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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 외친 말 “내 딸은 내연녀가 아니에요”

  • 입력 2018.01.22 16:01
  • 수정 2018.01.22 16:40
  • 기자명 팟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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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죽었다. 지병이 있던 것도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다. 끔찍하게 살해됐다. 처참한 시신은 가족들이 생전 가본 적도 없는 양평의 야산에 버려져 있었고, 딸을 죽인 범인은 엉뚱하게도 한참 떨어진 원주 경찰서에 찾아가 자수했다. 범인은 딸이 다니던 대한송유관공사의 인사과장이었다.

경찰은 딸과 범인이 내연 관계였다고 했다. 딸이 이별을 통보하자 분노한 범인이 우발적으로 딸의 목을 졸랐다면서. 엄마는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딸에게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범인은 딸보다 16살이나 더 많은 유부남이었다.

근거 없는 의심이 아니었다. 시신과 현장, 그리고 온갖 증거들이 경찰의 말을 부정했다. 잠들어 있다 목이 졸려 죽었다는 딸의 시신은 피투성이였고, 사건 현장인 차 안은 난투의 흔적이 뚜렷했다. 범인이 사생활까지 간섭하며 사귀자고 괴롭히는 통에 딸이 늘 힘들어했다는 증언이 나오는가 하면, 딸의 미니홈피에는 사건 며칠 전 쓴 ‘누가 나 좀 구해줘’라는 절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명백한 사내 성폭력이었다. 하지만 회사와 근로복지공단은 경찰의 ‘내연 관계’라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직원 개인 간의 치정 문제로 일어난 사건이라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했다.

엄마는 투사가 됐다. 딸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지만 죽은 뒤까지 ‘내연녀’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진실은 명확했고 증거도 충분하니 당연히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범인, 경찰, 검찰, 판사, 회사, 변호사… 싸워야 하는 상대는 자꾸만 늘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목을 잡히고 믿었던 이들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그렇게 13년을 보냈다. 무서운 사람과 미운 이만 늘어나고 기댈 곳 없는 마음은 지쳐갔다.

그래도 엄마는 아직 쉴 수 없다. 딸의 삶은 고작 스물셋에서 멈췄다.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더 많은 나이. 딸이 미처 살아내지 못한 날들은 엄마의 가슴에 고스란히 한으로 박혔다. 그 한을 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끝낼 수 없다.

이 인터뷰는 그 싸움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의 싸움을 위한 최소한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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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날씨가 춥던 어느 날, 대한송유관공사 살인사건 피해자 고 황인희 씨의 어머니인 유미자 씨를 만났다. 체구가 작은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나게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무엇이 들었나 했더니, 좋이 몇천 장은 될 듯한 서류뭉치였다. 인터뷰에 참고가 될까 해서 그간의 사건 기록을 모조리 들고 나왔다고 했다.

기록들을 짚어가며 사건을 설명하는 유미자 씨

사건 기록을 하나하나 펼쳐놓으며 설명하는 유미자 씨의 입에서는 온갖 수사, 법률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법조계에 종사한 것도 아니고 가족 중에 경찰이 있는 것도 아닌 그가 이런 지식을 줄줄 외게 된 건 순전히 지난 13년간 쌓여 온, 사회를 향한 불신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딸 인희 씨의 죽음 후, 유미자 씨는 하루아침에 피해자 유가족이 됐다. 피투성이가 되어 버려져 있던 딸의 시신을 생각하면 앉지도 눕지도 먹지도 못했다. 몇 달 동안 ‘사귀자’며 따라다니는 범인에게 시달렸을 딸의 모습이 가슴에 사무쳤고, 그것을 진작 알아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원통했다. 핏발 선 눈으로 지새는 밤이 늘어났지만, 그래도 범인이 잡혔으니 제대로 된 벌은 받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때까지는.

정신 차려보니 딸은 살인범의 연인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범인 이XX가 우리 인희를 살해한 게 경기도 양평이거든. 그런데 그놈이 엉뚱하게 강원도 원주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한 거예요. 그리고 원주 경찰서가 그대로 사건을 맡아서 수사하게 된 거죠.

