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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목숨 모두 걸고 항일투쟁 나선 이시영 선생

  • 입력 2018.04.17 17:52
  • 수정 2018.06.05 16:28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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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재 이시영 선생의 유해는 서울 정릉에 안장됐다가 1964년 수유리 국립 4·19묘지 뒷산의 순국선열묘역에 이장됐다.

1953년 오늘, 성재 이시영 선생 돌아가다

1953년 4월 17일 이태 전 이승만의 전횡에 항의하며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은퇴한 성재(省齋) 이시영(1868~1953) 선생이 부산 동래의 임시 거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그는 “완전 통일의 그 날을 못 보고 눈감으니 통한스럽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시영은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인 이유승의 6형제 가운데 다섯째 아들이다. 8대에 걸쳐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던 이 집안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3만 섬의 재산(현재 시가로 6백억 원)을 처분한 뒤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이시영

이들은 전 재산을 처분한 거액의 자금을 물론, 자신들의 목숨까지 독립운동과 조국의 제단에 바쳤다. 6형제는 그 많던 재산을 소진한 뒤 참혹한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독립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들은 위기의 조국에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함으로써 지도층으로서의 명예와 도덕적 의무를 다한 것이었다.

1932년 이회영은 예순여섯의 나이로 일경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다 순국했고, 맏이 건영, 둘째 석영, 셋째 철영은 모두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막내 호영은 실종됐다. 성재의 가족사에서 드러나는 비극은 나라가 망한 뒤 일제에 부역해 자신들의 권세를 보전한 뭇 기득권 세력의 파렴치를 고스란히 반증한다. 결국, 중국으로 망명한 6형제 가운데 살아서 광복을 맞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는 이시영뿐이었다.

이시영의 본관은 경주, 호는 성재다.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영의정 김홍집의 딸을 첫 부인으로 맞을 만큼 당대의 손꼽히는 기득권이었다.

1885년에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 교리·승정원 부승지·궁내부 수석 참의 등을 역임했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 중형 이회영, 이상설 등과 근대학문 탐구에 몰두했다.

1905년 외부(外部) 교섭국장에 임명됐으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사직했다. 1906년 다시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된 뒤에 중추원 칙임의관(1907),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 판사(1908) 등을 지냈다. 서른여덟에 관찰사, 요즘으로 치면 도백(道伯, 도지사)을 지냈으니 출세가도를 달린 셈이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안창호·전덕기·이동녕·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했다. 경술국치(1910)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따라 6형제는 가산을 정리하고 1910년 말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식솔과 함께 망명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시영 6형제

1911년 4월, 이시영은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열어 교육진흥과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 설립을 주도했다. 1912년에는 통화현 합니하에 토지를 사들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확대 개편했다.

3만 섬 가산 처분하고 집단 망명

신흥무관학교는 알려진 대로 1910년대 서간도 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었다.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 항일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양성한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 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북경에서 이동녕·조성환·이광·이회영 등과 국내 3·1운동에 호응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 무렵 여운형, 현순과 논의해 이회영·이동녕·이광 등과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초대 법무총장에 선임됐다. 같은 해 9월 재무총장을 거쳐 1926년 무렵까지 그는 임정 국무위원으로 있었다.

▲ 자싱 피난 시기의 임시정부 요인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성재 이시영이다.

1921년부터 임정은 임정의 존폐를 놓고 고수(固守)파와, 창조파,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했을 때 성재는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정 고수파의 입장에 섰다. 임정이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성재는 1922년 10월 김구, 이유필, 여운형 등과 독립전쟁 준비 방략을 추진한 한국노병회(勞兵會) 결성에 참여했다.

1931년 4월 윤봉길 의거 뒤, 일제의 압박이 심해진 임정 최고의 시련기에 그는 항저우(抗州)로 가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했다. 1933년 중엽 자싱(嘉興)에서는 김구·이동녕·송병조·차리석·조완구·김붕준 등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됐다.

김구 등과 함께 임정을 지키다

1935년 10월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정 지원정당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해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겨간 후에도 임정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까지 임시정부를 전시체제로 바꿔 나가는 데 힘을 쏟았다.

▲ 한국독립당 환국기념 사진(충칭 임시정부 청사, 1945.11.03.)

▲ 임시정부 요인 환국기념 사진. 성재는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경교장, 1945.12.07.)

1945년 11월, 성재는 임정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했다. 1946년 봄 성균관 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에 선출됐고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해 원로원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해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을 계승하고 인재를 양성하려고 했다.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으로 발전시켜 1·2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 학교는 오늘의 경희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임정 요인이 단독정부 수립과 단정 반대론으로 대립할 때 그는 이승만, 지청천, 이범석 등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했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김구, 김규식과는 달리 그는 남한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고 나서 우리 손으로 국가의 장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며 국민에게 총선거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1947년 9월, 성재는 공직 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정 국무위원직을 사퇴했다. 혼란과 대립 속에서 정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자 이에 회의를 느껴 일체의 공직과 절연하고 신흥대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전념한 것이었다.

부통령 사임으로 이승만 전횡에 반대

그러나 한 해 뒤인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는 국민방위군 사건(1951)을 지켜보면서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해 1951년 5월, 전시수도 부산에서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국정 혼란과 사회 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 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를 떠났다.

1952년 8월에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야당인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활동이 됐다. 1953년 4월, 감기와 가벼운 부상 등으로 병석에 누웠다가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성재의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됐다. 그의 유해는 서울 정릉에 안장됐다가 1964년 수유리 국립 4·19묘지 뒷산의 순국선열묘역에 이장됐다.

▲ 서울 남산공원 백범광장에 1986년에 세워진 성재 이시영의 동상

성재의 죽음으로 이유승의 6형제 시대는 막을 내렸다. 막대한 가산은 물론 목숨마저 조국의 독립에 바친 이시영 일가는 모두 10명이 독립 유공 서훈을 받았다. 그 자신(1949년 대한민국장)은 물론 맏형 건영(1999년 애족장), 둘째 석영(1991년 애국장), 셋째 철영(1991년 애국장), 넷째 회영(1962년 독립장) 에 이어 막내인 호영(2012 애족장)까지 서훈을 받은 것이다.

건영의 장남 규룡(1990년 애국장), 회영의 장남 규학(1990년 애족장)과 2남 규창(1969년 독립장)에 이어 성재의 장남 규창(2008년 건국포장)까지 서훈을 받았으니 이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완성된 셈이다.

이승만은 이시영 일가가 살던 집 주변인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 13번지 주변의 땅 2만 평을 그에게 주려 했지만 성재는 이를 거절했다. 거절 이유는 “내 집 찾으려 만주를 돌며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성재에게는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됐다. 1986년 4월, 남산공원 백범광장에 성재의 동상이 건립됐다. 성재의 저서로는 항저우 시절에 쓴,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한 <감시만어(感時漫語)>(1934)가 있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국가보훈처, 4월의 독립운동가 이시영

- 경향신문, “우당 이회영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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