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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뿐 아니라 히틀러까지 찬양했던 친일 소설가 정인택

  • 입력 2018.10.0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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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택이 <매일신보>에 연재한 「대지의 역사」(1942.07.27.)

낯선 친일 소설가 정인택

소설가 정인택(1909~1953)도 일반 독자에게는 낯설기는 이석훈이나 김용제와 마찬가지다. 대중에게 낯선 대신 그는 “애국반 정신의 고양, 황도 조선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앙양, 지원병 징병의 권유며 대화혼의 예찬, 만주개척 기타의 국책 선전 등으로 시종”한 충용한 ‘황국신민’이었다.

그는 일제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매일신보 ‘국어(일본어)면’에 ‘선구적 작품’을 발표해 “1937년 1월 12일 국어면이 신설된 이래 최남선, 김소운의 다음을 이은, 문인으로서는 제3착의 영광을 누”(이상 임종국)린 작가였으니 말이다.

정인택은 1909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태양이었으나 1930년께에 정인택으로 개명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주필을 지낸 정운복(1870~1920)의 아들이다. 정운복은 일본 우익단체인 흑룡회가 도쿄의 메이지 신궁교 옆에 세운 일한합방기념탑의 석실 안에 일한합방 공로자로 이름을 올린 친일 부역자다.

192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했다. 문단에 등단한 것은 1930년 1월 중외일보 현상공모에 단편 「준비」가 2등으로 당선되면서다. 1931년부터 일본 도쿄에서 생활했으며 1934년 중반 귀국한 후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했다가 1939년 『문장』지 기자로 전직했다. 이듬해에는 『문장』지를 나와 다시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로 옮겨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다.

▲ 정인택이 한때 기자로 일했던 문예지 『문장』

▲ 친우들과 함께. 왼쪽부터 김소운, 화가 이승만, 소설가 박태원, 그리고 정인택

1935년 『중앙』에 단편소설 「촉루」를 발표한 이후부터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펼쳤다. 이후 그의 대표적인 소설은 「준동」·「연연기」·「우울증」·「착한 사람들」·「부상관의 봄」·「검은 흙과 흰 얼굴」·「구역지」 등이다.

1930년대에 정인택은 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다룬 심리소설을 썼다. 그의 소설에서는 과잉된 의식세계와 생의 무기력성이 그려지고 있거나 신변적인 일상과 애정이 내부 초점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검은 흙과 흰 얼굴」 등은 일제 식민정책의 이념을 허구에 반영하고 있는 친일소설이다. 「부상관의 봄」, 「색상자(色箱子)」, 「해변」 등도 친일적 색채가 매우 짙은 작품으로 지적되고 있다.

‘불타는 열정’으로 ‘황민적인 자각’까지

정인택이 본격적으로 친일 문필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에 들어서다. 친일 어용 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 근로봉사’에 참가했고 경성방송국 제2방송부(조선어 방송부)에 출연해 시국적 작품을 낭독한 1941년부터 그는 친일 부역에 나서기 시작했다.

『삼천리』 1941년 1월호에 발표한 「국민문학에 영도」를 통해 발표하면서 그는 일제에 봉사하는 ‘국민문학’의 방향을 분명하게 정의했다. 「엄숙한 의무」에서는 ‘불타는 국민적인 것에의 열정’을 억제할 길이 없다며 흥분한 그는 이러한 열정은 ‘황민적인 자각’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의도적인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항상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내어 왔습니다. 전쟁은 한 개의 위대한 탈피라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대에 태어나 그 위대한 탈피를 경험하고 신문화 건설의 일익을 담당해야 하고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엄숙하고도 영광스런 의무일 것입니다. 이것은 당대 문화인의 유일의 긍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엄숙한 의무」, 『반도의 빛』(1942년 3월호)

▲ 정인택은 「국민문학에 영도」를 통해 일제에 봉사하는 ‘국민문학’의 방향을 분명하게 정의했다.