나중에 들으니 보통은 범행 지역의 관할서가 수사를 맡는 게 대부분이고, 상황상 그게 어려우면 최소한 용의자 거주지의 관할서가 맡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수사를) 양평에서 하든 이XX이가 사는 동네에서 하든 했어야 되는데 거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거였죠. 나중에 알고 보니 원주에 대한송유관공사 지사가 있더라고요.”

딸의 회사도 경찰도 이상했다. 가해자 이XX은 황인희 씨를 살해한 지 이틀이 지난 6월 2일 새벽 경찰서에 찾아와 범행 사실을 자수했다. 인희 씨의 시신도 그 이후에 찾았다. 그런데 대한송유관공사는 가해자 이 씨가 자수하기 하루 전인 6월 1일 그를 갑자기 해고해 버렸다. 해고 사유도 적지 않은 채였다.

가해자 이XX의 해고 명령서. 이 씨가 채 자수하기도 전, 대한송유관공사는 이유도 명시하지 않고 갑자기 그를 해고했다.

그러면서도 이 씨가 자수한 후, 경찰서에 가족보다 먼저 다녀간 건 송유관공사 직원들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경찰에서 당연히 제대로 수사하고 있겠거니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수사) 기록이 엉망인 거예요. 맨 처음 진술서를 보면 범인 이XX가 ‘인희와 나는 직장동료 관계다’라고 했는데 경찰이 굳이 내연 관계 아니냐고 묻고 또 대답도 듣지 않고 그렇게 적었더라고요. ‘내연 관계’라고. 그러더니 서류가 바뀔 때마다 관계를 유지했다는 기간이 점점 늘어나요.

이 보고서에는 ‘내연 관계를 8개월 유지하다가’로 적혀 있다가 저 서류를 보면 9개월이라고 되어 있고 또 다른 걸 보면 10개월이 되어 있고, 그런 식이었어요. 인희가 미니홈피에 써 놓은 글귀를 범인한테 보낸 메일이라고 해 두질 않나...

‘이혼할 테니까 사귀자’며 치근덕거리고 한밤중에도 전화하고, 회사에서 인희가 누구랑 친하게 지내면 쫓아다니면서 괴롭혔다는데 그게 내연 관계라는 게 말이 되나요? 사내 성폭력이지.”

사건 담당 경찰이 쓴 초기 수사보고서. 가해자가 직장 동료라고 진술했음에도, 두 사람 관계를 연인으로 확신하는 듯 추궁하고 있다.

경찰의 수사 보고서들. 보고서마다 ‘내연 관계’를 유지한 기간이 다르다.

유미자 씨는 경찰의 수사가 이런 상태였다는 걸 재판이 시작된 뒤에야 알았다고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딸과 딸의 살인범이 ‘내연 관계’로, 딸의 죽음이 ‘치정 다툼으로 인한 살인’으로 둔갑해 있었다. 사내 성폭행이라는 말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믿을 사람 하나도 없더라고요. 경찰도 검찰도 변호사도…”

“어떤 단체에서 변호사 한 명을 추천해 줬어요. ㄱ변호사라고, 예전에 집단 성폭행 사건을 무료 변론했던 인권 변호사라면서.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 딸 사건도 잘 봐주겠다 싶었죠. 당장 찾아가서, 수임료 1천만 원을 주고 선임했어요.

처음 본 날부터 자신만만하더라고요. 자기가 자기를 소개하면서 ‘훌륭한 인권 변호사’라고 하기에, 그때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정말 대단한가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던 ㄱ변호사는 정작 사건에는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내가 그 변호사한테 제일 많이 들은 말이 ‘기다려봐라’, ‘생각해보겠다’ 였어요. 소장도 잘 안 써 주고, 제일 중요한 1심 형사 사건에는 선임계도 안 내고.

2심에서 가해자 쪽 변호사가 갑자기 우리 인희가 가해자한테 보냈던 연애편지가 있다면서 그걸 증거로 제출하겠다는 거예요. 그럼 그걸 우리 변호사가 확인도 하고 변론도 해야 하는데 그 날 (ㄱ 변호사는) 오지도 않고… 나 혼자 그냥 너무 촉이 이상해서 다음 날 증거 열람복사 신청을 해서 그 편지를 봤어요. 그런데 글씨체가 인희 것이 아니더라고요. 내가 내 딸 글씨를 모를 리가 없잖아요. 전혀 달랐어요.

