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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호신용품의 유행이 의미하는 것

  • 입력 2018.11.07 15:45
  • 기자명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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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소셜미디어의 타임라인을 훑던 중 우연히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린 플라스틱 반지를 보게 됐습니다. 조깅을 즐기는 여성들의 필수품이라는 설명이 달려있었습니다. 색상은 당연히 핫핑크였습니다.

호신용품 제조업체인 피셔 디펜시브(Fisher Defensive)는 이 제품을 “야외에서 조깅이나 하이킹, 등산을 즐기는 여성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생기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이고 편리한 도구”라고 소개했습니다.

편리하다고요? 성범죄자와 맞서 싸우는 용도의 제품에 “효과적이고 편리하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안일한 태도야말로 일상 속에서도 늘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여성들의 삶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심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요?

한국에서도 최근 호신용품이 유행했다. 불법촬영 범죄에 대비한 개인용 몰카 탐지기, 혹은 몰카 제거용 송곳 등이 시장에 나와 “편리한 사용”, “합리적인 가격” 등의 홍보문구와 함께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텀블벅

여성을 위한 호신용품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입니다. 호루라기, 호신용 스프레이는 물론 강간 방지 속옷과 데이트 강간 약물로 널리 알려진 로히프놀에 반응하는 매니큐어까지 나왔습니다. 나날이 업그레이드되는 제품들과 함께 “너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어서 지갑을 열고 더 큰 비용을 지불하라”는 메시지가 넘쳐나죠.

데이트 혹은 술자리 등에서 일어나는 소위 약물강간 때문에 약물 탐지용 매니큐어가 개발됐다.

굳이 광고하지 않아도 세상이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여성은 없을 겁니다. 일상 속의 매 순간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니까요.

길거리에서 언어폭력이나 성희롱을 당하는 것은 많은 여성에게 흔한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면 어두운 골목을 피하고 주먹을 꽉 쥔 채 발걸음을 빨리하는 것은 습관이 되죠. 많은 여성에게 어느 정도의 방어 태세는 본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렇게 조심해도 우리 중 누군가는 성추행과 강간의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최근 영국 여성 2,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57%가 성추행을 경험했고 6명 중 1명은 최근 한 달 사이에 피해를 봤다고 답했습니다. 더 우울한 것은 영국 여성의 70% 이상이 일상 속에서 추행을 막기 위한 조치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뒤 이어진 여성들의 ‘밤길 걷기 시위’는 여성의 행동 범위를 제약하는 여성 대상 범죄와 피해자 비난 행위를 비판하는 퍼포먼스였다.

성범죄는 그 범죄가 일어나는 순간에만 피해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많은 여성의 일상 행동과 동선, 마음의 평화에 끊임없이 영향을 줍니다.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취하는 조치로 여성들은 공원에 가지 않기, 대중교통 이용하지 않기, 동행인과 함께 다니기 등을 꼽았고 열쇠나 우산 등 일상용품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대비한다는 여성도 28%에 달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런 여성들의 조심성을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추행을 하는 사람의 책임을 묻는 대신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 여성의 책임이라는 메시지가 난무하죠.

ⓒMBC

대표적인 예가 강간 피해자의 행동이나 옷차림들을 거론하는 사회면 기사입니다. 피해자가 조금 더 조심했더라면 이런 불행한 일은 없었을 거라는 뉘앙스가 담긴 기사들이죠. 젊은 여성에게 옷차림을 주의하고 술을 마시지 말라고 당부하는 유명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범죄는 가해자가 분명한 의지를 갖고 실천에 옮기는 행동입니다. ‘부주의한’ 여성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자연현상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경찰의 공익광고마저도 잠재적 가해자에게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 말라고 경고하는 대신 여성들에게 과음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강간은 범죄지만 음주는 불법행위도 아닌데 말이죠.

우리는 성범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여성의 일상이 얼마나 방해를 받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성범죄의 책임은 100% 가해자에게 있다. ⓒ한국다양성연구소

우리는 여성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현실을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성이 호신용 반지를 구입한 후 “호신용으로 늘 작은 칼을 몸에 지니고 다니지만 이 반지로 칼을 꺼낼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 좋네요” 같은 후기를 남기는 세상이 과연 어떤 세상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제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 왔으니 유난 좀 그만 떨라는 말이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하지만 한 쪽 성별만이 신상 호신용품을 계속해서 구입해야 하는 것이 명백한 현실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간극입니다.

주변 여성들에게 성범죄 피해 경험을 물어보고 귀를 기울여보세요. 남성들과 성범죄에 대한 대화를 나누어 보세요. 딸에게 조심하라고 하는 대신 아들에게 성관계에 합의는 필수라고 가르치세요.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직시하세요. 핫핑크색 호신용 반지로는 바꿀 수 없는 현실입니다.

원문: 가디언


직썰 필진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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