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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지원 강화’ 약속 지킨 문재인 대통령

  • 입력 2018.01.31 17:29
  • 기자명 잡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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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에서 입금된 독립유공자 손자녀 생활지원금 ⓒ 이윤기

독립유공자 손녀라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어머니. 지난해 팔순을 넘기신 제 어머니가 난생처음으로 독립유공자 손녀로서 혜택을 받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독립·참전유공자에 대한 지원 강화”를 약속한 후속 조치가 올해부터 시행됐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그동안 독립유공자 수권자녀 한 사람에게만 지급하던 보훈급여를 독립유공자의 손자녀 중에서 생활이 어려운 자녀(3,564명), 손자녀(8,949명)에게 소득구간별 차등기준(중위소득 50% 이하, 70% 이하)을 적용해 매월 생활지원금 지급을 시작했습니다.

독립유공자 김경성 선생의 외손녀이신 저희 어머니도 보훈처 심사를 거쳐 올해부터 매월 33만5,000원의 생활 지원 자금을 받게 됐습니다. 지난 1월 15일 국가보훈처에서 첫 번째 생활지원 자금이 어머니 통장으로 입금됐더군요.

▲ 독립유공자 자녀 및 손자녀 생활지원금 신청 안내 자료 ⓒ보훈처

외증조부 되시는 김경성 선생은 1919년 3월 경북 김천군 개영면에서 3.1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개인재산을 처분해 군자금 1,000원을 마련했으며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는 청년 3명을 모집해 동삼성 안동현으로 가서 입교 주선했다고 합니다.

1920년 2월 다시 경주 지방에서 군자금 및 신흥무관학교 학생 모집을 위해 활약하다가 붙잡혀 1921년 4월 14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옥에서 풀려난 후 동지들이 있는 중국에서 치료를 받은 후 다시 귀국해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이사에 취임해 활동하시다가 형독이 악화돼 귀향했습니다. 하지만 1943년 9월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 독립유공자 자녀 및 손자녀 생활지원금 신청 안내문 ⓒ보훈처

지난 연말 보훈처에서 보내온 ‘독립유공자 자녀 및 손자녀 생활지원금 신청 안내문’을 받을 때까지도 문재인 대통령 지시 사항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독립유공자 자녀 및 손자녀 생활지원금 신청 안내문’을 우편으로 받고 반갑고 놀라운 마음에 어머니를 모시고 보훈지청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신청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물어봤습니다. “이때까지 아무 혜택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걸 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기도 하고, 광복절 경축사에서 다시 언급하셔서 2018년부터 생활지원금을 드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지난 8개월 동안 대통령 잘 뽑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만 이런 실감 나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저는 외증조부인 김경성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제 친가나 외가도 아니고 어머니 외가였기 때문에 집안 어른들도 중요하게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진 ⓒ보훈처

3.1 만세운동 주도한 김경성 선생

제 어머니는 가끔 “우리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다, 공부도 많이 하고 아주 뛰어난 지도자였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제 어머니가 독립유공자 손녀로서 생활지원금을 받게 되면서 처음으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게 됐습니다. 국가보훈처 공식 기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김경성 선생은 1919년 3월 경북 김천군 개영면에서 3.1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같은 해 10월경 군자금 1000원을 개인 재산의 처분으로 마련하는 한편 동삼성에 이동녕, 이시영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는 청년 3명을 모집하여 동삼성 안동현으로 가서 조강제에게 인계하였다고 한다. 1920년 2월 다시 경주 지방에서 군자금 및 신흥무관학교 학생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1921년 4월 14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국가보훈처

