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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드디어 육아휴직을 냈다

  • 입력 2018.03.21 10:24
  • 수정 2018.06.05 16:45
  • 기자명 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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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벼랑 끝에서 싸우고 난 후

남편은 일주일에 두 번은 가족과 같이 저녁 시간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한 달이 채 못 갔다. 프로젝트 막바지로 가며 새벽 퇴근, 주말 출근, 출장이 이어졌고 둘 다 너덜너덜해졌다. 그래도 버틸 수 있던 유일한 이유는 남편이 '휴직'을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찾은 답이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다시 방향 설정할 기회를 가지겠다고 했다. 난 조건을 하나 달았다. '육아휴직'이면 좋겠다. 일반 무급 휴직에 비해 수당이 나와서만은 아니었고 육아휴직의 가치 때문이었다. 일벌레로 사느라 가족과 멀어진 다른 동료들이 남편의 휴직에 영향받길 바랐다.

남편은 휴직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실행하려니 불안해했다. 회사에 찍힐 테고, 낙오자가 될 테고, 복직 못 하면 나도 같이 책임분담을 각오하라 했다. 툭하면 "휴직하기로 했잖아! (뭐가 더 불만인데)"가 입버릇처럼 나왔다. 자신을 위한 선택을 지우고 오로지 가족 때문에 ‘억지로’ 하는 듯한 방어적인 태도로 변해갔다.

남편 직장에선 남직원은 물론이고 여직원도 육아휴직을 낸 사례가 없다고 한다. 남직원이 95% 이상이고 출산한 기혼 여성도 매우 적지만, 연차 내기조차 어려운 회사이다. 이런 상황인데 무려 '육아휴직‘이라니. 게다가 그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자처해 가는 사람이 아니다. '돌다리라도 두들겨 보고 웬만하면 건너지 말자'가 기본 삶의 태도다.

아예 직장을 그만두는 것만큼이나 육아 휴직은 어려운 일이었다. ⓒtvN '택시'

남편에게 '육아휴직'은 엄청나게 대단하고 어렵고 용기 있는 결정이자, 최선에 98%쯤 가까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주저앉을까 걱정이어서 매일매일 물었다. "회사에 말했어?" 대답은 늘 같았다. "기다려봐" 자기를 믿지 못한다고 서운해했지만, 10년을 함께 한 우리는 딱 그만큼에 서 있었다. 나는 남편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남편은 나에게 질렸다. 남편이 휴직을 결정하기까지 반년, 회사에 말하기까지 한 달, 휴직 일자를 정하기까지 다시 한 달이 걸렸다. 나와 남편의 속도는 달랐다.

회사에선 의외로 쉽게 휴직을 받아주었다. 여차하면 나를 팔라고 했지만 남편은 조금씩 꾸준히 회사에 사정을 설명한 모양이었다. 또 팀원들이 돌아가며 두세 달씩 병가를 냈고, 누구 하나 과로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속에 집집마다 가정 파탄 일보 직전이었으니. 13년 차 경력자가 건강이나 가족 문제로 업무에 타격받거나 이직해버리는 건 회사 입장에선 막심한 손해. 프로젝트 공백기에 휴직하고 재충전해서 복귀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는지, 남편은 휴직을 낼 수 있었다.

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 프로젝트 들어가기 전까지 딱 두 달. 이렇게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2. 육아 휴직의 쟁점

남편이 육아휴직을 내겠다고 하자 의외의 곳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수적인 친정아버지는 왜 아이 아빠가 '희생'해야 하냐고 펄쩍 뛰셨다. 너 조금 편하자고 남편 인생 망칠 거냐며, 복직 못 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하셨다. 이미 상사와 다 합의된 부분이고 기간도 길지 않다고 간신히 안심시켜 드렸다. 남편은 본가엔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다.

두 번째, 주변 사람들이 남편의 '밥'을 걱정했다. 남편이 집에 있으면 세끼를 차려줘야 할 텐데 할 수 있느냐 또는 남편이 세끼를 잘 챙겨 먹을지 염려해줬다. 미리 실토하건대 휴직 기간 내내 나는 남편에게 밥을 차려주지 않았다. 남편이 잘 먹는지 못 먹는지 확인도 안 했다. 나는 오전에 나가서 저녁에 집에 들어가곤 했는데 애를 굶기지는 않는 거 같았다. 마흔이 다 된 성인인 그가 설마 자기 밥그릇 하나 못 챙겨 먹을까 싶고, 내가 그걸 그렇게 신경 쓸 일인가 싶은 거다. 밥보다 주전부리로 때울 가능성이 높겠지만, 잔소리하기 싫었다.