그래서 변호사 사무실에 그걸 곧장 가져가서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강 변호사 아래 있는 서브 변호사가 ‘이거 사문서 위조네요’ 하더라고. 그럼 그걸로 고소장을 내고 재판부에 제출도 해 달라고 했죠. 그런데 ㄱ변호사는 또 기다리라고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거에요. 시간은 자꾸 흘러 가는데… 보다 보다 속이 터져서 내가 법무사 사무실을 따로 찾아가서 30만 원 주고 고소장을 써서 냈어요. 변호사를 멀쩡히 두고서도.”

국과수 감정 결과, 가해자 측이 제출한 편지 속 필체는 인희 씨의 것이 아닌 걸로 드러났다. 위증이었다. 유가족인 유미자 씨가 홀로 그 결과를 받아들 때까지, 검찰과 변호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유미자 씨는 ㄱ변호사를 해임했다.

국과수의 필적감정서. 편지의 글씨는 인희 씨의 것이 아니라는 결과가 적혀 있다.

증거물로 제출된 편지는 황인희 씨와 관련이 없다는 가해자 측 변호사의 확인서. 필적 감정 결과를 들고 다니며 이 확인서를 받아낸 것도 유미자 씨였다.

대한송유관공사 대주주인 SK가, ㄱ 변호사가 이사로 있는 사회공헌재단에 후원금 10억여 원을 지원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다. 이 사실 자체가 어떤 비리를 입증할 수는 없겠지만, 그간의 미심쩍었던 태도를 생각하면 배신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기업 지원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내가 이 사건을 맡기려고 했을 때 ‘내가 이사로 있는 재단이 SK와 이러이러한 관계가 있다’ 정도만 말해 줬어도 그 사람한테 내 딸 사건을 맡기지는 않았을 거예요. 왜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는지, 그게 화가 나죠.

그리고 시간이… 그 사람이 사건 쥐고 허송세월하는 사이 그냥 흘려보낸 그 재판과 시간이 너무너무 아깝고 분한 거에요. 그때 초반 대처만 잘 했더라도…”

처음에 놓친 것들이 끝까지 사건 해결의 발목을 잡았다는 유미자 씨의 말은 사실이었다. 황인희 씨의 죽음을 ‘내연관계의 남녀 간 치정에 의한 살인’으로 몰아갔던 경찰 수사의 문제점이 밝혀진 건 1심 판결이 모두 끝난 뒤였다. 그 사이 범인은 성폭행과 협박 등의 혐의를 모두 배제한 채 살인과 사체 유기 혐의로만 재판받았고, 이는 항소심과 상고심까지 이어졌다.

경찰 수사가 잘못되었다는 걸 입증해낸 사람도 유미자 씨였다.

“인희를 두고 내연관계 어쩌고 하는 걸 알고 나서, 서부지검 피해자상담소에 갔어요. 사건 수사가 잘못된 것 같다고. 내연 관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고, 범인은 분명히 직장 동료라고 진술했는데 왜 경찰이 ‘내연 관계’라고 서술하느냐고. 개인 미니홈피에 써 놓은 글도 인희가 그 사람한테 보낸 메일이라고 그걸 증거로 달아놓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믿냐고.

실제로 말이 안 되는 게, 인희가 잠든 사이에 목을 졸라 죽였다는데 정작 삭흔(목 조른 흔적)은 없고, 시신이 피투성이에 옷도 반쯤 벗겨져 있었어요. 손톱도 부러져 있고.

당시에 우리 인희는 남자친구도 있었다고 하고,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이XX이 일방적으로 전화하고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고 해요. 그런데 경찰 조서에는 무슨 우리 딸이 이 남자 저 남자를 막 만나고 다녔다느니 그런 말이 쓰여 있는 거예요. 그것도 말이 안 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게 그놈이 우리 딸을 죽인 거랑 무슨 상관이냔 말이야.