‘황민화’를 부르짖었지만, 정인택 자신도 식민지배 민족과 피식민 민족 사이가 힘을 바탕으로 한 억압과 굴종의 관계라는 사실을 아주 부정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작가의 마음가짐·기타」에서 일본 작가들은 의도하지 않아도 생리적으로 국민적인 것, 황민적인 자각에 이르게 되나 조선 작가들은 다르다며 조선 작가가 일본적인 감성과 혼을 생리적으로 내면화하려면 ‘의도적인 노력’이 집중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궁극의 목표를, 이러한 생리적인 문제에까지 높여두고, 우리의 모든 노력을 그것에 향하여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의식이 거기까지 승화해 주지 않으면, 우리의 문학에 국민적인 자각이 짜 넣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국민문학을 부르짖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메아리치게 될 것.”

- 「작가의 마음가짐·기타」, 『국민문학』(1942년 4월호)

일제는 1940년대 들면서 대륙 개척 이민 정책을 펴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을 동원해 이 농업 식민정책의 선전에 이용하고 있었다. 시기가 맞아떨어져서인지 정인택은 특히 ‘만주 개척정책’과 관련해 활동하면서 관련 글을 누구보다도 많이 썼다.

1942년 6월 조선총독부 사정국 척무과 촉탁(특수 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자격으로 장혁주, 유치진과 함께 만주에 파견됐다. ‘약 20일간 만주 개척민 부락을 돌아보고 거기서 느낀바, 본 바를 작품화하여 국민문학의 새 경지를 개척게 하자’는 뜻에서였다.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정인택은 매일신보에 연재(1942.7.27.~29.)한 「대지의 역사」를 통해 일제의 요청에 화답했다. 그는 1939년 12월 공표된 ‘만주개척정책의 기본 요강’ 덕분에 조선인 개척민도 일본인 개척민과 동등하게 취급돼 각종 편의를 받게 됐다고 선전했다.

1942년 9월호 『신시대』에 발표한 「옥토의 표정」에서도 “국토개척의 선사(選士)가 되려면 첫째로 근로정신의 존중이 필수조건이다. 즉 모든 곤고결핍(困苦缺乏)을 극복하고 자가 근로에 의하여 흥아(興亞)의 초석이 될 수 있을 만한 왕성한 개척정신의 소유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주민 지도’의 ‘책임’을 운운하면서 조선 이주민의 자부심을 유도하기도 했다.

“만주 개척민 사업이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정신으로 일관되어야 하는 성업(聖業)이다. 민족 협화의 중핵으로 고도의 생활양식을 만주의 기후와 풍토에 맞게 새로이 창조하는 동시에 원주민을 지도하여 신흥 농촌문화를 건설할 책임을 짊어졌다.”

소설가인지라 그는 이러한 주장을 더 구체화하는 소설을 썼다. 1942년 11월호 『조광』에 발표한 「검은 흙과 흰 얼굴」은 만주 개척민 마을을 돌아보고 와서 쓴 단편이다. 작가의 분신 격인 주인공이 개척민 마을로 드는 장면에서부터 서술이 예사롭지 않다.

“이 황량한 벌판을 처음 보고 그 막막한 황야 속에 갖은 고초를 달게 참아가며 만주개척이라는 성업(聖業)에 정진하고 있는 조선 농민들의 생활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철수는 그 물소리를 범연하게 듣고 말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첫사랑 애인 혜옥이 같은 현대풍의 여교사 마쓰바라를 발견한다. 혜옥은 신진 소프라노 가수로 홀어머니의 물욕에 희생돼 전락하다 행방을 감춘 여인이다. 그런데 마쓰바라는 교육문제가 급한 마을에서 희생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개척민 부락으로 이주해 헌신하라’

감동한 그는 구태여 그 여자가 혜옥임을 확인하려 들지 않고 그저 ‘근대 젊은 여성의 훌륭한 모습’을 발견한 것으로 만족한다. 정인택이 이 소설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허영과 물욕’에 사로잡혀 있는 도시 젊은이들은 구태를 청산하고 개척민 부락으로 이주해 헌신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선구적 지식인이 맡아야 할 역할이라면서.

