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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적 언론자유국' 대한민국

  • 입력 2014.05.08 10:51
  • 수정 2014.05.08 11:14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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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덤하우스의 언론자유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부분적 언론자유국'이다. ⓒ 프리덤하우스 누리집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프리덤하우스의 '2014년 언론자유 보고서' 관련 소식을 들으면서 진부하지만 토마스 제퍼슨의 일갈을 떠올리는 것은 그 본연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언론 현실 때문일 것이다.

'부분적 언론자유국' 대한민국

드디어 우리나라의 언론자유 세계 순위가 68위로 떨어졌다. 국제 언론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www.freedomhouse.org)가 발표한 '2014 언론자유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언론자유 지수 32점(점수가 낮을수록 자유도는 높다.)으로 세계 순위가 68위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는 2011년에 잃은 ‘언론자유국’ 지위를 되찾기는커녕 이번에도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의 언론자유가 보장되는, ‘부분적 언론자유국(Partry Free)’에 머문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전체 평가 대상 197개 국가 가운데 그래도 ‘상위 35%’ 안에 든다고 자위할 수도 있고, 미국(21점-30위)과 일본(25점-42위)에 비겨도 선방했다고 느낄 수도 있을지 모른다. 183위인 중국(84점)과 꼴찌인 북한(97점)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순위라고 허세를 부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언론자유와 관련한 현 정부에 대한 평가는 이미 올해 초 ‘낙제점을 받았다.’ ‘국경 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가 지난 2월 발표한 ‘2014년도 세계언론자유지수(Press Freedom Index)’에서 우리나라는 지난해 50위에서 57위로 떨어졌던 것이다.


국경 없는 기자회의 '언론자유지수'도 하락

우리나라는 노무현 정부 때 ‘언론자유국’의 지위를 누렸지만 이후 언론자유지수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평균 30위권을 유지했던 이 순위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하락하기 시작했다. 부임 첫 해 47위로, PD수첩 제작진을 체포했던 2009년에는 69위로 곤두박질쳤다. 현 정부 출범 이후(2013)에도 비슷한 추세여서 44위에서 50위로 떨어진 바 있다.

다른 나라와의 비교나 순위를 떠나서 ‘언론 자유’가 부분적으로만 보장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기나긴 군부독재시대에도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은 나라가 아닌가 말이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현재의 우리 언론 상황, 그 퇴행과 굴절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언론이 지켜야 할 기본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 언론의 현주소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우리 언론의 민낯 앞에서 언론 자유를 말하는 것조차 민망할 지경이다. 아직도 재난보도에 관한 준칙마저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오보와 받아쓰기 보도가 판을 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월호와 함께 언론도 침몰’했다는 지적이 언론계 내부에서 나온 것이나 기자들이 ‘기레기(기자+쓰레기)’라 불릴 정도로 불신의 대상이 된 이유도 자명하다. 사회의 중요 의제를 형성하고 공론의 장을 만들어가야 할 언론이 그 본연의 임무를 게을리 하거나 저버렸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영방송’이라는 ‘공중파’ 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이라고 이르기조차 꺼려지는 극우 종편들은 정권을 비호하고 그들에게 불리한 보도를 가급적 줄이는 데 매진한다. 거기다 대부분의 보수 신문들도 자신들의 당파적 이해에 충실하게 복무하면서 더 이상 정부나 권력의 실정(失政)이 공론의 대상이 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이 땅의 슬픈 '자기 검열'

대신 사람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서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고 현실적 모순과 문제를 고발하고 비판한다. 그러자 이런 상황에 맞추어 집권당에선 이를 규제하는 방안을 찾느라 부산하다. 최근 새누리당에서 발빠르게 국가적 재난 상황 때 인터넷이나 SNS 등에서 정부의 정책과 관련한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 때 벌어진 상황을 겨냥해 발의된 것으로 보이는 이 법안의 핵심은 “국가 사회적 위난이 발생하거나 그 가능성이 긴박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국가의 위난 관리를 방해하거나 위반 발생 여부와 원인, 정부의 정책 또는 위난과 관련된 사망·실종·상해 등의 피해에 관해 허위사실을 유통할 경우”다.

▲ 최근 언론의 공공성을 잃었다고 비판받고 있는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 ⓒ <미디어오늘>

이미 SNS에 세월호 참사에 대해 대통령을 비판한 글을 올린 교사가 징계 위기에 내몰렸다는 보도도 나왔다. “한 교사는 교육청에서 구두 주의를 받았고, 또 다른 교사는 정보과 형사가 직접 학교를 방문하는 등 교사를 대상으로 한 사찰 의혹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보기]

사람들은 “요즘 같은 세상엔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간 한 방에 훅 간다.”는 이야기가 공연한 노파심도, 기우도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권력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걸 의식하면서 발언하고 표현의 수위를 조절한다. 이른바 ‘자기 검열’이다.

김수영 시인의 '언론자유'

시인 김수영이 시 ‘김일성 만세’를 통해 언론의 자유 문제를 제기한 건 1960년이다. 4·19 혁명 후였지만 그의 이 시는 발표되지 못했다. ‘잠꼬대’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현대문학>에 기고했지만 회사에선 이를 반송한 것이다. 이 시가 빛을 본 것은 48년 만인 2008년, <창작과비평>을 통해서다.

시인은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라고 했지만 그걸 인정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50년이 넘었지만 지금인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오랜 군부독재 시대를 거쳐 오며 겪은 ‘검열’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선험적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말과 글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기시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고교생이 청와대 게시판에 글을 쓰면서 ‘목숨을 걸었다’고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인 것이다.

세월호 보도와 관련하여 드디어 언론단체들은 공영방송사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일부 언론을 대상으로 한 불매운동에 들어간다고 한다.[관련 기사 보기] 문제는 그런 시민사회의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론이 공공성을 회복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즘 사람들은 공중파 대신 종편 의 손석희가 진행하는 ‘뉴스 9’를 보거나 <국민TV>의 ‘뉴스K’, 부정기적으로 방송되는 <뉴스타파>를 시청하면서 진실 보도의 갈증을 달래고 있다. 오늘의 언론인들에게 유신독재에 저항하며 분연히 일어섰던 1970년대의 기자들이 지녔던 패기와 정신을기대하는 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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