보훈지청에 생활지원금 지원 신청서와 구비서류를 내고 돌아와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머니 형제분들의 신청자격(소득과 재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이명박, 박근혜, 홍준표 찍은 대구 사는 이모, 외삼촌들은 절대 신청하지 마시라고 하세요”라고 해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물론, 농담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제 아버지가 “살아생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독립운동 하셨던 할아버지 덕분에 너희 엄마 외사촌들이 정말 힘들게 살았다, 공부도 제대로 못 하고...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하신 외할아버지 덕분에 나라에서 이런 지원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외사촌들이 정말 힘들게 독립운동 하신 자료를 찾아내서 외할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등록했는데... 이런 날이 오게 될 줄 몰랐다”고 하시더군요.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해지면 돌아가신 어머니 산소에라도 한 번 더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동네 분들과 친구 분들에게도 자랑을 많이 하셨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외할아버지를 더 자랑스러운 분으로 만들어줬다고 하시더군요. 독립운동을 하셨던 외할아버지 자랑도 하셨지만, ‘독립유공자 손자녀 생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한 문재인 대통령 자랑을 더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2018년 1월부터 ‘독립유공자 손자녀 생활지원금’ 지급이 시작됐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독립유공자인분들 꼭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지원 초기라 아직은 대상자 중에서 누락된 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빠짐없이 신청하셔서 지원받으시고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자부심도 조금 더 가지시기 바랍니다.

김경성 선생 공적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 고장 위양을 넘나드는 원고개 마루에 지난날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으려고 고난의 외길에 일생을 불사르고 가신 애국지사를 모시노니 그 이름은 김경성이요 호는 성계이다. 1879년 2월 11일 이곳 의성땅 도덕리에서 나시니 김녕김씨이다. 단종유신 백촌선생을 파 선조로 하는 충절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휘 상진이요. 어머니는 진성 이씨 노원의 따님이다.


집안에 흐르는 나라와 겨레 사랑의 얼을 이어 받아 맵고 굳센 마음의 바탕을 지녔으며 그 위에 곧고 맑은 슬기를 가진분이었다. 어버이의 뜻을 이어 글을 읽고 덕을 닦아 손수 밭갈며 고향을 지키던 농부로써 부지런하고 아뜰하게 살아가던 고을 선비였으나 때는 바야흐로 나라는 이미 빼앗기고 겨레는 오랑캐의 사슬에 얽매여.


가슴에 서리는 통한을 가누지 못하여 금릉고을 개령으로 옮겨가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나라와 겨레 위해 큰일 할 때를 기다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만 책을 덮고 일어나 영남일대의 유림을 일깨우고 이끌며 앞장 서 활약하다가 개령지방의 주모자로 잡힌 몸이 되었으나


마침내 그들의 회유정책에 따라 풀려나자 그로부터 그 인생은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한 가시밭길로 이어졌으니 우천의 동지 유우국과 밀약 가산을 팔아 일천원(1000원)의 비자금을 마련 뒤따르는 젊은 투사들을 이끌고 대륙으로 건너가서 신흥 무관학교에 입교시켜 무력 항쟁의 인재양성에 대비하고 이역만리 설원을 너머 의군부에 종사하다가


동지 조강재와 모의 군자금모집과 동지규합의 사명을 띠고 나라산으로 스며들어가서 동해지역을 누비며 활약하던중 뒤밟아온 왜경에게 경주에서 사로잡히어 그로부터 3년 4개월여를 혹동한 고문으로 생사의 기로를 수 없이 넘으면서도 끝까지 이를 악물고 한사람의 동지도 끌어들이지 않았다.


사경에서 내처지자 다시 중국으로 가서 동지들의 정성으로 형독을 치료받아 가까스로 소생하였다. 그러나 나라안의 조직이 허물어져감을 듣자


서둘러 귀국 평양과 서울을 오고가며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그 이사에 취임하여 이인, 원익상, 조만식 윤치호 등 저명한 인사를 총망라하여 의론하여 민족자립의 기틀 마련에 힘을 기울이던 중 옥중에서 입은 형독이 다시 악화되어 귀향.


제심당에 목욕하며 상한 몸을 요양하다가 끝애 광복을 보지 못한채 1943년 9월 8일에 세상을 떠나시니 이승에서 계시기 예순네해에 나라를 위해 싸우시기 스물네해였다.


아 거룩하도다. 님의 넋이여. 오늘 여기 나라가 얼마나 소중하며 겨레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되는 돌을 세워 천추에 전하노니 후진들은 님의 뜻 가슴에 새겨 길이 잊지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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