아무튼 그래서 서부지검 쪽에서 당시 담당 경찰한테 전화를 했어요. 이거 이상하게 수사했는데 왜 그렇게 했냐고. 그랬더니 그것 외에 내연 관계라는 증거는 없다면서 “내가 무식해서 ‘내연’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렇게 썼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당시 유미자 씨의 피해자상담소 상담기록

범인 이XX에 대한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그에게 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만을 적용해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선고가 끝나자마자, 유미자 씨는 원주 경찰서로 달려갔다.

“3층인가에 서장실이 있었어요. 어떻게 할 거냐고 따졌죠. 이 책임 도대체 어떻게 질 거냐고. 그랬더니 인터폰으로 사람을 부르면서 “끌어내”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무슨 동네 개도 아니고, 끌어내긴 뭘 끌어내. 그때부터는 기억도 잘 안 나요. 소리 지르고 난리를 쳤죠. 겁도 안 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내려와서 그 담당 형사한테 자인서 쓰라고 했죠. 그 수사 내가 그렇게 했다고 쓰라고. 쓰더라고요. 자필로 쓴 거에 도장도 받아서 왔죠. 그리고 일주일쯤 있다가 그 팀 팀장이 제 메일로 뭘 구구절절 써서 보냈어요 ‘내연의 관계 확인된 바 없고 미니홈피 글을 메일이라고 잘못 기재한 것도 맞다. 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했고…’ 뭐 어쩌고저쩌고 써서 보냈는데 그럼 뭐 하나요. 1심은 이미 끝났는데. 그 진술서 때문에 이 사건이 치정사건이 되고 우리 딸은 내연녀가 되어버렸는데.”

원주경찰서 수사팀 팀장이 보낸 메일

유미자 씨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딸은 사건이 일어나기 닷새 전쯤 미니홈피에 ‘사는게 괴롭다. 누가 날 좀 구해줘’라는 글을 써 두었다.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세상을 뜬 다음까지 그 끔찍한 괴로움에 묶여있게 할 수는 없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닷새 전 인희 씨가 자신의 미니홈피에 적은 글

“정말 안 가본 데가 없어요. 근로복지공단에 갔더니 산재 신청도 안 된대요. 이건 사내라서 발생한 일이 아니고 개인 간의 치정사건이라 산재랑 상관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수사 잘못했다고 경찰이 직접 쓴 자인서며 내가 밝혀낸 위증 증거 같은 것들 다 들고 갔더니 차 한 잔 타다 주고 ‘어머니 고생 많으셨네요’ 하면서도 자기들이 도와줄 건 없대요. 난 도와달라고 간 게 아닌데. 재판을 다시 해 오라는 거야. 그게 무슨 게임인 줄 아는지.

회사도 찾아갔는데, 피하고 어쩌고 하더니 어떻게 총무팀장을 만났어요. 그 사람이 어디 큰 원탁 있는 회의실로 날 데려갔는데 거기 사장이 있더라고. 그래서 ‘내 딸 살려놔라. 어떻게 할 거냐’ 물으니까 사장이라는 놈이 우리 둘째 딸을 보면서 ‘저기 딸 또 있잖아요’ 하더라고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소리인가요, 그게?”

송유관공사는 인희 씨의 첫 직장이었다. ‘내가 들어간 게 기적 같다’고 할 정도로 좋아하며 지각 조퇴 한번 없이 2년을 열심히 다니던 회사였다. 그랬던 회사가 딸을 그렇게 내팽개쳐버렸다는 것이 더욱 참담했다.

“그때부터는 무슨 지원단체며 상담센터, 여성단체까지 다 돌아다녀 봤어요. 그런데 앞에서는 어머니 어머니 하지만 결국 답 같은 답을 주는 데는 하나도 없더라고. 어느 순간부터는 매번 가서 내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이 드는 거예요.

어느 단체 상담센터였던가… 갔을 때 거기 상담사라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사무적으로 이를 하얗게 드러내고 웃으면서 얘기해보라고 하는데 문득 모멸감이 들더라고요.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아직도 그 하얗게 웃던 입이 잊히질 않아요.”

유미자 씨가 동분서주하는 사이 범인은 15년의 형량마저 깎여 대법원에서 1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더 이상은 무리라고, 이제 그만 하라고 유미자 씨를 말리는 이들도 생겨났다.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매년 인희 씨의 기일이 되면 추모 집회를 열었다. 3년 전인 2015년에는 그것 때문에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다.

