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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미러링한 ‘79년생 정대현’의 문제

  • 입력 2018.03.22 15:11
  • 수정 2018.06.05 16:44
  • 기자명 BeG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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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페이스북 페이지 서울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글 “79년생 정대현(82년생 김지영의 남편)”과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 (아래는 21일 페이스북 페이지 서울대학교 대나무숲에 제보된 “79년생 정대현본문. 본문 속 남성 차별의 사례가 진실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이 기사에 붙이지는 않는다.)

본문에 온정적인 반응을 보인 (주로 남성) 독자들의 독해와 달리, 이 글은 실제로는 '남자다움'이란 이름으로 가해진 차별과 폭력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예컨대 이 글은 남성집단 사이의 폭력성이나 위계 문제나, 남자다움을 사회적, 신체적 자아에 각인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상흔에 대해선 다루지 않는다. 그렇게 형성된 남성적 인격이 다시 자신보다 약하고 낮은 위치에 놓인 이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초래하는 결과 또한 다루지 않는다.

'한국 남성'이란 범주에 결부되는 진정한 문제들을 이 글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 냉정히 말해 이 글은 한국 남성이 겪는 차별과 고통을 본격적으로 조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볼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차라리 20세기 초중반에 나온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나, 영화 <한공주>의 짧지만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강렬한 몇몇 장면을 보는 쪽이 근대의 '남자다움'이 어떻게 남성들에게조차 고통과 폭력의 경험을 강요하는지 이해하는 데엔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단지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조롱하고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한국 남성이기 때문에 겪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자기만의 방>(ⓒ민음사)과 영화 <한공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말해주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글을 보고 필자가 "남자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과 피해"를 보여준다고 드는 예시들이 실제로는 철저히 '여성=부당한 가해자' '남성=억울한 피해자'의 서사를 만드는 데 복무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이 글의 모든 사례들은 남성 간 경쟁, 위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전혀 다루지 않으며, 그 대신 남성 대 여성이라는 경쟁 구도를 설정하고 어떻게 여성이 남성의 '정당한' 권익을 부당하게 침해하고 또 거기에 기생하는지를 그리는 데만 집중한다

이 중에는 군 복무, 군 가산점 같은 오래된 클리셰 못지않게 강간 무고, 임산부 배려석과 같은 최근의 클리셰들이 덧붙여져 있다.

필자와 동조자들의 상상 속에서 여성은 남성의 (비열한) 적이고, 남성은 자신을 옥죄는 갖가지 규범과 차별의 거미줄에 걸린, 혹은 좀 더 직설적으로 여성들이 만든 세계의 피해자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비록 말미에 필자가 약간의 거리 두기를 시도하긴 하지만, 단어 그대로의 의미에서 여성혐오 텍스트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책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나는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첫째, 글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알 수 있듯 필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최근의 여성주의 운동의 '미러링'으로 만들고자 했다.

미투 운동은 대표적인 여성주의, 성평등 운동

이는 필자가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최근의 여성주의, 성평등 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가 상상하는 여성주의, 성평등 운동은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만을 응집시키고, 그에 반해 [남성] [여성]의 희생으로 편익만 누리는 존재"라는 식의 내러티브를 유포하는 사회불화조장운동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때로 그런 지나치게 단순화된 구도를 믿고 발화하는 페미니스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 만연해있던 성폭력을 들추어내는 최근의 작업(미투 운동 등)을 포함해 지난 수십, 수백 년에 걸쳐 활동해온 여성주의자들의 다양한 노력에서 오직 그러한 내러티브만 읽어내는 건 명백히 악의적이다.

솔직히 나는 필자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여성주의 운동을 이런 식으로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사고는 여성주의 혐오, 즉 안티 페미니즘적인 면모를 매우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안티 페미스트들이 오해하는 페미니즘의 모습을 풍자한 그림 ⓒSNS 갈무리

둘째, 조금 더 흥미로운 점은 필자, 그리고 필자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한국의 수많은 (잠재적) 안티 페미니스트들의 사고가 놀라울 정도로 '여성'이라는 항목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9년생 정대현"의 일생이 한결같이 여성들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혼당한 뒤에는 물론 심지어 죽은 뒤에도 "79년생 정대현" 씨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이 '여성들이 어떻게 남성을 대하는가'에 맞춰진 점은 경이롭다.

통상적으로 피해자 여성을 강조하는 통속적인 여성주의적 서사가 (때로는 과도할 정도로) 여성 자신의 삶과 경험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이 남자의 일생은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가장 비난하는 대상인 한국 여성들에, 여성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원하는지에 종속되어 있다. 여성, 그리고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빼버리면 도대체 "정대현"의 삶에서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약간 악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79년생 정대현"의 의식구조를 이렇게 도식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는 싫고, 여성은 필요하다. 물론 그의 의식은 자신이 원하는 여성과 공존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주의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협소하다.

그러나 정대현 씨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사실이, 서구 근대를 향해 줄기차게 달음질해온 2010년대 한국사회의 조건이라는 점에서 "79년생 정대현"의 운명은 <Q정전>의 아Q만큼이나 비극적이다. 페미니즘이 싫은가? 정대현 씨의 유일한 대안은, 유감스럽게도, 전근대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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