세 번째는 돈이었다. 모아둔 돈에서 까먹어야 했다. 정확히 육아 휴직은 한 달이다. 나머지 한 달은 작년부터 쌓인 연차를 소진했다. 월급쟁이에겐 한 달 봉급도 타격이 크다. 그래도 할 수 있던 이유는 서울과 가까웠던 신도시 라이프를 포기하고 경기도 변두리로 이사 온 덕에 무리한 대출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보험료도 얼마 되지 않는 등, 고정지출이 적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휴직을 감행할 수 있었지 우리가 월급 외 수익이 있다거나 생활비 몇십만 원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짠순, 짠돌이라 가능한 건 아니다. 당장 금전적 손해를 보더라도 남편의 육아휴직이 월급 이상의 가치를 가질 거라 (매일 세뇌하며) 믿었다.

3. 복수는 나의 것

ⓒSBS '동상이몽2 너는 내운명'

나는 벼르고 있었다. 휴직만 해봐라. 독박 육아 삼 년 설움, 똑같이 갚아줄 테다.

아침에 강제 기상하고, 감은 눈으로 주방에 출근하고, 막막함으로 아침을 차려내고, 안 먹겠다는 애 꼬시고, 비타민이나 젤리로 협상하고, 몇 수저 떠먹이고, 도망치는 아이 잡아 머리 빗겨 옷 입혀 신발 신겨 어린이집 보내고, 늦잠 자서 늦으면 선생님에게 연락하고, 차로 데려다주고.

이부자리에 묻은 머리카락 떼고, 볕 좋으면 이불 말리고, 세탁하고, 청소기 돌리고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다 되면 널고, 마른 건 개고, 다시 서랍을 찾아 넣고, 남은 찬밥 데워 점심 때우고, 장 볼 것 확인하고, 가계부 쓰고, 주말 가족 모임 장소 찾고, 분리수거를 하고, 봉투 묶어 문밖에 내놓고, 멍 때리고, 간식으로 빵 데우고, 무를 썰고, 콩나물을 다듬고, 아이 오면 간식 입에 넣어 주고, 놀이터와 동네를 돌고, 집에 오면, 도망 다니는 애 붙잡아 손 씻기고, 보챔과 짜증을 감당하고, 다시 타일러 저녁 먹이고, 설거지하고, 술래잡기하고, 색칠 놀이하고, 양치하러 30분 동안 쫓아다니고, 동영상을 두 개 더 보여 달라는 걸 안 된다고 울리고, 피곤하고 졸리면서도 안 자려고 버티는 애를 이부자리까지 데려가고.

ⓒ영화 <아기와 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책 읽기와 용변 처리와 물 마시기와 옷 갈아 입히기와...... 10초마다 쏟아지는 모든 것 말이다. 이왕 육아 휴직한 거 풀코스로 겪어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에잇. 어린이집 안 다닐 때 휴직했어야 하는 건데.

'독박 육아'를 고스란히 겪게 하는 건 어려웠다. 육아휴직을 시작하고 며칠간, 남편이 못 미더웠던 나는 집 밖으로 나설 수 없었다. 아이는 엄마가 시야에 잡히는 한 껌딱지로 돌변해 잠들 때까지 붙어 있었고, 그 와중에도 나는 집안일이 눈에 밟혀 방바닥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 남편은 그렇게 모른 척을 잘하던데 나는 그게 되지 않았다. 내가 집에 있는 한 집안일도 육아도 내 몸에 달라붙었다.

방법은 하나. 아침 일찍 나와 늦게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남편 휴직에 맞춰 내게도 돈을 조금 벌 수 있는 일감이 들어왔고 매일 카페나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그동안 하지 못한 책 읽기 모임도 다시 시작했다. 세 식구가 이렇게 복작복작 보낼 날이 앞으로 또 있을까 싶으면서도, 오붓한 가족의 초상보다 나의 자유가 절실했고, 시간 구애 없이 일하고 글 쓰고 싶었다. 지금 아니면 앞으로 20년간 못할 수 있었다. 나는 굳게 마음먹고, 일주일에 두 번은 늦게 들어갔다.

그렇게 남편은 엄마이자 주부이자.... 그리고 아내가 되었다. 우리의 역할놀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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