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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심리학적 이유

  • 입력 2018.08.18 09:48
  • 기자명 허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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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PR의 시대

MBC에서 일요일 오전에 방영했던 <사랑의 스튜디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짝을 만나기를 희망하는 남녀가 나와 커플 게임 등으로 친분을 다지고, 마지막에 일명 사랑의 작대기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의 시작과 함께 각 남녀 출연자들의 자기소개가 차례로 이어졌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적극적으로 자신, 혹은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는 행위. 그걸 자기 PR이라고 하는구나.

MBC <사랑의 스튜디오>.. 언제적..예능이지..?

자기 PR의 시대라는 말은 사실 80-90년대부터 있었다. 공중파 메인 저녁 뉴스를 보노라면 X세대, N세대 등 신세대의 풍속도를 조명하는 꼭지가 간간히 등장하곤 했다. 기자는 번화가에 나가 개성 있는 패션으로 중무장한 신세대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러면 인터뷰에 응하는 신세대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은 자기 PR 시대잖아요", "튀는 것이 유행이에요."

그러나 당시가 얼마나 '자기 PR의 시대'였는지 생각하면 글쎄요다. 자기 PR이 열풍이 되고, 사회 흐름을 주도했다고 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감이 있었다.

사실 자기 PR이라는 말은 당시에는 당당하고 거칠 것이 없는, 기성세대의 권위와 질서의 저항하는 듯한 신세대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자주 쓰였다. 젊은 세대만의 독특성을 가리키는 한정적인 표현. 세대를 넘나들며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어딘가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던 때였다.

Social Network Service!

진정한 의미의 '자기 PR 시대'는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각종 SNS와 영상, 이미지 콘텐츠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본격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 자기 PR에 대한 열망이 전 세대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사회 트렌드가 됐음을 실감할 수 있었던 계기는 다름 아닌 싸이월드와 미니홈피의 엄청난 인기몰이였다. (그때는 말 그대로 미니홈피에 매달려 살았다)

방명록이 몇 개인가, 일촌평이 얼마나 주루룩 길게 달려 있는가, 또 그 위에 아바타는 얼마나 또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는가, 미니홈피 좌측 인사말은 또 얼마나 간지나는가, 미니홈피 배경음악은 과연 얼마나 세련됐나 등등 미니홈피엔 자기표현을 위해 관리할 게 많았다.

나는 좀 늦게 대학생이 되어서야 미니홈피의 맛을 알게 되었는데, 그 짧은 경력에도 불구 미니홈피는 순식간에 나의 자기 PR 욕구를 자극하고 있었다. 나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누군가 봐준다는 것이 이리도 중독적일 줄이야.

이후 이어진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본격적인 SNS는 자기표현과 인정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근원적인 것인가를 잘 보여줬다.

그것은 단순히 한 시대나 세대의 욕구가 아니었다. 과거에는 그 수단이 잘 마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PC,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SNS 플랫폼들이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자 SNS와 그로 인해 분출되는 욕구는 사람들의 삶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는 글쓰기 열풍

SNS를 토대로 이미지와 영상 콘텐츠가 범람하면서, 반대로 글쓰기라는 (자기표현) 수단은 기나긴 암흑기에 접어드는 듯이 보였다. 간결함과 직관성, 그리고 그 찰나에 담기는 강렬한 메시지. 이미지와 영상은 이 시대 최고의 광고수단이자, 엔터테인먼트이자, 자기표현 욕구의 충족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각종 매스컴에선 글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대한 한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성장세는 그칠 줄을 모른다. 나도 이제 글의 시대는 저물어 가는구나 했다. 유튜브(영상)와 인스타그램(이미지)에 완전히 대권을 내어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판도 변화가 다소 심상치 않다. 어느새인가 글,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심심찮게 눈에 띄고 있다. "나도 작가가 될 수 있다" "1인 1책 쓰기" 등의 슬로건을 내건, 주로 퇴근 후 시간이 비거나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직장인들을 타겟으로 한 글쓰기 강좌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다.

유시민, 강원국 등 글을 잘 쓰기로 정평이 난 유명 전문가들에 대한 관심도 여느 때보다 뜨겁다. 글쓰기를 주제로 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인터넷에서는 웹 소설 시장의 약진이 무척 고무적이다.

모임 플랫폼 <온오프믹스>에서 검색된 글쓰기 관련 강좌들

사람들이 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추측해보자면 잃어버린 진득함이 새삼 그리워진 것은 아닐까. 화려하고 자극적인 이미지와 영상에 대한 반작용은 아닐까. 주지하다시피 글이라는 매체는 본질적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에 기대어 메시지와 서사를 전달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도 독자들에게 직접 체험시켜줄 수 없으니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보시라는 의미로, 한 줄 한 줄에 사유와 성찰(자기표현)을 꾹꾹 눌러 담지 않으면 안 된다. 읽을 때든 쓸 때든 이는 영상과 이미지로는 채우기 힘든 부분이다.

심리학자들도 글쓰기 활동을 권한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차분하게 정리하는 데 좋다는 이유에서다. 일기를 쓰든, 편지를 쓰든, 에세이를 쓰든 무엇이든 쓴다면 좋다.

잘 쓰든 못 쓰든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는 한 번이라도 더 돌이켜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므로 이롭다는 것이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단지 머리 속에서 떠올리고 정돈할 수 있는 생각의 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래서 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생각은 잘 정리되지 않고, 글은 쓸수록 사유를 풍부하게 만든다.

이미지와 영상에 빼앗기는 무수한 시간들이 아까웠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들이 너무 빨리 휙휙 지나가니 어지럽고 도통 정신이 없어 잠시 멈출 기회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사이클이 다시 돌아 사람들은 글에 주목하고 있다.

이렇게 계속 돌고 도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본다. 한창 글 찾다가 지겨워져서, 다시 그림 보고 사진 보고 영상을 보고. 그러다가 생각 없이 사는 것, 정신없이 사는 것이 또 퍽이나 유치해져서 다시 글을 찾게 되고, 하는 식의 반복이 이어질까.



직썰 필진 허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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