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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뚝심송’ 박성호 님 빈소에 다녀와서

  • 입력 2018.05.16 14:07
  • 기자명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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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뚝심송’ 박성호 님의 빈소 영정사진

고인의 부음을 접한 것은 5월 12일 오후였다. 노혜경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물뚝심송 님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 고인은 12일 오전에 별세했다. 사인은 오랫동안 투병해온 구강암. 빈소는 일산 백석역 인근 일산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14일 월요일 오전 11시 반, 장지는 경기도 수원시 호매실동 선영)

고인의 나이는 올해 만 50세로 그의 죽음은 너무도 때 이르다. 평소 나는 만 60세에 생을 마친 임종국 선생을 두고 늘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고 탄식하곤 했다. 그런데 그는 이보다도 열 살이 적은 나이에 생을 마쳤으니 그 아쉬움은 말해 무엇할까. 옛 어른들 말씀이 간밤에 폭풍우가 몰아치면 생감, 홍시 할 것 없이 다 떨어진다더니 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모양이다.

하루 지난 13일 저녁 9시가 넘어서 빈소를 찾았다. 일요일 늦은 시각이어서인지 조문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방명록에 이름 석 자를 꾹꾹 눌러서 적은 후 조의금을 전달하고 빈소로 들어섰다. 빈소에서는 나보다도 열 살 이상은 많아 보이는 어른 세 분이 조문을 받고 있었다.

고인의 영정을 보니 예의 낯익은 그 모습이 불현듯 스쳐 갔다. 흰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친 후 재배하고 상주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모두 고인의 형님들이라고 했는데 맏형은 고인과 23세 차이라고 했다. 막냇동생의 빈소를 지키는 형님들의 심경을 생각하니 잠시 울컥했다. 나는 세 형님들의 손을 차례로 잡고선 위로의 말씀을 건넸는데 그게 그분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됐겠는가.

'물뚝심송' 박성호 님의 빈소

조문을 마치고 접객실로 들어섰다. 그리 크지 않은 방이었는데 조문객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구석뙈기에 자리를 잡고 앉자 고인의 부인이 인사를 왔다. 저녁 식사를 한 후여서 식사 대신 음료수 한 잔을 청했다. 고인과 동갑내기라는 부인은 고인의 마지막에 대해 간단히 들려주었다. 다행스런 것은 요즘은 좋은 약이 많아서 마지막 가는 길이 그리 고통스럽진 않았다고 한다.

부인과는 초면이지만 조문객이 더 이상은 오지 않아서 잠시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주어졌다. 엔지니어 출신의 고인은 처음에는 이런저런 사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 실패해 낙담하고 있던 차에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삶을 열게 됐다고 한다. 개인 블로그와 딴지일보에 처음에는 주로 분석적인 글을 썼으나 점차 인간의 본질문제에 천착하는 글을 쓰면서 많은 분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것 같다고 했다.

고인을 생각하면 ‘물뚝심송’이라는 그의 닉네임이 먼저 떠오른다. 사자성어도 아닌 것이, 그러면서도 뭔가 왠지 고상한 뜻이 담겨 있어 보인다. 그런데 알고 보면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헛웃음이 절로 나고 말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물뚝심송’의 자세한 유래는 고인이 자필로 쓴, 아래 링크를 열어서 확인해보기 바란다.

- ‘물뚝심송’ 닉의 유래

'물뚝심송' 닉네님의 유래가 된 만화의 한 장면

고인은 평소 ‘물뚝심송’이라는 닉네임처럼 소탈하고 가식 없이 살다가 생을 마쳤다. 그래서 그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 부인에 따르면 고인은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별다른 수입 없이 원고료, 강연료로 버텼다고 한다. 물론, 부인도 수입이 있긴 했지만 여유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평소 글쓰기와 팟캐스트 방송을 천직으로 여기며 즐겁고 살았는데 부인 역시 그의 이런 삶을 좋아했던 것 같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12일부터 지인들의 조문이 줄을 이었다. 또, 일산병원 장례식장 홈페이지에 마련된 사이버 조문에도 끝없는 글이 이어졌다. 고인의 글과 말, 열정에 감동받아 그를 흠모해온 낯선 이들의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 가운데 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태훈)

고3때부터 물뚝님 글을 읽어온 스물일곱살 청년입니다. 그알싫(그것이 알기 싫다)에도 나오셔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목소리도 좋으시구나 했는데 방금 부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직접 뵈었던 적은 없지만 물뚝님 글을 읽으며 정이 들었나봅니다. 내일이 발인이라는 소식에 직접 조문하고 싶었지만 사는 곳이 지방이라 그것도 여의치 못해 이렇게나마 글을 남깁니다. 근거 없는 낙관이 역사를 움직인다 라고 하셨지요? 남은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지켜봐주세요. 저를 모르시겠지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최동걸)

해외 살면서 그간 고인의 글과 방송을 통해 많은 위안과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언제 한국 가면 한번 찾아뵙고 싶던 분이었는데 이렇게 타계하시다니 황망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소서.

(마여사)

글로만 뵈던 분이라도, 마치 지인이 간 거 같은 상실감이 드는군요.

눈팅만 하던 인간이었는데, 차마 마지막 길엔 고마웠다 한줄 남겨야겠기에...

아까운 필력 어느 우주에선가 마저 펼치시길..Rest in peace.

생전의 물뚝심송 님

(어느 페친)

좋은 글, 좋은 말씀, 감사하단 말씀도 못 드렸습니다.

가시는 날까지 도움도 못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그곳에서 아프지 않으시고, 좋아하시는 과학과 함께하시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시길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이미)

뜻밖의 비보에 깜짝 놀랐습니다. 많은 질문을 던져주신 내 마음속의 스승이었습니다. 애통합니다. 시니컬한 논평, 싱거운 농담, 진지한 고민 ... 모두 그리울 것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도경)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는

말씀 듣고

엄혹하고 절망적인 나날들 힘내서 보내고

이제 좋은 나날들만 남았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잘 지내왔습니다

잘 지내십시오

진심으로 애도하고

고통없는 곳에서 평안하시길...

(독고탁)

무심히 듣는 빗소리마냥 허탈한 마음에 가슴 저밉니다. 치열했던 시절을 관통하며 많은 주제로 각을 세우고 때론 허허로이 웃으며 지내왔던 시간들이 추억처럼 스쳐갑니다.

많은 대화와 나눔에도 불구하고 딱 한번 1박2일의 모임에 함께 했던 물뚝심송님의 그 넉넉하고 사람좋은 웃음소리가 귓전에 맴도는 듯 합니다. 많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부디 고통없는 곳에서 영면하소서…

고인은 변변한 감투 하나 얻어 쓰지 못한 채 무관(無冠)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은 어느 고관대작의 화려한 장례식도 부럽지 않았다. 국내외 지인, 독자들의 애도와 그의 지나온 삶에 대한 찬사가 줄을 이었다. 비록 그와의 인연은 두텁지 않았지만 그의 삶을 몇 자라도 기록해 두는 것이 도리 같아 여기 두서없이 몇 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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