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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주도성장’이라는 희대의 개드립

  • 입력 2018.09.07 11:09
  • 수정 2018.09.07 11:24
  • 기자명 임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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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자유한국당 대표는 9월 5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이른바 '출산주도성장'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한겨레




#1

지금도 출산 장려를 위한 현금 복지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만 5세까지는 가정양육수당(10~20만 원), 보육료(22~40만 원), 유아학비(6~22만 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양육수당이 지급되고 있습니다. 아동수당도 매달 10만 원씩 주고 있고요. (구체적인 숫자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네요.)

김성태의 출산주도성장의 골격은 단순합니다. 출산장려금 2000만 원 + 이후 20년간 매년 평균 400만 원의 양육 아동수당 지원. 그래서 총 1억 원의 현금 지원을 하겠다는 건데요.

사실 저출산 예산은 지금도 30조 원을 상회합니다. 신생아 1명당 무려 7700만 원 꼴이죠. 이 예산을 전부 사업에 집행하는 대신 현금으로 뿌려버리면 당장이라도 김성태의 출산주도성장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건 흥미롭게도 진보 일각에서 나오는 ‘기본소득’과도 맞닿은 데가 있습니다.

괜한 사업 벌여봐야 사업 집행하느라 비용 소모되고 정보 격차에 따라 누구는 혜택 받고 누구는 못 받고. 정작 수혜층도 복지 체감이 안 되니 그냥 현금으로 뿌려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 예산에는 허수가 있습니다.

저출산 예산 중 대부분은 보육, 교육 예산과 난임 지원 등에 소요됩니다. 일부 청년 일자리 창출 예산도 저출산 예산에 포함됐습니다. 굳이 저출산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이뤄져야 할 다양한 사업을 묶어 "이게 모두 저출산 예산"이라고 과장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이만큼의 예산을 순전히 현금으로 뿌리기엔 상당한 애로사항이 따르죠.

#2

그리고 김성태의 계산은 처음부터 이상합니다. 그는 연간 아동/양육수당이 첫해 1조 6000억 원을 시작으로 20년 후에는 32조 원으로 늘 것이라고 계산하는데요.

이건 즉, 이미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아동/양육수당을 한 푼도 안 준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이 법안이 2018년 10월에 실행된다면 2018년 9월생에게는 한 푼도 안 주고 2018년 10월생부터만 1억 원을 쏘겠다는 거예요. 기존 부모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아주 방탄소년단 유튜브 조회 수 급으로 대폭발시키려는 모양입니다.

아차..! ⓒ중앙일보

또, 그는 한해 신생아 수를 40만 명으로 상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출산장려금 8조 원에 연간수당 1조 6000억이란 숫자가 나온 거죠.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20년 후엔 연간수당에 소요되는 예산이 32조라고 계산했는데 이건 말하자면 20년 후에도 신생아 수가 전혀 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1조 6000에 그냥 20만 곱한 수거든요. 그렇게 돈을 뿌렸는데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신생아 수가 난 항상 제자리라는 거에요.

다시 말해 이 숫자는, 출산주도성장이 작동하지 않을 거라고 가정했을 때만 나올 수 있는 숫자입니다. (...)

예산은 숫자와의 싸움입니다. 돈은 어디서 허투루 나오는 법이 없어요. 그런데 수백 조 단위의 사업을 구상하면서 그것도 순수한 현금만 저렇게 뿌리는 사업을 계획하면서 숫자를 이렇게 대충 계산했다? 이건 말이 안 되죠. 아마 김성태 본인도 이게 실현 가능한 사업이라고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질러보기, 정치적 선전이라는 거죠.

#3

경기침체에는 돈을 뿌리는 게 정석이라지만(…) 이런 현금 지원은 여러 부작용을 야기합니다. 정말, 대부분의 경우 그러지 않겠지만, 막말로 지원금만 노리고 아이를 갖는 막장 부모가 없으리란 법도 없고요.

또한 이런 현금 지원 사업은 현재 저출산을 야기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사실상 방기합니다. 결혼 회피, 경력 단절이요. 경력 단절은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체성, 자아, 삶의 의미와 직결된 문제죠.

ⓒ산업경제뉴스

경력 단절 대책은 아주 어렵습니다.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이 연 단위 이상 휴직한다는 건 굉장한 손해가 됩니다. 회사가 한 사람의 직원을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결코 무시할 수 없죠. 그 비용을 처음부터 다시, 완전히 전부는 아닐지라도 상당 부분 다시 지출해야 하는 겁니다.

육아휴직을 강제하는 방안이 결국 가장 유력하지만, 함부로 시행했다간 그냥 회사가 가임기 여성을 처음부터 배척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양성 모두 동일하게 육아휴직을 강제해야겠지만, 일하겠다는 사람을 강제로 육아휴직시키는 것도 애로사항이 따르고요.

이런 문제를 개개인에게 현금을 주면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육아휴직을 쓰는 개인뿐 아니라 기업들에도 육아휴직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할 만큼의 강력한 유인이 제공되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현금성 복지가 언제나 최선의 수가 아닌 까닭이겠죠.

출산주도성장(…)은 별생각 없이 지른 개드립에 가깝겠지만, 저출생 문제는 상당히 심각합니다. 나오는 대책들이 하나같이 미봉책에 가까운 만큼 뭔가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것 같긴 합니다.

현재로서 가장 먼저 요구하고 싶은 것은 우선 사회적 동반자 개념을 도입하고 미혼부, 미혼모에 대해서도 복지 혜택을 제공하여 결혼 외 출생을 보조하는 것, 그리고 경력단절 방지를 위해 친기업적으로 보일 정도로 강한 유인을 기업에도 제공하는 것 정도겠네요.

직썰 필진 임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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