1942년에 발표한 「농무」(『국민문학』 11월호)도 조선 이주민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지식인이 아닌 농민의 아들인 조선인 트럭 운전수 센다. 만주사변(1931)이 일어나자 센다는 북쪽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치지만 비적을 토벌하다 다친다. 군과 만주척식회사의 도움으로 안투현에 일자리를 얻게 된 그는 우연히 현의 개척민 명부에서 자기 가족과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러나 비적 토벌에 바빠 센다는 미처 가족을 찾아보지 못한다. 어느 날 새벽 가족이 머물고 있음 직한 마을에서 연기가 오르자 가족과 마을 사람을 구할 셈으로 토벌대를 태운 트럭을 전속력으로 몰기 시작한다. 그는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깨쳐 나가는 이주민, 일제의 정책적 농업 식민을 만주에서 재현해 주는 ‘기특한 조선인’이다.

마지막에 센다는 “언제까지나 가난한 농민으로 지낼 것인가. 만주에는 얼마든지 넓고 비옥한 토지가 있다. 그것을 개척하고, 그것을 경작해……”라고 생각하며 “새들도 지나가지 않는 높고 높은 산서성(山西省) 산꼭대기의 적진을 일루(一壘) 또 일루 초인적인 의지로 무찔러 가는 황군 용사들의 신 같은 자태”를 의식하며 트럭을 탄 채 적진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밖에도 그는 경성일보를 통해 「하얼빈에서」(1942.06.18.), 「천진에서」(1942.06.23.), 「모란강에서」(1942.06.25.), 「연길에서」(1942.06.30.) 등과 같은 여행스케치를 발표했고 「여신초」, 『국민문학』 1942년 7월호), 「개척민의 감정」(『춘추』 1942년 8월호) 등과 같은 산문도 내놓았다.

세 차례에 걸쳐 관계좌담회를 가진 뒤 「만주 개척민 시찰보고」(『녹기』, 1942년 8월호), 〈개척 농민 시찰 좌담회〉(『신시대』, 1942년 9월호), 「개척민 부락장 현지 좌담회」(『조광』 1942년 10월호)라는 제목으로 결과물도 발표했다.

1942년 9월 정인택은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간사를 맡았다. 같은 해 12월 26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만주국 젠다오성이 초빙하고 조선문인협회가 파견하는 형식으로 젠다오성 조선인 개척촌을 시찰했다. 시찰단에는 소설가 채만식, 이석훈, 이무영, 정비석 등이 함께했다.

시찰 후 좌담회(「간도성 시찰 작가단 보고」,《녹기》 1943년 2월호)에서 만주 이민의 황국신민화가 물질적으로 토대가 마련됐으니 이제부터는 정신적 수련을 할 시기가 됐다고 주장했다. 또 현재의 분촌 계획이 잘 실행돼 생활이 향상되면 이주민들의 황국신민화도 확고하게 정착될 것으로 전망했다.

1943년 4월 정인택은 『반도의 빛』에 산문 「낙토에 충천하는 개척민의 의기」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자기 먹을 식량의 경작을 포기하더라도 국가가 요구하는 (군수물자로서의) 콩이나 대마 같은 것을 다량 심고 또 출하해 온 만주 이주민들의 의기를 칭찬했다. 그러면서 그들을 제일선의 용사에, 반도인을 총후 국민에 비유했다.

1943년 6월 정인택은 ‘세계 최고의 황도문학을 수립하고자 싸우는 문학자’(결성선언문) 조직인 조선문인보국회 소설 희곡부회 간사를 맡았다. 1940년대 후반기에 정인택은 일제의 징병 관련 글을 부쩍 많이 쓰면서 학병·지원병·징병을 선전·선동했다. 또 이른바 ‘불타는 국민적인 것에의 열정’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고 찬양하는 소설을 발표했다.

