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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이 ‘동의보감’ 쓸 때 서민을 위해 세운 대원칙

  • 입력 2018.08.06 11:21
  • 수정 2020.08.12 19:53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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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허준 <동의보감> 25권 완성

▲ 구암 허준(1546∼1615) ⓒ허준박물관

1610년(광해군 2년) 8월 6일(음력, 양력으로 9월 22일) 민족 의학을 정립시키는 대역사(大役事)에 매진해 온 허준(許浚, 1546∼1615)이 마침내 25권에 이르는 방대한 의서를 완성했다. 왕명으로 한나라 때 체계화된 한의학을 중심으로 동방 의학을 집대성하고자 한 저술에 착수한 지 14년 만이었다.

애당초 이 책은 1596년 선조의 왕명으로 내의원(內醫院)에 편찬국을 두고 허준을 비롯해 어의(御醫) 양예수, 이명원, 김응탁, 정예남 등과 민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의(儒醫) 정작 등 5인이 공동으로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양예수는 당대의 신의(神醫)로 평가받은 어의였고 정작은 민간의 도교적 양생술의 대가였다.

이들은 초기에 편찬의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리고 병이 안 걸리도록 하는 방법을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당연히 몸을 잘 지키고 병을 예방하는 것이 병 걸린 후 치료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둘째, “무수히 많은 처방의 요점만을 간추린다.” 당시 중국에서 수입된 의학책이 매우 많았지만, 책마다 엇갈리는 내용이나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셋째, “국산 약을 널리, 쉽게 쓸 수 있도록 약초 이름에 조선 사람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 시골에는 약이 부족해 주변에서 나는 약을 써야 하는데 그게 어떤 약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시골 사람이 부르는 약초 이름을 쓴 것이었다.

▲ 허준의 <동의보감> 권1(국보 제319-2호)(왼쪽)과 청나라에서 간행한 <동의보감>(1766년 추정)

그러나 착수 1년 후에 정유재란(1597)으로 사업이 중단되면서 선조는 허준에게 다시 명해 단독으로 편찬토록 하되 시급한 의학책인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등 3종을 우선 지어내라고 교시했다. 또, 내장방서(內藏方書) 500권을 내줘 편찬에 고증할 수 있게 했다.

이 3종의 책은 그해에 지어서 바쳤으나 허준은 공무로 바빠서 <동의보감> 편찬은 1608년이 되도록 절반도 끝내지 못했다. 같은 해 선조가 승하하자 그 책임을 물어 허준은 의주로 유배됐다. 유배 이후 연구에 전념한 시간을 얻은 허준은 단시간에 책의 절반 이상을 써냈다.

1609년 말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허준은 이듬해인 1610년 8월 완성된 의서를 광해군에게 바쳤다. 광해군은 허준이 선왕의 유업을 완수했다고 해 그에게 좋은 말 1필을 상으로 내렸다. 전란 직후라 출판 사정이 좋지 않아 <동의보감>은 3년 뒤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태의(太醫) 허준이 일생을 걸고 저술해 완성된 의서는 1613년 11월에 <동의보감>이라 이름해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 목활자로 인쇄, 간행됐다. 책 이름에서 ‘동의(東醫)’란 중국 남쪽과 북쪽의 의학 전통에 비견되는 동쪽의 의학 전통 즉, 조선의 의학 전통을 뜻한다.

‘보감(寶鑑)’이란 “보배스러운 거울”이란 뜻으로 귀감(龜鑑)과 같은 뜻, 허준은 조선의 의학 전통을 계승해 중국과 조선 의학의 표준을 세웠다는 뜻으로 ‘동의보감’이라 이름 지은 것이었다. 이 책에 인용된 의서는 세종 때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와 선조 때의 <의림촬요(醫林撮要)>를 비롯해 중국의 한나라, 당나라 이래 명나라까지의 의서 등을 망라하고 있었다.

3년 뒤, 목활자 개주갑인자로 인쇄 간행

▲ <동의보감> 서문. 이 책은 목활자인 개주갑인자로 인쇄, 간행됐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허준은 양생(養生) 사상을 중심으로 해 중국 의학 이론과 처방의 난맥상을 바로잡고 향약(鄕藥) 사용의 이점을 최대화하며 최소한의 약으로 최대한의 의학적 효과를 얻으려고 힘썼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를 회복하는데 획기적인 의학을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동의보감>은 목차 2권, 의학 내용 2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학 내용은 5편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것은 「내경편(內景篇)」(6권)·「외형편(外形篇)」(4권)·「잡병편(雜病篇)」(11권)·「탕액편(湯液篇)」(3권)·「침구편(鍼灸篇)」(1권) 등이다.

이 책은 신체에 관한 내용을 안팎으로 나눠 신체 내부와 관련된 내용을 「내경편」에, 신체 외부와 관련된 내용을 「외형편」에 담았다. 신체 관련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병 이론과 구체적인 병 내용은 「잡병편」에 묶었다. 「탕액편」은 가장 주요한 치료수단인 약에 관한 이론과 구체적인 약물에 관한 각종 지식을 실었고 「침구편」은 또 하나의 치료수단인 침·뜸의 이론과 실재를 다뤘다.

