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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결별 후 연구조차 금기시돼온 독립운동가

  • 입력 2018.10.17 18:18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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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성 박용만은 일생에 거쳐 항일무장투쟁을 꿈꾼 독립운동가였다.

1928년, 박용만 총탄에 스러지다

1928년 10월 17일 베이징의 대본농간공사에서 우성 박용만(1881~1928)이 한인 청년 이해명의 총을 맞고 스러졌다. 1909년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운 이래 오직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이루고자 진력해 온 독립운동가의 꿈도 스러졌다. 향년 47세.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출신이다. 한성일어학교를 다닌 뒤 1895년(고종 32) 관립유학생으로 선발돼 숙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 졸업 후 한국 개화사상 형성에 한 줄기를 이룬 게이오의숙 정치과에서 공부했다고 하나 이 학교 졸업생 명단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스물아홉에 한인소년병학교 세운 박용만

1904년(광무 7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보안회 운동에 가담했다가 투옥, 옥중에서 이승만을 만나 의기투합해 동지가 됐다. 한성감옥에서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된 이승만과 정순만(1873~1911)이 함께 있어 이들이 의형제를 맺어 ‘3만’이라고 했다고 한다.

출옥 후 평안남도 순천의 시무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만난 제자 중에 후일 미국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창립할 때 함께 했던 유일한·정한경 등이 있었고 의형제 정순만의 장남 정양필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관련 글: 1971년 오늘-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기업인 유일한, 돌아가다)

한성감옥의 ‘3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박용만이 1909년에 네브래스카의 커니(Kearney)농장에서 무장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했을 때 그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소년병학교는 1912년 첫 번째 졸업생 13명을 배출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현재의 학군사관후보생(ROTC)처럼 학기 중에는 각자 학교에서 공부하고 여름방학에 입소해 평균 8주간 훈련을 받는 하계군사학교체제로 운영됐다. 그러나 1914년 샌프란시스코 일본총영사관 측에서 소년병학교의 편의를 제공한 헤이스팅스대학에 이 군사훈련에 대해 항의하자 결국 1914년 여름 소년병학교는 6년 만에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 미국 네브래스카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박용만 선생이다.

▲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에서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하는 모습

한인소년병학교에서 6년 동안 배출한 졸업생은 40여 명으로 이들은 졸업 후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직접 독립군으로 활동하거나 미군에 입대해 유럽전선에서 싸웠다. 이들 중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김용성(로스앤젤레스 한인국방경위대인 맹호군 대대장), 이희경(대한적십자회 초대회장·임정 외무차장), 정한경(주일대표부 대사), 김현구(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 유일한(유한양행 설립자), 구영숙(초대 보건부장관) 등이 있다.

이후 박용만은 1912년 12월 하와이 한인사회의 요청으로 북미에서 하와이로 거점을 옮겼다. 그는 1년 동안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제도 확립에 주력하는 한편, 재차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1913년 12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추진하던 군인양성운동을 기반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단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하와이에서 창설한 대조선국민군단

하와이군사령부로부터 설립을 인가받고 1914년 6월 오아후(Oahu) 카훌루(Kahuluu)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창설했다. 국민군단은 사령부로서 모든 한인 독립군을 총괄하려는 목적이었고 사관학교는 군단의 핵심이 될 사관양성기관으로 설치된 것이었다.

국민군단도 한인소년병학교와 같이 둔전병제(평시에는 토지 경작,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병사 제도)로 운영됐다. 단원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농장에서 노동, 군사훈련, 학습을 병행했다. 100여 명으로 시작해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한 대조선국민군단 사령부는 모든 한인 독립군을 ‘국민군단’으로 편성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었다. 박용만이 쓴 『국민개병설』과 『군인수지』 등의 책은 교재로 사용됐다.

▲ 하와이에 설립된 대조선국민군단의 시가행진 모습. 국민군단의 일본의 항의로 결국 1917년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1915년 여름 연합국 일원이던 일본이 미국 국무장관에게 대조선국민군단의 군사훈련 중지를 강력히 요청하자 국민군단은 1917년께 부득이 문을 닫아야 했다.

박용만은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재미동포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 하와이에서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의 주필로 각각 활동했다. 1915년『아메리카 혁명사』를 우리말로 번역, 출판했다.

박용만은 1917년 상하이의 신규식·조소앙 등과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계획했다. 그는 일찍부터 국권회복 후 수립될 국가의 정체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대한제국 멸망 직후인 1911년 그가 주창한 ‘무형국가론’은 한인 최초로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한 것이었다.

박용만, ‘무형국가론’으로 임시정부 수립 주장

이는 당시 미주 대한인국민회를 사실상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이자 임시정부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의 무형국가론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제국’이 아닌 국민이 주인 되는 ‘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었고 이 논리는 대동단결선언에 그대로 반영됐다.

1918년 국제정세 홍보를 목적으로 <태평양시사>라는 신문을 창간해 주필이 됐다. 1919년 3월에는 호놀룰루에 ‘하와이 한인들의 복리증진과 독립운동 원조’를 기치로 걸고 조직된 대조선독립단를 창설하고 <태평양시사>를 인수해 기관지로 삼았다.

