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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대 들어와 ‘탈코르셋’ 대자보 훼손한 중학생들

  • 입력 2018.12.04 11:55
  • 기자명 고함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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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공익인권 학술동아리 ‘가치’의 ‘탈-브라 꿀팁’ 대자보 ⓒ트위터 김긘긘

11월 28일 오전 경인중학교 학생들은 숙명여자대학교(이하 숙대)에서 진로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들은 도서관부터 시작해 교내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투어가 진행되던 중 교내에서 가장 많은 숙대생이 지나다니는 명신관 앞에서 대자보가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는 탐방을 하던 남학생들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롱거리가 된 탈코르셋 대자보

훼손된 ‘탈-브라 꿀팁’ 대자보는 숙대 공익인권 학술동아리 ‘가치’에서 작성한 게시물이다. 가치는 이 자보에 대해 “여성들이 현대판 코르셋인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고 편한 몸으로 생활하도록 용기를 북돋는 취지였다”고 밝혔다.

해당 자보는 참여형 대자보로 하단에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꿀팁 등 관련 의견을 자유롭게 적게 돼 있다. 경인중 남학생들은 그 자리에 “응 A(여성의 가슴 사이즈를 지칭)”, “니도 못생김”, “지랄” 등의 낙서를 적었다.

대자보 훼손 행위에서 엿보인 남성 권력

이 사건은 평일 대낮에 수많은 숙대생이 지나는 길 한 가운데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남학생들에 의해서다. 남성은 여대 안에서 눈에 띄는 존재일 수밖에 없고 대개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 남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기물 파손을 행하고 여성 비하적 표현을 서슴없이 던졌다. 지나가던 재학생들의 만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사회에는 구성원 혹은 집단 간에 다양한 권력 구조가 있다. 인종, 나이, 성별, 경제적 위치, 사회적 위치, 교육수준 등에 따라 권력이 부여된다. 이중 대학생과 중학생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으로는 대표적으로 나이 권력이 있을 테다. 이때 그 권력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것은 물론 성인인 대학생이다.

그러나 여대생과 남중생이 주체인 이번 사건은 일반적인 경우와 조금 달라 보인다. 두 집단을 나누는 또 하나의 기준으로 성이 개입됐기 때문이다. 나이 등과 같은 여타의 요소들은 성이란 요소가 개입된 순간 가볍게 지워졌고 남중생은 손쉽게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KBS

남학생들은 탈코르셋 대자보를 훼손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받게 될 시선과 반발을 전혀 염려하지 않아 보였다. 그들의 영역이 아닌 타인의 공간이자 개방된 장소라는 상황적 요인도 남학생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주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성이 가지는 권력이 약하게 다가오는 여대라는 공간적 특징이 사건 발생에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반대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남학생들만 다니는 대학교의 대자보에 여중생들이 남대생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낙서를 할 수 있었을까. 이는 공학에서도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지난 8월 경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남고생 6명이 여교사의 치마 속을 몰래 촬영해 자신들의 비밀채팅방에 공유 및 유포한 사건이 있었다. 교사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최소한의 교권이 남성 권력 앞에선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 사건과 이번 대자보 훼손 사건이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사건은 공통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성의 개입이 관계 속 우위를 전복시킬 만큼 파급력이 있음을 시사한다.

“너 페미니즘… 그런 거 하니?”

특히 이번 사건이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은 남성들 사이 일종의 오락 혹은 영웅 심리를 부추기며 관계의 전복을 더 쉽게 일으켰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 남성들에게 “나 페미니스트야”라고 말했을 땐 여전히 약간의 정적과 함께 “너 페미니즘…그런 거 하니?”라는 반문이 의심 어린 눈빛과 함께 돌아올 확률이 높다. 여기서 “페미니즘 그런 거”의 의미는 물론 반사회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사이비 집단 정도의 의미로 통한다.

사회 일각에서 페미니스트가 사이비 집단으로 치부되는 이유는 성별 간 평등이 이미 많은 부분 이뤄졌고 차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미 평등한 사회인데 무엇을 더 평등하게 만드냐는 입장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적어도 사회 일부 구성원들에겐)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들에겐 이를 공격하는 일도 오락처럼 여겨진다.)

이번 사건의 남학생들 역시 일종의 장난처럼 페미니즘 운동에 조롱을 보냈다. 그들의 인식 속에서 페미니즘은 여성 인권신장 운동이기보다 일종의 ‘무시해도 되는 집단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로 평등한 관계에서는 상대의 행동을 섣불리 무시하지 않으며 쉽게 무시할 수도 없다. 이번 사건은 오히려 아직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이뤄지진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할 뿐이다.

피드백 촉구 대자보 부착… 그 이후에 이뤄져야 할 일

숙명인권연대’와 ‘가치’의 피드백 촉구 자보 ⓒ고함20

11월 29일 목요일 숙명여대 중앙 공익인권 학술동아리 가치는 대자보 훼손 사건에 대해 경인중학교와 숙명여대에 피드백을 요구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중앙 여성학 동아리 ‘SFA’ 또한 탈코르셋을 선언하는 대자보를 새로 내놨고 이 자보는 립스틱과 아이라이너 등의 화장품으로 작성됐다.

바로 옆 ‘내가 쓰는 탈코일지’ 대자보에는 화장품을 기부할 수 있도록 ‘코르셋 기부 화장품’ 통을 비치했다. 숙대생들은 숙명여대와 경인중학교 측에 피드백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번 사건에 대응해 더 강력한 탈코르셋 운동을 펼치고 있다.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피해는 분명 발생했다. 대자보는 훼손됐고 숙대생들은 모욕감을 느끼며 분노했다. 피해에 대해 아무런 피드백 없이 넘어가거나 별거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란 식의 대응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일일 테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두 학교가 어떤 입장을 표명할지 어떤 대응책을 내놓을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직썰 필진 고함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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