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위안부’ 문제를 보수·진보의 문제로 나눌 수 있을까?

  • 입력 2018.03.05 15:57
  • 수정 2018.06.05 16:52
  • 기자명 낮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구미 평화의 소녀상은 경북에서 군위, 포항, 상주, 안동, 경산, 영천에 이은 일곱 번째 소녀상이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평화의 소녀상을 안고 손가락 하트를 만들고 있다.

구미에서도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경북에서 다섯 번째인 줄 알았더니 지난해에 경산(대구대 교정)과 영천(시립도서관)에 소녀상이 세워져 일곱 번째가 되었다는 걸 어제서야 알았다. 대체로 이들 도시의 소녀상은 민간 주도로 세워졌다. (관련 기사: ‘보수의 심장’ 구미에 세워진 특별한 소녀상)

누가 뭐래도 구미는 '보수의 고장’

내가 쓴 소녀상 기사에 오마이뉴스 편집부는 “’보수의 심장’ 구미에 세워진 특별한 소녀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에 어떤 독자는 구미가 왜 ‘보수의 심장’이냐는 항의성 댓글을 달았지만 심장까지는 몰라도 구미가 보수의 고장이라는 걸 결코 부정하지 못한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경북 도시 중 두 번째 규모인 구미에 뒤늦게 소녀상이 세워진 것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박정희에 대한 숭앙이 그 딸에 대한 압도적 지지로 이어진 지역의 정서와 정치적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소녀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힘입은 것이다.

만약 박근혜의 권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면 소극적이긴 했지만 시의 협조가 가능했을 것인가. 임기 동안 박정희 마케팅으로 지새운 시장이 사퇴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지방선거를 앞둔 시기가 아니었다면 소녀상 세우기가 이렇게 순조로울 수 있었겠느냐 말이다.

특정 정서와 정치적 태도는 때론 상식과 인간의 본원적 감정마저 왜곡해 버린다.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지역의 정서와 정치적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며 심지어 적대적 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생떼 같은 아이들의 기막힌 희생을 바라보면서 거기 슬픔과 분노를 보태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지역 정서는 분명 결을 달리하고 있었다.

특별히 영남의, 대구 경북 사람들만 측은지심이 남달라 300명이 넘는 인명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에 무심할 리는 없다. 그들도 이 유례 없는 비극에 함께 눈물 흘렸고 채 피지 못하고 진 꽃다운 아이들의 희생에 대해서도 연민의 감정을 가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참사나 진상 규명, 추모 등에 대한 지역의 정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물론, 이른바 ‘시체 팔이’니 ‘특혜 요구하는 세금 도둑’이라고 비난하는 형식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유족에 대한 배상이나 진상 규명 따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뜨악하고 심지어 그 공정성을 의심하기까지 한다.

세월호 문제에 대한 이들의 혼란스러운 태도를 결정지은 것은 자신이 지지하던 정치 지도자, 박근혜가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권력에 따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수세에 몰린, 영웅의 후계자에게 기운 감정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이입되었을 터였다.

감정마저 왜곡하는 특정 정서와 정치적 태도

소녀상에 대한 감정도 엇갈렸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만행과 범죄행위에 대한 분노라는 공통적 민족 감정이 지역 사람들에게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이 역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라는 패착의 당사자가 박근혜였으니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방어심리가 문제에 대한 성찰을 막았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라와 겨레를 절대빈곤에서 구해낸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도 일본 육사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친일 인사라는 사실도 얼마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숭배하는 지도자의 처지를 자신의 그것으로 여기는 방어기제도 문제를 냉정하게 인식하는 걸 방해했을지 모른다.

소정의 후원금을 내긴 했지만 나는 구미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구미참여연대와 YMCA가 몇몇 시민단체와 함께 꾸려나가는 활동의 추이만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나는 구미시에서 소녀상 건립 장소에 딴지를 걸지는 않을까 염려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미역, 금오산 도립공원, 구미시청 등 후보지 가운데 구미역 뒤쪽 소공원이 최종 낙점되었을 때도 나는 반신반의했다. 국정농단으로 전 정부가 해소되고 새 정부가 들어선 이래 이미 명분은 시민사회 쪽에 있었지 지역의 보수 기득권 세력에게 있지 않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시장은 박정희 우상화 정책으로 일관해 온 구여당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 구미역사 뒤쪽 소공원에 평화의 소녀상 건립 운동에 참여한 학생과 시민 300여 명이 모였다.

▲ 구미시니어클럽 회원들은 ‘꽃반지 끼고’와 ‘사노라면’을 합창으로 들려줬다.

▲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열네 살 혜경이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께 드리는 편지를 읽고 있다.

제막식 당일 나는 30분쯤 미리 현장에 갔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물론, 몇 달 동안 이뤄진 모금과정에 참여한 이들이 중심이었겠지만, 그들의 면면이 나는 궁금했다.

제막식에 보수적 시민과 단체는 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수은주가 곤두박질하면서 바람이 찼다. 입성을 어설프게 해 온 이는 이날 된통 추위에 떨었을 것이다. 그래도 300명 남짓한 참가자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제막식은 주어진 식순을 따라 순조롭게 진행됐다.

경찰서의 시민사회단체 담당 형사까지 참석해서 제막식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나는 정작 시청에서 나왔음 직한 관리들의 모습이나 관변단체의 간부 같은 이는 찾을 수 없었다. 눈에 띄는 정치인들은 주로 민주당이나 정의당 등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 예정자들이었다.

