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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기자회견장, 은밀하고 강력한 젠더 정치

  • 입력 2018.05.28 10:35
  • 수정 2018.06.05 17:01
  • 기자명 강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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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텍사스 크리스쳔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강남순 교수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것으로, 본인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싣습니다.

1. 2018년 5월 26일,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의 판문점 회담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지켜봤다. 기자회견을 보면서 나는 그 정치적 의미의 중요성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은 변화'의 움직임을 보게 되어서 참으로 흐뭇했다.

ⓒ연합뉴스

회견이 끝나고 4명의 기자로부터 질문이 있었다. 3명의 국내 기자, 1명의 외신 기자로부터의 질문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질문자로 지목된 사람이 여성이었고, 유일한 외신 기자로 지목된 사람도 여성이었다. 즉 2명의 여성, 2명의 남성 기자가 질문자로 지목됐다.

물론 대통령이 스스로 질문자를 지목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조금 아쉽다. 그러나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 일어난 이러한 질문자의 '젠더 분배'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위'이다.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젠더 문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중요한 '정치적 행위'이며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한 '의도된 행위'라는 것이다.

2. 2014년 12월 19일,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연말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기자들로부터 8번의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이 기자회견이 화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오바마 대통령이 질문시간에 남성 기자들은 전혀 질문의 기회를 주지 않고, 8번 모두 여성 기자들로부터만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AP

오바마의 이러한 ‘파격적 행위’는 오랫동안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던 현실이 얼마나 큰 차별이었는가라는 ‘배제’의 현실을 거꾸로 남성들이 경험하게 한 사건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러한 소위 ‘미러링’ 행위는 물론 매우 정교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들 사이에도 여전히 성차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대통령의 ‘저항 행위’이며, 젠더평등의 요청성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에 던진 것이었다.

3. 백악관 출입 기자들로 이뤄지는 '백악관 기자협회(The White House Correspondents Association)'의 만찬은 1962년까지 여성에게 문이 닫혀 있었다. 1962년 헬렌 토마스(Hellen Thomas)가 초대되기까지 여성 기자들이 백악관에 출입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여성 기자들이 백악관에 등장한 이후로도, 여성 기자들은 성차별을 경험해 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취재하는 모습. ⓒAP

1987년 백악관 기자회견 중,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질문하는 모습. ⓒAP

예를 들어서, 조지 부시 대통령은 임기 중 43번의 기자회견을 했다. 그런데 그 43번의 기자회견에서 여성 기자들에게 질문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성차별적 구조에 오바마는 ‘미러링’의 행위를 통해서 의도적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여성 기자들로부터만 질문을 받은 오바마의 연말 기자회견장에 있었던 남성 기자들은, 이 ‘거꾸로 된 실험’에서 여성 기자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당했던 차별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지는 오바마 대통령의 이러한 시도를 “놀라운(remarkable)” 또는 “경외스러운(awesome)” 일이라고 극찬했다.

2009년 헬렌 토마스와 오바마 대통령. ⓒAP

4. 기자회견장은 '보이지 않는 젠더차별'이 줄기차게 행사되는 정치적 공간이다. 누가 청와대 출입 기자인가, 누가 대통령 기자회견장에서 질문하는 '발화의 주체'로 지목되는가는, 언제나 '정치적 행위'이며 또한 '젠더 정치'의 수준이 드러나는 정치적 공간인 것이다.

문 대통령은 기자회견이 끝나고 나가면서, 여성 기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여성 기자들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물론 우연한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내게는 문 대통령이 지닌 '젠더 평등 지향적 가치'가 담긴 몸짓으로 보였다. 우리가 하는 행위들, 특히 대통령과 같이 그 사회의 온갖 권력이 집중된 사람의 행위에서는 아무것도 '사소한 것'은 없다. 행위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모든 행위는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

ⓒ연합뉴스

5. 문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면서 작은 바람을 가지게 된다. 언젠가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서, 그리고 대통령의 기자회견장에서 질문하도록 지목받는 기자 중에서, 젠더(남성, 여성, 트랜스젠더)는 물론이고, 장애(장애인, 비장애인) 등의 측면에서 평등성과 다양성의 메시지가 실천되는 중요한 본보기의 예증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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