침략전쟁 지원, 찬양 소설, 국어문예총독상 수상

8월, 징병제 감사결의 선양행사에 협찬해 부민관에서 개최된 ‘낭독과 연극의 밤’에 그가 지은 네거리소설 「불초의 자식들」을 영화배우 남승민이 낭독했다. 이 작품은 무지한 조선의 어머니가 ‘내지’의 어머니와도 같이 ‘군국의 어머니’로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극악했던 장남이 불과 6개월의 조련으로 몰라볼 만큼 늠름하고 단정한 젊은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나이 든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지원병 훈련소란 얼마나 편리한 곳이라나. 다음 자식도 그다음 자식도 꼭 그곳에 넣어 달랑게.’ 나중의 두 자식도 형에게 뒤지지 않는 녀석들로 이 불초의 자식들 때문에 나이 많은 모친의 고생은 끊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의 두 사람은 지원병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반도에도 영예의 징병제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불구가 아닌 한반도의 젊은이들도 국가의 간성이 될 때가 온 것이다. 그때쯤 나이 많은 모친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군대에 보내는 것을, 감화원에라도 넣으려고 하는 것쯤으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모친은 셋 모두 하나같이 변변치 못한 자식을 나라에 바치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 몸의 능력 부족과 불운을 마음속으로부터 한탄하고 슬퍼하기 시작했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지한 모친의 마음속에, 이 변화를 가져오게 된 사연이라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 「불초의 자식들」 전문, 『조광』(1943년 9월호)

말썽 많은 자식이 지원병으로 입대함으로써 걱정을 던 모친이 나머지 두 아들도 지원병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일시에 그 소원이 이뤄졌다. 징병제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모친은 아들을 감화원에 넣으려는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탄하기 시작한다.

자식 셋을 다 사지에 보내서가 아니라 ‘셋 모두 하나같이 변변치 못한 자식’을 나라에 바치지 않으면 안 되는 능력 부족과 불운을 슬퍼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무지한 조선의 어머니는 ‘내지’ 어머니 못잖은 ‘군국의 어머니’가 되긴 하는데 정인택은 그걸 잔뜩 포장해 찬양한 것이다.

▲ 태평양전쟁에서 황군은 결국 패배했다. 항복의 표시로 미군에게 일본도를 바치는 일본군(1945년)

1943년 9월 제4회 항공일 특집 ‘항공의 밤’ 라디오 방송에서 정인택은 「이야기 무산융: 다케야마 다카시) 대위」를 발표했다. 다케야마 대위는 경북 선산 출신의 최명하(1918~1942),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졸업해 최초의 조선인 비행 장교로 임관해 수마트라의 파칸발 비행장을 공격하다 전사했다.

다케야마는 1942년 1월 일본군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파칸발 비행장을 공습하다가 부상으로 불시착했다. 수마트라섬 원주민의 집에 은신하면서 치료를 받던 도중 네덜란드군의 포위 공격에 맞서 총격전을 벌였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권총 한 발을 쏘아 자살했다.

1943년 8월 31일 일본 정부로부터 육군 대위로 추증되면서 수훈 갑, 공 4급, 훈 6등 욱일장을 추서 받았으며 나중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일제는 그의 전사를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조선인 청년 용사의 업적으로 선전했으며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징병제를 홍보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정인택의 글은 총독부의 의도에 충실히 부응한 셈이었다.

“조선인 대위처럼 황은에 보답하자”

조선인 다케야마 대위의 전사는 ‘목숨을 다 바쳐 황은에 보답하자’는 선동의 근거로 자주 인용됐다. 「무산 대위의 일들」에서 정인택은 그를 상찬하면서 그를 조선에서 상무의 기풍을 불러 깨우는 ‘선도자’로 기렸다.

“징병제의 실시를 보게 된 오늘날의 반도에서 잠류(潛流)하고 있는 이러한 상무의 기풍을 불러 깨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항인 것이다. 다케야마 대위는 25년의 짧은 한평생을 바쳐서 잘도 그 도표(導標)가 된 선도자(이다).”

- 「무산 대위의 일들」, 『조선』(1944년 2월호), 『국민총력』(1944년 9월호)

『조선』에 실린 산문에서 정인택은 “나는 무산 대위를 완벽하게 그림으로써 반도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를 주며, 황민으로서의 자각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한 번 죽어서 나라에 보답하는 남아의 기개를 고취하고 싶다는 염원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붕익」은 다케야마의 상무정신을 형상화한 소설이다. 정인택은 그가 밀림에 불시착해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떠올렸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자아 인젠 죽을 때가 왔다. 남 부끄러운 죽음을 말아라. 황국의 신민답게 네 최후를 찬란하게 장식해서 이 고장 원주민들의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겨 놓아라. 그뿐이냐, 너는 반도 청소년의 선각자로서 가장 군인다운 죽음을 하게 되었다. 네 뒤에서 징병제를 목표로 수없는 반도 청소년이 군문(軍門)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는 것을 최후의 일순(一瞬)까지도 잊지를 말아라…….”

