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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여전히 사람들은 ‘일제청산’을 외친다

  • 입력 2019.01.03 10:26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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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월 1일자 한겨레신문은 겉장을 1919년판의 기획기사로 발행했다.

언제부터인가 더는 제야를 의식하지 않게 됐다. ‘제야의 종’이니 ‘망년·송년회’니 하는 세밑의 의례적 행사들에 관한 기억도 아득하다. 2018년의 마지막 날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심히 보냈다. 그나마 아내와 딸애가 송구영신 예배를 다녀오는 걸 보면서 제야라는 사실을 잠깐 떠올렸을 뿐이다.

한겨레 기획 ‘1919년판’ 뉴스

2019년의 첫날도 심상하게 맞았다. 아내가 새벽기도에 가는 기척이 일어나 쓰던 글을 마무리하고 나서 현관 앞에 배달된 신문을 챙겼다. 거실 소파에 신문을 놓다 말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1면에 한겨레신문 창간 때의 제호가 떡하니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한겨레가 제호를 되돌리나 하고 생각했는데 어라, 1면에 실린 활자가 예사롭지 않다. 이미 사라진 먹컷이 보이는가 하면 세로쓰기 개요도 달렸다. 백두산 천지의 밑그림 위에 목판체 한겨레 제호 옆에 ‘1919년판’이라고 적힌 먹컷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머리기사는 ‘신년사’다. 궁서체로 ‘기미년 밝았다, 온 강토를 광복의 기운으로’라는 제목에 세로쓰기 개요도 예사롭지 않다.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기근이 어찌 가뭄 탓이라 하는가. 일제의 잔혹한 수탈도 저항정신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 <한겨레> 2019년 1월 1일자 1면 PDF

머리기사 아래엔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간다’는 먹컷이, 그 오른쪽엔 ‘해 넘기도록 맹렬한 돌림감기’ 기사다. 오른쪽 아래에는 상자 기사 ‘군소리’인데 ‘일본 순사 매질은 조선사람만 골라 때리나?’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의 작성자는 ‘마포 오첨지’다.

1면을 젖히자 3면에 익숙한 한겨레 제호가 다시 나타났다. 그쯤에서 나는 이 상황의 얼개를 파악했다. 아하, 이게 말하자면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하는 2019년의 기획기사로구나, 하고 말이다. 2면 왼쪽에 실린 안내 “새해 기획, ‘1919년판 한겨레’를 펼치며” “100년 전 ‘오늘’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가 곧 그거다.

한겨레의 기획기사 때문이 아니라도 2019년의 의미는 크고 중하다. 단순히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100돌이라는 형식 때문이 아니다. 100주년이라는 것은 단지 그로부터 1세기가 흘렀다는 사실보다는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오늘에 다시 성찰함으로써 역사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20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100돌

식민지 압제가 10년째 이어지던 1919년에 벽두에 삼천리 강토에서 들불처럼 타오른 3·1운동의 만세, 그 함성은 오롯이 민중에 의해 열린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는 3·1만세 시위가 ‘운동’이 아니라 ‘혁명’으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의 배경이다. (관련 글: 화성 제암리, 1919년 4월 15일)

뒤이어 이국땅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값진 결실이었다. 그것은 ‘제국’에서 ‘민국’으로 전환을 온 세계에 알린 자주 민주 공화국의 선포였다. 망명 정부로 그 시정이 국민과 국토에 미치지 못했지만, 고국의 동포들은 묵시적으로나마 이 가난한 정부를 자신들의 나라로 여겼었다. (관련 글: 상해 임시정부와 4·13 총선거)

상하이에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충칭까지 중국 주요 도시를 전전하면서도 임시정부의 27년 세월을 지켜낸 것은 요인들의 희생과 헌신이었다. 동시에 해방을 쟁취해 낸 것은 민주주의와 독립을 지향한 삼천만 민중의 열망과 믿음이었다.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촬영(1919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주도한 독립투쟁이 해방을 이끈 사실은 제헌 헌법 이래, 우리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배경이다. 그것은 좌우와 독립의 방도를 달리했던 독립운동가들 모두가 동의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1948년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광복절을 건국절이라고 부르면서 논란이 촉발됐다. 일제 치하 임시정부가 아니라 해방 후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봐야 한다는 뉴라이트 계열 학자,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을 따른 것인데 이후 이 해괴한 논리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답습됐다.

‘친일청산’을 ‘3·1운동’ 핵심 정신으로

이들은 해방이, 임정을 중심으로 한 끊임없는 독립투쟁의 결과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부정한다. 이는 곧 해방 후 정부 수립에 대거 참여한 친일 민족반역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역사 왜곡의 논리였다. 정권이 바뀌면서 건국 시점은 다시 1919년으로 정리됐지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상징적 의미는 진영의 논리를 넘지 못하고 있다.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겨레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여론조사기관인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시행한 ‘3·1운동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 결과에는 이러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국민 열 가운데 여섯(59.7%)은 3·1운동 정신이 ‘잘 계승되지 않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들은 3·1운동의 ‘핵심 정신’으로 ‘친일잔재 청산 등 역사 바로 세우기’(43%)를, 그 ‘계승 방법’으로 ‘친일잔재 청산’(31.9%)을 들었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 문제 등 지금도 미해결 상태인 일제 잔재에 대한 문제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사: 국민들, 3·1운동 핵심 정신 1순위로 “친일 청산” 꼽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지난해 출범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회)가 추진 중인 기념사업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효창공원 독립공원화,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 안동 임청각 복원, 중국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전시관 개관, 일본 2·8 독립선언 기념관 개선 등의 사업이 추진 중인 것이다.

이러한 기념사업은 형식적인 사업에 그치지 않고 ‘3·1운동’의 정신을 되살리면서 그것의 창조적 계승으로 이어져야 한다. 한겨레 인터뷰에서 한완상 기념사업추진위원장이 “역사 기억은 중립적 정보 기억이 아닌 가치 판단이다. 그래서 변혁의 동력이다”라고 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관련 기사: “모든 칸막이 넘은 3·1운동, 분단 73년 극복하는 동력으로”)

“지금 3·1운동과 임시정부(임정) 100년을 기념하려는 건, 지난 100년간 우리가 겪은 강대국 ‘갑질’의 고통, 일제 강점 36년에 대한 분노, 분단 73년을 통탄하는 마음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 분단 극복, 평화 통일의 문을 여는 일과 직결된다.”

현대사를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전체 역사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이유도 같다. ‘과거사에 대한 이해는 현재 사회에 대한 우리의 지배력을 증대시킨다’라고 할 때 식민지 시기 영욕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를 가늠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무심히 맞은 2019년 새해이지만, 새삼 옷깃을 여미는 것은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새롭게 써나갈 다른 100년에 대한 나라와 민족의 의지를 통해 그 영욕의 역사를 넘는 일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직썰 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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