나는 추진위 관계자에게 사퇴한 시장 말고 부시장이 나왔는가, 혹은 국장급 간부라도 오지 않았는가를 물어보았다.

“시에서요? 오지 않습니다. 어차피 저들은 난감한 처지지요. 시민단체에서 원하니 아주 소극적으로 협조해 주었지요. 그걸 거부할 만한 입장은 못 되고 그렇다고 해서 발 벗고 도울 형편도 아니니까요. 공단에 입주한 일본계 회사도 걸릴 거고요.”

그렇다. 짐작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게 어디 구미만의 문제일까. 안동이, 상주가, 포항이 모두 그랬을 것이다. 더구나 구미는 박근혜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친일파 박정희의 고향이 아니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이었던 이가 지난 4년 내내 박정희 우상화에 골몰한 동네이지 않았던가.

▲ 현일고 뮤지컬 동아리 ‘페르소나’가 일본군에 끌려갔다 돌아오는 소녀 이야기 <발자국>을 공연하고 있다.

▲ 구미 평화의 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인 나대활 구미 YMCA 사무총장이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 구미 평화의 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 공동대표인 참여연대 공동대표 전대환 목사가 기념사를 하고 있다.

다음날,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나대활 구미 YMCA 사무총장에게도 나는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시에서는 관련 부서의 실무자들이 확인 차 나온 게 다지요. 여기 오신 분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한 시민들이지요. 특히, 이번 모금과정에는 단체나 고액보다 개인, 소액 위주로 후원하신 분들이 참여해서 이루었다는 점에서 뜻깊지요.”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두고 일본 기업이 항의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고요. 자매결연한 일본의 지자체에서 사실을 조회하는 질의서가 왔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글쎄요. 초기부터 관변단체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봉사단체 같은 데서는 무리 없이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는 분들도 있지만 단체로 참여하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인사말을 하는 동안 사회를 맡은 두 고교생이 몸을 낮추어 경청하고 있다.

▲ 구미 평화의 소녀상 제막의 순간. 맨 먼저 ‘위안부’ 피해자이자 모델인 이용수 할머니가 소녀상 곁에 섰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소녀상의 꽃다발을 매만져 주고 있다.

▲ 모자와 목도리, 화환을 한아름 안은 소녀상

소녀상 건립을 위한 모금에는 45개 시민단체와 시민 1,100여 명이 참여하여 3,500여 만 원을 모았다고 한다. 구미시 인구를 40만이라도 쳐도 참여 시민은 0.3%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이 수치가 전체 시민들의 정서를 드러내는 지표로 볼 수는 없다.

모금 기간이 짧은 데다가 창구도 제한돼 있어서 많은 시민이 참여하지 못한 점도 있고 소녀상 건립 사실을 모르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지만 형식상으론 거의 대다수 구미시민은 이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미참여 시민이 죄다 소녀상 건립에 반대하거나 한일 ‘위안부’ 합의에 찬성한다고 볼 수 없고 참여하지 못했지만 대의에 동의하는 시민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소녀상 문제는 형식상으로 조그만 지방 도시의 시민들을 갈라버렸다. 그걸 단순한 찬반이나 진보·보수로 경계 지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위안부’ 문제를 보수·진보의 문제로 나눌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 문제를 정치적 입장의 문제로 파악하는 게 온당하지 않은 것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 역사의식이나 민족 감정으로 판단하는 게 진보·보수로 구분할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지역 정서는 단순한 민족 감정이나 인간적 감정마저도 뒤틀어버렸다.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선택과 태도가 자신의 기본적 정서를 억누른 것이다.

물론, 이 문제를 이런 단순한 잣대로만 분석하는 건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촛불집회를 지켜보면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토로하는 시민들, 태극기 집회에 달려가는 사람들, 현 정부를 친북좌파로 매도하는 데서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확인하는 사람들을 우리 밖의 국민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우리 자신의 부모나 형제일 수도 절친한 벗이나 이웃일 수도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좌우나 여야를 떠나 우리가 단일한 사안을 단일한 잣대로 바라볼 방안은 없는 것일까. 1907년 2월 경상북도 대구에서 시작됐던 국채보상운동처럼 말이다.

▲ 뮤지컬 <발자국>을 공연한 현일고 뮤지컬 동아리 '페르소나'의 여학생

▲ 소녀상 뒤에 나란히 선 구미 청소년 YMCA 연합회의 학생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 정치인들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야당이 거의 발을 붙일 수 없었던 시 의회를 노리거나 시장 선거에 나가려는 정치인들이 여당에도 줄을 서는 모양새다. 지역에선 오랫동안 찬밥 신세였던 여당이 집권당이 되면서 나타난 변화다.

6월 지방선거에서 구미는 변화를 선택할까

일단 그런 변화를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지난 대선을 계기로 익숙한 정당으로의 쏠림이 약화되는 실마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오직 지역 기반의 보수정당에 목을 매었던 지역민들의 선택이 변화와 개혁 없는 퇴행의 시간을 낳았다. 이제 사람들은 박근혜의 국정농단이 그 퇴행의 정점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나브로 깨닫고 있는 것일까.

석 달 후 지방선거의 결과로 드러날 변화의 모습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결과이든 그것이 이 지역과 우리 사회가 어떤 미래로 나아갈지를 가늠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