허준의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천이다. 무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정실이 아니어서 그의 신분은 중인 계급이었다. 그가 의관의 길을 택한 것은 이러한 신분의 한계 때문이었다. 그가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까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허준은 내의원으로 20여 년 일한 끝에 1590년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 품계를 받으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서자 출신의 허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종3품을 넘는 큰 상이었다. 그는 어의로 활약하면서 <동의보감>을 비롯한 8종의 의서를 집필해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가 됐다.

서자로 태어나 출세가도를 달리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며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임진왜란 공신 책봉에서 3등에 책정되며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다. 그러나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유배됐다가 돌아온 뒤에는 권세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1615년에 조용히 삶을 마쳤다. <동의보감>이 간행된 지 3년 뒤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정1품 보국숭록대부로 추증했다.

▲ 허준이 지어 바친 <언해태산집요>. 출산에 관한 증세와 약방문을 번역한 책이다. 보물 제1088호

▲ 허준이 지어 바친 <언해구급방>의 필사본. 위급 환자를 구하는 응급조치용 약방문을 번역한 책이다.

▲ 허준이 지어 바친 <언해두창집요>. 급성 발진성 질환인 두창에 대한 전문 의서를 번역했다.

의관 허준은 매우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출세는 조선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는데 이는 그의 의술과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다. 그의 입신양명은 양반들의 질시를 받아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스럽다’고 하는 세평(世評)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사와 무관하게 허준과 <동의보감>이 남긴 의학사에 남긴 업적은 크고 깊다. 그는 이 책으로 한국의학사는 물론이거니와 동아시아와 세계의학사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 존재로 동의(東醫), 즉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기 때문이다.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 존재

특히, 허준의 면밀한 성홍열 관찰 보고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초이고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그룹에 속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허준이 세계질병사 연구의 선구자 중 일인으로 평가받아도 부족하지 않은 이유다.

<동의보감>은 앞서 소개한 편찬 원칙을 지키면서 기존 중국과 조선 의학의 핵심을 잘 정리했다. 허준은 중국에서 간행된 200여 종의 문헌과 <의방유취>를 비롯한 여러 종의 조선 의서를 참고한 내용을 <동의보감>에 녹여내었다.

<동의보감>은 뛰어난 편집 방식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했다. 목차 2권은 오늘날 백과사전의 색인 구실을 할 정도로 상세하며 본문의 관련 내용끼리는 상호 참조를 가능하게 했으며 참고한 자료의 인용처를 일일이 밝혀 원저를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 극작가 이은성이 쓴 드라마 <집념>을 토대로 쓴 <소설 동의보감>. 미완의 작품인데 작가 사후에 간행됐다.

이런 특징으로 경쟁력을 갖춘 <동의보감>은 출간 직후부터 조선을 대표하는 의서로 자리 잡았다. 당대 최고의 고급 의학으로서 조선 의학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고 언해(諺解)본 의서는 의학 대중화의 촉진제가 됐다.

<동의보감>은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18세기 이후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됐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됨으로써 국제적 의서로 떠올랐다. 특히, 중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나 중국 의서 가운데 <동의보감>과 성격이 비슷한 종합 의서로 <동의보감>보다 많이 찍은 책은 불과 수종에 불과하다.

2009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의보감>

2009년 제9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바베이도스)에서는 <동의보감>이 담은 시대정신과 독창성, 세계사적 중요성 등의 가치를 인정해 1613년 허준이 간행에 직접 관여한 초판 완질 2본(오대산사고 본, 적성산사고 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 중인 <동의보감>(오대산사고 본, 25권 25책)은 1614년 오대산사고에 보관된 책이며 1991년 보물 제1085-1호로 지정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소장 중인 <동의보감>(적성산사고 본, 25권 25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동의보감>(태백산 사고 본, 24권 24책과 17권17책 2종류)은 2008년 각각 보물 제1085-2호, 제1085-3호로 지정됐다.

▲ 허준이 나서 자라고 <동의보감>을 짓고 죽은 강서구에 2005년 문을 연 허준박물관. 허준로에 87번지에 있다.

▲ 2001년부터 강서구에서 열고 있는 양한방 체험행사를 결합한 건강문화 축제인 허준 축제 ⓒ 허준박물관

허준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극작가 이은성(1937~1988)이 집필한 드라마 <집념>(MBC, 1975~1976)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다. 김무생이 주연한 이 드라마의 세부적 내용은 허구지만, 작가는 <동의보감>이라는 역저를 완성하기까지 허준의 집념을 중심으로 만만찮은 감동을 끌어냈다.

작가는 이 극본을 토대로 <소설 동의보감>을 모두 4권 분량으로 발간하려고 했으나 3권을 집필 후 마지막 부분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작가 사후인 1990년에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이 책은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문화방송(MBC)은 드라마 <동의보감>(1991), <허준>(1999)으로 작가의 원작을 이어갔다.

2005년 3월에는 그가 태어나고 <동의보감>을 저술한 곳인 서울 강서구에 공립 허준박물관이 개관했다. 강서구 허준로에 있는 이 박물관은 허준의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업적을 기리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강서구에서는 2001년부터 양한방 체험행사를 결합한 건강문화 축제인 ‘허준 축제’가 해마다 베풀어지고 있다.

<참고자료>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허준박물관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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