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JTBC가 팩트체크한 ‘한국 강간죄’의 문제

  • 입력 2018.03.02 17:37
  • 기자명 한예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간 범죄에 대한 법조계의 인식을 비판하는 전설 같은 일화가 하나 있다. 아래의 이야기다.

검사가 흔들리는 병 안에 볼펜을 꽂으려 하면서보세요. 이 흔들리는 병 안에 볼펜을 꽂을 수 있겠습니까? 피해자는 저항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하자, 변호사가 병을 깨트리고 병 입구에 볼펜을 꽂고서이게 강간입니다라고 말했다.

얼핏 검사의 비열한 논리를 변호사가 깨부수는 사이다 썰같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따로 있다. 바로 강간죄 성립의 기준에 대한 문제다. 병을 깨트릴 정도의 폭력적 수단이 (다시 말해 피해자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수단이) 동원되지 않았다면, 그건 강간이 아닌 걸까?

ⓒjtbc

222UN 여성인권차별위원회(CEDAW) 8차 국가보고서 심의 자리에서 루스 핼퍼린 카다리 CEDAW 부의장은 한국의 법 제도상 강간죄 성립 기준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한국의 강간죄는 그 기준이 엄격하여 강간 피해자가 오히려 2차 피해를 입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카다리 부의장에 따르면 한국의 법 제도는 국제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강간죄에 대한) 국제 기준은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간죄에 대한 한국의 법이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지 답변해 주십시오

지난 31 JTBC 뉴스는 자사 프로그램 [팩트체크]에서 카다리 부의장의 주장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의 강간죄가 유독 까다롭고, 국제 기준에 어긋난다고 비판한 카다리 부의장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을까?

한국 강간죄 기준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기자와 앵커 ⓒjtbc

팩트체크를 담당한 오대영 기자의 말에 따르면 카다리의 주장은 대체로 그렇게 볼 수 있다”, 즉 사실이 맞다. 오 기자는 UN 규약에 따르면 피해자가 동의를 했느냐 여부가 강간죄 성립의 중점이 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반대로 한국은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했는지를 스스로 입증해야한다. 강간죄 성립 요건이 동의가 아닌 폭력적 수단의 동원 여부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오 기자는 주요 국가들과 한국의 강간죄 성립 요건을 비교했다.

오 기자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 독일은 가해자의 폭행 또는 협박이 동반될 때강간죄가 성립하며, 영국은 폭행이나 협박이 전혀 없었더라도 (동의 여부에 따라) 강간죄가 성립했다.

ⓒjtbc

이렇게 보면 미국, 독일, 한국이 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기자는폭행과 협박을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 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독일의 경우 강간에 해당하는 폭행, 협박의 수준을 저항 곤란한 상태로 설정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피해자가 저항하기 현저히 불가능한 상태였는지 여부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두 기준의 차이에 대한 기자의 설명이다.

(1) '현저히 불능' '곤란한 상태'라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과 독일에서는 단호한 거절 의사를 밝힌 것만으로도 강간죄가 성립된 판례가 다수 있습니다

(2) “(한국에서는)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을 했느냐, 상황을 모면할 가능성이 있었느냐, 전혀 없었느냐를 가지고 피해자 스스로 입증해야 합니다. 가해자와 알던 사이였거나, 도움 요청이 없었다거나, 사건 직후에 곧바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면 불리해지는 구조입니다

과거엔 다른 주요국들도 강간죄 성립 요건이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오 기자는 미국과 독일 또한 처음부터 피해자 중심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지만, 1970년대 전후로 강간죄 개혁 운동이 일어나며 지금과 같은 기준으로 변화가 일어났음을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5년까지 정조에 관한 죄라는 항목이 형법에 존재했는데, 이때까지 성범죄는 여성의 정조, 순결 차원의 문제였다는 이야기다. 95정조에 관한 죄라는 표현이 강간과 추행의 죄로 표현이 바뀌며 성범죄를 바라보는 시각이 성적 자기결정권의 문제로 바뀌었지만, “법의 문구가 바뀌었을 뿐 실제 수사와 법원 판결은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김태경 우석대학교 교수는 성폭행의 기준이 동의 여부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SBS

강간죄를 바라보는 한국의 법 제도와 사회적 시선은 이미 국내 여성계에 의해서도 여러 번 지적 받아온 문제다. 가령 지난해 10월에 일어난 한샘 성폭력 사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피해자 주장의 사실 여부와 관련하여 피해자가 저항한 것이 맞느냐며 사건을 강간이라 볼 수 없다는 식의 논란이 일어났는데, 한국여성민우회는 이를 두고 동의 없는 섹스는 강간이라며 해당 논란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임을 지적했다. 한국의 강간죄 기준이 엄격하여 피해자의 2차 피해가 우려된다는 카다리 부의장의 말과도 부합하는 사례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