- 「붕익」, 『조광』(1944년 6월호)

1944년 6월과 8월 사이에 그는 『반도의 육독(독수리) 무산 대위』를 발표했다. (현재 이 소설은 전해지지 않는다). 12월에는 일본어 소설집 『청량리 일대』를 발간했다. 『청량리 일대』와 『반도의 육독 무산 대위』로 정인택은 1945년 3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쇼와 19년도(1944년) 제3회 국어문예총독상의 마지막 수상자가 됐다.

정인택은 황민적인 자각을 통해 진정한 ‘일본인’으로 태어난 선구자로서의 문학인(지식인)은 끊임없이 민중을 계몽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가 소설 「청량리 일대」(『국민문학』 1941년 11월호)에서 제시한 지식인상은 바로 그 전형이다.

이 소설은 지식인 부부가 경성의 변두리 빈민가인 청량리에 이사 와서 점차 주민과 동화해 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애초 이기적이었던 아내가 애국반장을 맡아 주민을 계몽해 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애국반은 일제강점기 전시 체제하에서 조선인의 생활을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주인공과 그의 아내는 어느덧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돼 전시 하 애국반의 모범을 이루어 낸다. 여기서 ‘주인공 부부와 주민’의 관계는 볼 것 없이 ‘식민 본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 관계의 축소판이다. 정인택은 일제의 속내를 한 마을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아주 세련되게 포장해 형상화한 것이다.

정인택의 친일소설들은 하나같이 애국반 정신의 고양, 황도 조선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앙양, 지원병 징병의 권유며 대화혼의 예찬, 만주개척 기타의 국책 선전 등으로 일관했다. 덕분에 국어문예총독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지만, 같은 이유로 그는 해방 조국의 독자에겐 잊힌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청량리 일대」는 애국반 정신의 고양이라는 일제의 이해에 부응하는 작품이긴 했다. 그러나 임종국의 지적처럼 그의 의도가 소설 전체의 ‘분위기 속에 무리 없이 융화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예술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 천인침. 센닌바리로 불리는 천인침은 부적과 같은 역할을 했다.

▲ 거리에서 천인침에 사람들로부터 붉은 실로 한 땀씩 바느질을 얻고 있다. 전쟁 당시 유행한 일본 풍습이다.

단편소설 「뒤돌아보지 않으리」(『국민문학』 1943년 10월호)는 지원병으로 나간 주인공이 ‘총후’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작품이다. 그는 황국신민의 역할을 다한 어머니를 치하하고 동생을 ‘제 몫의 군인’으로 키워달라고 부탁한다.

“어머니!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천인침(千人針:샌닌바리)를 가르치시고, 신사참배를 가르치시고, 앞장서서 일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그걸로 족합니다……. 어머니는 마을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북돋아 주십시오. 그리고 겐(賢)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제 몫을 하는 군인으로 키워 주십시오. 그것만이 어머니의 역할입니다.

(……)

한 번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린 기억이 없는 저는 지금 폐하의 방패로서 목숨을 바치고, 어머님께 단 한 번의 효도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머니, 제가 귀여우시다면 부탁 말씀이오니 제가 용감하게 싸우고 죽었다고 들으셨을 때, 손뼉을 치고 기뻐해 주십시오. 잘했다, 내 아들아, 하고 칭찬해 주십시오.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하고 동네방네 외치며 다녀 주십시오.”

그는 동생에게 기쁘게도 징병제 시행으로 언젠가 ‘영광스러운 초대’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제 전사할 때가 됐다면서 ‘천황’을 위한 영광스러운 죽음을 노래한 군국가요 〈유미유카바〉(바다에 가면)를 비장하게 노래한다. 제목인 ‘뒤돌아보지 않으리’는 바로 이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다.

