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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안 본 사람이 수능을 주제로 쓴 글

  • 입력 2018.11.22 16:44
  • 기자명 서울청년정책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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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주제로 글을 써볼 생각이 있는지 제안을 받았다. 꽤 많은 고민을 했다. 평소 글 쓰는 걸 좋아했지만, 이 글은 첫 문장을 적는 것조차 망설였다. 수능을 친 적도, 치기 위해 노력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수능은 카타르 같은 나라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 같다. 멀고 뜨거워 보인다. 열심히 뛰는 사람들이 보인다. 뻘뻘 땀을 흘리며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고 벗어나고 싶은 길 위에서 이들은 무엇을 위해 뛰고 있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달리게 할까.

나에게 수능은 카타르쯤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 같다.

치열하게 달리는 사람들의 열기를 느껴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도착점을 향해 달리며 지쳐 쓰러지거나 포기해야만 끝나는 경기에 끝내 참여하고 싶진 않았다. 설사 참가한다 해도 내게서 저들만큼의 열기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길 위에 있는 내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수능을 치르는데 나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쏟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남들이 다 같이 뛰는 마라톤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나의 선택이었지만, 그렇게 내 속도로 걸어가면서도 뒤처지지 않을까 불안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인생은 술술 풀리는 두루마리 휴지 같지 않았다.

언젠간 재수를 하면서 우울증에 걸려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를 보며 부러움을 느꼈던 적이 있다. “일단 대학에 진학하고 나면”이라는 말이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 (명확하지 않더라도) 상상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래서 비진학 청년들은 사회에서 자립해서 여유가 생겼을 때에도, 사회로부터 소외돼 고군분투하다가도, 결국 학위에 대한 자신감 상실로 안정감을 얻기 위해 대학 진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만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 현실에 결국 싫다고 나왔던 그 열기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재수하는 친구를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이 땅에 비진학 청년이 갈 수 있는 길은 그렇게 많지 않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다른 길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비진학 청년의 길을 가야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가족 형편상 직접 생계를 유지해야 하거나 대학을 다니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등록금 낼 형편이 못 돼 진학을 포기하는 청년들도 있다. 결국, 사회에서 소외 계층에 속하는 청년들이 비진학 청년이 될 비율이 높은 것이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서 ‘왜 대학을 가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어떤 대답을 해도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수능을 보지 않은 이유는 입시와 대학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대학을 간다고 해서 꿈꾸던 삶을 그리고 이뤄갈 수 있을까?

대학 졸업을 유예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고 졸업하고 나서도 구직을 못 하거나 대학 등록금으로 인해 청년 부채 현상이 늘어간다는 기사를 보면 막연한 의심이 피부로 와닿는 현실로 다가오곤 한다. 미래를 그리려면 일단 취업을 해야 하고 대학 등록금도 갚아야 하고 주거권도 해결해야 하는 등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학을 포기하고 선택한 곳은 타 교육 기관이었다. 영화가 하고 싶어 관련 교육 기관에서 3개월 과정의 워크숍을 들으며 집중 교육을 받았다. 대학과 비교해서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워크숍을 시작으로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길, 갈 수 있는 길을 천천히 탐색해 나가고 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자.

그러면서 영화 사운드에 관심이 커졌고 지금은 또 다른 교육기관에 등록해서 배우고 있다. 일이 많이 들어오진 않지만, 작업할 기회가 생기면 촬영장으로 향한다. 영화뿐만 아니라 청년 공간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참여하며 사람들과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나처럼 우리는 모두 다양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 태어나서 부모님과 첫 관계를 맺는 아이는 특정 시기가 되면 가족 울타리 밖, 주로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은 초, 중, 고, 12년을 오로지 수능을 향해 달려간다. 수능을 보고 나서도 쉬어갈 틈 없이 또다시 내달린다.

나를 포함한 많은 청년들은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정해진 길만 보고 달려가면 어떤 도착점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 답을 찾아갈 여유가 부족했다. 이제라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길을 찾아보자.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에 맞출 수 있게.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선택하고 내가 걸어갈 길이니까.

누구도 대신 걸어갈 수 없는 길, 오직 내가 걸어가야 한다.

직썰 필진 서울청년정책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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