▲ 1913년께의 박용만과 이승만. 이들은 결의행제였으나 독립투쟁 노선 차이로 결별했다. ⓒKBS 화면

8월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대한국민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조성환, 자신은 총참모로 취임했다. 9월에 한성과 상하이 등 임시정부를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개편할 때도 역시 그는 외무총장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박용만에 이에 응하지 않는데 이는 일찍부터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끝내 이승만과 결별한 것은 독립을 위한 방략으로 ‘외교론’을 내세운 그와 같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 신채호, 신숙, 이회영 등 무장항쟁을 주장하는 15인과 뜻을 모아 국내외 각지에 산재한 무장단체들을 결집한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국제 외교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안과 달리 이들은 독립군을 통합해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임정 외무총장 선임됐으나 무장투쟁론 주장하며 불응

1923년 중국 상하이에서 국민대표대회가 개최되자 박용만은 임시정부 불신임운동에 앞장섰다. 이는 그의 노선과 활동에 대한 임정의 불신을 초래했고 끝내는 화해할 수 없는 관계가 되기에 이르렀다. 국민대표대회는 임정 내무부장 김구의 내무부 포고령 제5호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임정 해체론자들은 상하이에서 축출됐다.

1926년 박용만은 베이징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대본농간공사를 설립했다. 이 공사의 설립 목적은 중국에서 미개간지를 구입, 개간해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군 양성자금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

1927년 4월 박용만은 호놀룰루(Honolulu) 팔라마(Palama)에 국어학교를 설립했다. 학교 이름을 우성학교라 했고 직접 초등 국어 교과서를 편찬해 교재로 사용했다.

대본공사를 설립한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모금한 돈으로 베이징 부근의 땅을 사들이고 영정하 부근에서 수전을 경영했다. 또, 베이징의 숭무문 밖에서 소규모의 정미소를 설립해 부근 수전에서 나오는 벼를 사들여 수만 석의 정미를 만들기도 했으나 여의치는 않았던 듯하다.

1928년 10월 17일 대본공사로 2명의 청년이 찾아왔다. 그들은 박용만에게 1천 원의 자금을 요구했으나 그는 농장의 형편을 설명하며 거절했다. 이때 이해명이란 청년이 권총을 뽑아 그를 쏘았고 박용만은 그 자리에서 스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독립운동세력간 갈등, 한인 청년의 총에 맞아 스러지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아직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24~5년경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진영에 유포됐던 박용만의 국내 밀입국설과 조선 총독 밀회설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다. 독립운동계의 갈등과 분열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었다.

▲ 철원초등학교 교정에 세운 박용만 선생 유적비. 선생을 기리는 시설로 국내에 유일한 것이다.

김현구의 『우성유전』에 따르면 소문의 실상은 박용만이 1924년 말께 중국 군벌 펑위샹의 사절단 일원으로 중국인으로 변장해 서울을 방문한 데서 비롯했다. 박용만은 펑위샹의 세력기반이자 일본군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내몽고에서 한인에 의한 둔전병 양성을 제안했는데 이 제안을 일본에 설득하고자 조선에 밀입국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박용만의 행동은 결국 독립운동진영으로부터 친일파 또는 밀정으로 오인을 받게 됐고 그로 인해 피살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상하이 임정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고수해 임정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비극적 사건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보는 것이다.

무장투쟁을 통한 완전한 독립을 꿈꿨던 박용만은 만주·시베리아·몽고 등 형편이 닿는 곳에 한인을 이주시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했다. 사망 직전인 1928년 중국 국민군의 옌시산 장군이 베이징에 입성하자 그는 옌시산 장군에게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청원서를 작성해 놓고 있었다고 한다.

▲ 네브래스카 헤이스팅스대학교 도서관 입구에 세워진 ‘한인소년병학교 기념비’

박용만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그의 독립투쟁은 국내에 거의 잊히고 있었다. 항일무장투쟁을 이야기할 때 박용만을 빼놓고 그것을 논할 수 없을 만큼 박용만은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국부로 기려지는 이승만과 치열하게 대립했을 뿐 아니라 임정 노선을 두고 김구와도 대립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박용만 연구는 금기시됐다는 것이다.

그의 돌연한 죽음 이후 17년이 지나서야 조국은 광복됐으니 그의 죽음은 독립운동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안타까운 죽음 이후 그는 오래 잊힌 인물이었다. 아직도 그의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태다. 미주 한인들이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3대 지도자로 꼽는 그의 생가는 텃밭이 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가 1995년에 훈격을 높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내엔 그를 기리는 시설로 고향인 철원의 철원초등학교 교정에 박용만 선생 유적비가 유일하다.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대학교 도서관 입구에 세운 ‘소년병학교 기념비’도 거의 100년도 전의 역사를 무심하게 일깨우고 있다.

직썰 필진 낮달


<참고자료>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 무장 독립투쟁을 꿈꾸다”, 김도훈, 한국사 콘텐츠

- 이루지 못한 항일무장투쟁의 꿈, 우성 박용만, 김동규, 『디펜스21+』



<사진 출처>

- 헤이스팅스대학교 도서관 입구에 세워진 ‘소년병학교 기념비’

- 철원초등학교 박용만 선생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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