정인택은 학병과 지원병, 징병을 선전·선동하는 소설도 적지 않게 발표했다. 소설 「행복」(『춘추』 1942년 1월호)에서 주인공의 사생아는 ‘지원병’이 되기 위해 그의 호적에 입적해 주길 부탁하고 「껍질」(『녹기』 1942년 1월호)에서 주인공의 아우는 지원병이 되기 위해 구세대 아버지의 ‘단단한 껍질’과 싸워나간다.

작품집 『청량리 일대』에 실린 「각서」에서 주인공은 어려운 형편에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보살핌에 경성제대 법과생이 됐는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각서’를 쓰고 학도병에 자원한다. 반대할 줄 알았던 어머니마저 적극적으로 권하자 그는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황은에 보답할 때’라는 걸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1945년 6월에 발표한 「히틀러 전초」(『조광』 5·6월 합병호)는 두 달 전에 죽은 히틀러를 추모하는 글이다. 그는 히틀러에 대해 “한평생 조국 독일을 위하여 싸우라는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난 영웅”이라 추켜세웠고 그의 싸움은 “세계 신질서 건설을 위한 싸움”이었다고 추모했다.

▲ 정인택과 친우들. 왼쪽부터 화가 이승만, 소설가 박태원과 함께

1945년 8월 정인택은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회 간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지막 친일 부역이 됐다. 8월 15일 그가 오매불망 승전을 기원했던 대일본제국의 황군은 미영귀축(미국과 영국의 도깨비들과 짐승)에 무조건 항복을 하고 만 것이었다.

해방 뒤 정인택은 일부 좌경화된 경향을 내보이며 작품활동과 언론 활동을 재개했다. 대한독립 협회 기관지 격인 중도 좌익 경향의 대한독립신문 (뒤에 ‘민보’로 개제)이 1947년 1월 속간될 때 편집국장을 맡았다. 같은 해 8월에는 문화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다.

1948년 10월 소설집 『연연기』(금룡도서)를, 1949년에는 동화집 『난쟁이 세 사람』을 발간했다. 같은 해 4월 19일 반민특위에서 발표한 ‘미체포 반민자 리스트’ 중 ‘제3부(문화부)’ 명단에 포함됐지만, 그의 체포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고 얼마 뒤에 반민특위는 해산됐다.

12월 5일 남한 정부가 주도한 종합예술제 행사의 하나로 ‘이북 문화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할 때 그는 서울신문 지면에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에게 경고」라는 글을 발표했다. 1950년에는 보도연맹에서 근무했고 6·25 전쟁 중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그는 왜 북으로 가는 선택을 했을까

정인택은 일제강점기부터 이념과는 거리가 먼 작품을 썼고 광복 후에는 보도연맹에서 근무했을 뿐 문단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북 문화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쓴 까닭도, 북으로 가게 된 경위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그는 이상(1910~1937), 박태원(1909~1986)과 가까웠고 평론 「불쌍한 이상-요절한 그들의 면영」(『조광』 1939년 12월호)을 썼다. 친구 이상의 연인이었던 권영희와 결혼한 정인택은 1953년 북한에서 병사했다.

권영희는 몇 년 후 월북작가 박태원과 재혼했으며 박태원 슬하에서 자란 정인택의 차녀 정태은은 북한에서 유명 작가가 됐다. 이는 2006년 이산가족 상봉으로 북의 누나를 만난 박태원의 차남을 통해서 알려졌다.

소설 내용과 문단 활동, 교우 관계로 볼 때 그는 사회주의적인 의식이 뚜렷한 작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국전쟁 중 월북했다는 낙인 때문에 우리 문학 연구의 담론에서 외면돼 왔다. 그의 작품이 해금된 이상 정인택 소설은 기법상의 가치를 중심으로 새롭게 평가돼야 한다는 게 학계의 판단이다.

정인택은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됐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부친 정운복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직썰 필진 낮달


<참고자료>

- 임종국 저, 이건제 교주, 『친일문학론』, 민족문제연구소, 2013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월북작가 박태원 가족사랑 지극, 한겨레 (200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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