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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노무현 떠올리게 한 3차 남북정상회담 합의

  • 입력 2018.03.07 12:05
  • 수정 2018.06.05 16:52
  • 기자명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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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북 특사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만나 악수하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청와대

오는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습니다.

대북특사단으로 북한에 다녀온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아래와 같은 사항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1. 4월 말 남쪽 지역 판문점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2. 군사적 긴장 완화와 긴밀한 협의를 위해 정상 간 핫라인 설치

3. 제3차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첫 통화

4. 대화를 지속하는 동안 북한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중지

5. 핵무기·재래식 무기 남측 향해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

6. 비핵화 및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대화하기로 합의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에 따르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는 점에 변함이 없다”라며 “남북대화의 상대로서 진지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번에 판문점에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 분단 이후 세 번째로 남북 정상이 만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 그 과정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역대 세 번째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

역대 정부는 모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북측 인사의 사망, 국내외 정치 상황의 변화 등 갖가지 변수 등으로 쉽게 열리지 못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각 정부의 노력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역대 정부 모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려고 노력했다.

1. 박정희 정부

박정희 정부 때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1972년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은 남북정상회담을 할 용의가 있다고 내비쳤지만, 박정희는 이득이 없다면서 외면했습니다.

2. 전두환 정부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이 있었지만, 전두환은 수해 구호물자를 주고받으면서 비밀리에 남북정상회담까지도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무장간첩선이 침투하다가 격침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두환은 남북정상회담을 더는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3. 노태우 정부

남북정상회담이 본격적으로 논의됐습니다. 추진된 시기는 1988년입니다. 당시 노태우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을 통해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습니다. 김일성은 노태우의 제안을 응하겠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군부와 보수세력, 중국 등의 여러 가지 외부 요인 등에 의해 무산됐습니다.

4. 김영삼 정부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노력은 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라는 합의를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회담이 열리기 전인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정상회담은 연기됐고 이후 흐지부지됐습니다.

5. 이명박 정부

2009년부터 이명박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임태희,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등을 싱가포르와 베이징에 보내 북측 인사와 만났습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은 추진되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 측 인사와의 회동을 폭로하면서 돈 봉투를 주면서 애걸복걸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6. 박근혜 정부

2015년 박근혜의 밀명을 받은 친박 인사가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접촉했습니다. 하지만 김양건은 그해 12월 교통사고로 사망해 이후 회담은 추진되지 못했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친박계는 출구 전략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결렬됐습니다.

각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정상회담은 쉬이 열리지 못했습니다. 국제 정세에 민감한 반도 국가라는 특성은 남북 평화를 향한 행보조차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분단 반세기 만에 열린 1차 남북정상회담

▲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김정일 위원장과 인사를 나누는 김대중 대통령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6월 13일에 이뤄졌습니다. 서울에서 특별기를 타고 평양 순안공항으로 이동한 김대중 대통령은 영접 나온 김정일 위원장을 발견하곤 포옹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외신도 이 역사적인 사건을 앞다퉈 보도했습니다.

두 정상의 만남으로 이산가족의 상봉과 금강산 관광, 스포츠 교류 등이 활발하게 진행됐습니다. 또한, 장관급 대화와 같은 정치적 대화가 정기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 평화를 위한 노력은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7년 후 다시 열린 2차 남북정상회담

▲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로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은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은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록됩니다. 외신들은 이 장면을 대서특필로 보도했습니다. 분단의 역사가 끝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10월 4일 오후 1시에 ‘남북정상선언문’을 발표합니다. 선언문에는 양국이 군사적 적대관계를 끝내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 남북은 ‘종전선언’ 합의를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휴전 상태인 한반도에서 ‘종전 선언’의 의미는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선 비핵화 후 종전 선언 가능’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통일을 향한 양국의 기세가 누그러졌습니다.

오는 4월에 열린 3차 남북정상회담

어떻게 보면 이번 3차 남북정상회담은 지난 정부들이 추진한 남북 평화에 대한 노력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최초로 김정일과 만나 남북정상회담의 기초를 닦아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6.15선언’을 바탕으로 ‘10.4 평화선언’을 만들어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어떤 성과를 거둘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얼어붙었던 남북 관계가 개선된 것만으로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는 남달라 보입니다. 지금 세계는 남북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1차, 2차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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