 원산제면노동조합이 각각 파업에 들어갔다.

원산노련 산하 각 노조의 파업은 꼬릴 물고 이어졌다. 27일에는 양복직공조합이, 28일에는 우차부조합과 인쇄직공조합이, 2월 1일에는 양화직공조합이 파업에 참여함으로써 원산노련 산하 24개 노조의 노동자 2,200여 명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일사불란한 노동자의 파업 투쟁에 당국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뻔한 공식이었다. 일본 경찰은 우선 원산노련 간부 7, 8명을 구속하고 400여 명의 일본인 재향군인과 청년회·소방대원을 동원해 시가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군도 끌어들여 함흥보병대에서 약 300명의 군인을 차출해 시가를 행진하게 함으로써 원산 일대를 계엄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또 인천에서 200여 명의 노동자를 데려다가 세관 창고에 수용하고 부두작업에 투입해 파업의 공백을 메우려 했다.

원산노련은 파업을 계속하면서도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하고자 했던 듯하다. 노련은 원산상업회의소에 파업 해결을 위한 공동연설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을 하는 한편, 시민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인쇄·제면·차량·양복·양화 등의 노동조합에 대해 파업 중지령을 내리는 등 조처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산상업회의소는 완강했다. 파업이 길어지면 질수록 고통스러워지는 것은 노동자 쪽이라고 여긴 이들은 원산노련의 항복을 노리며 노동자들의 생활이 곤궁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궁지에 몰린 노동자들은 어용 조직 함남노동회를 습격했다. 동아일보(1929.4.3.) 기사

파업이 길어지면서 1만 명이 넘는 노동자 가족들은 생활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원산노련은 파업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해 양식을 배급하고자 애썼다. 총파업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의 노동조합·청년단체·농민단체 등의 후원이 이어졌으며 일본·중국·프랑스·소련의 노동단체에서도 격려와 후원을 보내왔다.

장기화하며 파업 대오 흔들리다

노련의 파업 해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은 원산노련 김경식 위원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를 계속 검거했다. 이들의 원산노련의 항복을 넘어 타도를 꾀하고 있었다. 원산상업회의소는 운수 관계 자본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으고 폭력배를 끌어들여 ‘함남노동회’라는 어용 노동단체를 조직했다.

원산 부윤(지방관청인 부의 장관직)이 원산상업회의소가 주의·강령과 간부들을 바꾸는 조건으로 원산노동연합회를 인정하고 그 산하 노동자들을 취업시키라는 조정안을 냈지만 이마저 거부했다. 이들은 원산노련에서 탈퇴해 함남노동회에 가입하는 자만을 고용한다는 방침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총파업은 3월 중순이 돼도 해결되지 않았다. 원산노련의 파업기금이 고갈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당시 총독부와 언론은 “원산 대쟁의 총본영 연합회 해산명령설, 총독부 수뇌부 밀의” 등을 유포하며 압박해 왔다. 노동 진영의 내부 교란을 꾀한 것이다.

3월 7일 강령과 마크를 개정함과 동시에 간부를 모두 교체하는 등 궁지에 몰린 원산노련 지도부도 점차 ‘투항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원산노련을 탈퇴하고 함남노동회에 가입하면 취업시키겠다는 원산상업회의소의 회유에 노동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부 노동자들이 원산노련을 탈퇴하기 시작한 것은 노련의 위기임이 틀림없었다. 4월 1일 오후 6시 흥분한 노동자 수십 명이 함남노동회로 몰려가서 전선을 끊고 돌을 던지며 몽둥이를 휘둘러 함남노동회의 간부와 회원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이틀 후 새벽에도 함남노동회 세포 단체의 책임자인 김경문의 집을 습격, 김경문과 일행을 구타해 중상을 입히고 함남노동회의 작업장을 습격했다. 일경은 수백 명의 경관을 동원해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 40여 명을 마구 검거했다.

총독부와 자본가들이 노려온바 마침내 파업은 폭력화됐다. 이에 원산경찰서장은 원산상업회의소에 종용해 원산노련 산하 노동자들이 함남노동회를 통하지 않고도 고용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 원산항 부두의 전경과 파업규찰대 모습. 동아일보(1929. 01.30) 사진

4월 6일 노동자들의 동요와 경찰의 강력한 탄압으로 더는 파업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원산노동연합회 일부 간부들은 전체 회원들의 무조건 자유 취업을 결의했다. 4월 8일에는 대의원회에도 이 사실을 알려 80일 간에 걸친 원산총파업은 노조의 패배로 끝났다.

파업은 패배했지만

그러나 사태는 완전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자유 취업을 해야 했지만, 파업 중 이미 노동자를 채용했다는 이유로 자본가 측은 원산노련 소속 파업 참여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았다. 또한, 자본가들은 원산노련 탈퇴를 전제로 함남노동회를 거치지 않은 인부는 절대 쓰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총독부 당국은 이 주장을 승인함으로써 앞서 원산경찰서장의 알선이 허구임이 드러났다.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 약 400여 명은 부득이 노련을 탈퇴해 함남노동회에 가입하거나 전업했으며 500여 명 이상의 노동자들은 실업 상태에 빠지게 됐다. 4월 21일에는 원산노동연합회 사무실과 소비조합이 폐쇄되면서 총파업은 종결됐다.

파업 지도부는 타협과 조정과 같은 합법적 투쟁에만 의존하면서 파업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각 세포 단체의 노동자들은 지도부의 업무 복귀 지령에도 ‘초지관철의 산병전(소전투)’을 계속하기로 결의하는 등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 이들 노동자의 의식과 태도가 ‘자본과 권력의 총공세에 맞서 80여 일 동안 파업을 지속한 원동력’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애당초 노조와 노동연합회 박멸을 목표로 했던 자본과 권력의 구상은 관철되지 못했다. 파업 패배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원산노동연합회의 재건이 시도돼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29년 12월 23일 원산노동연합회 정기대회가 열린 것이다.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원산총파업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합법 투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확인하게 해 주면서 비합법적인 정치 투쟁의 계기를 마련해줬다. 총파업 이후 어쩔 수 없이 함남노동회에 가입한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안에서 노동조합의 민주화와 자주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총파업에 대한 전국적 성원은 원산총파업이 단순히 노동 운동사뿐 아니라 반일 민족해방투쟁사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조선의 노동운동이 3·1운동 이후 경제투쟁과 더불어 정치 투쟁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은 노조의 단체행동이 노동조건 개선은 물론, 나아가 민족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노동자들이 깨닫게 된 데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일제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을 혹사하면서 노동자들의 계급·민족의식이 높아지고 노동운동이 위협적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공포해 탄압을 강화했다. 특히, 노동운동은 공산주의 운동과 동일시돼 탄압이 더욱 가중됐는데 이는 원산총파업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총파업 이후 총독부는 노동자·농민의 계급 운동에 대해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쳤고 모든 사회운동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이어갔다. 이로 말미암아 1930년대 이후 노동운동은 점차 비합법적인 지하 조직 운동(적색노조 운동)으로 전환돼 갈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길어질수록 저항의 방식도 새로워지고 있었다.

직썰 필진 낮달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사 콘텐츠, 원산총파업

- 오늘보다, 원산총파업 : 일제강점기 노동자 저항의 분출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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