“인희 사건이 2005년에 일어났으니까, 2015년이 딱 인희 10주기 되는 해였어요. 그래서 분당 송유관공사 본사 앞에서 10주기 추모제 겸 집회를 하기로 했죠. 처음에는 본사 앞에서 하려고 집회신고를 다 해 놨어요. 그런데 관할 경찰서 정보과에서 계속 연락이 오는 거에요. 거기가 사유지라 집회하면 안 된다고, 다른 데서 하면 안 되냐고.

건물이나 사무실 안에 들어가서 한다는 것도 아니고 정문 앞에서 한다는 건데. 그리고 신고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됐죠. 안 되는 거면 안 되는 거지 다른 데서 해달라는 건 또 뭐고… 여튼 몇 번씩 전화가 오고 그 형사가 하도 애원하길래 송유관공사 들어가는 도로변으로 장소를 옮겨서 재신고했어요. 그러고 나니까 처음에 집회신고 한 건(송유관공사 본사 앞) 취소해 달라고 또 전화가 오더라고요. 그건 싫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때부터는 하루에 한 번씩 ‘언제 집회하시냐’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는 거예요. 내가 집회 신고할 때 기간을 한 달로 잡았거든요. 아니 근데 원래 경찰이 그렇게 집회 기간 긴 사람들한테 일일이 전화해서 언제 할 거냐고 묻고 그래요? 신고를 끝냈는데 언제 하는지는 내 마음이지. 그래서 그냥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못하고 있다. 내 몸 괜찮은 날 할 거다” 하고 끊고 그랬죠.

우리 애 기일이 5월 30일이라, 하루 전인 29일에 집회를 하려고 했어요. 그날 한다고 했더니 새벽같이 (경찰에서) 또 전화가 와요. 오늘 언제 오느냐고. 계속 묻기에 8시쯤 도착할 것 같다고만 했죠.

그런데 송유관공사 근처에 도착하니까 경찰에 미리 언질을 받은 건지, 그 직원들이 정문에서 한 300m 떨어진 데까지 나와서 길을 막고 기다리더라고요. 거기는 딱 그 건물 드나드는 차들만 다니는 데라 교통이 복잡하지도 않고 원래 그렇게 막고 있던 데도 아닌데 경광봉까지 들고 7명이나 나와서. 무슨 검문하는 것처럼 들어가는 차를 하나씩 세우고.”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차를 한 대씩 세우고 안을 들여다보던 그들은 차에 탄 유미자 씨를 보자 “이 차 맞네” 하고는 앞을 막아섰다.

“집회신고 한 거라고 하는데도 들은 척도 안 하는 거야. 그냥 딱 막고 서서… 그래서 내가 경찰에 신고했어요. 신고 다 된 집회인데 못 하게 막는다고. 조금 지나니까 경찰차들이 왔어요. 이제 되겠구나 했는데, 경찰이 나를 막는 거예요. 사유지라 못 들어간다나. 신고는 내가 했는데.

그러면서 약간 실랑이가 있었어요. 폭력이나 욕설이 오간 건 아니고, 걔들(송유관공사 직원들)이 나를 막았으면 막았지 나는 밀지도 않았고. 말로만 항의했죠.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나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죄냐고 했더니 일반 교통방해랑 업무방해래요.”

당시 상황을 담은 사진. 송유관공사 직원들이 유미자 씨의 진입을 막고 있다.

교통을 막고 있던 건 송유관공사 측이라는 유미자 씨의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찰은 어느새 유미자 씨가 가지고 온 차량마저 어디론가 치워버리고 경찰차에 타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는 더 실랑이하다간 공무집행방해까지 더해질까 두려워 순순히 올라탔다.

“서판교 파출소로 데리고 가더라고요. 도착해서 앉아 있는데 너무너무 서러운 거예요. 송유관공사에서는 직원이 여섯 명이나 나와서 간이 진술서 같은 걸 쓰면서 쑥덕거리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설움이 복받쳐서 나도 모르게 엉엉 울고 있는데, 추모제 오기로 했던 사람들한테 하나둘씩 연락이 오더라고요. 집회 장소 도착했는데 왜 아무도 없냐고.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상황 설명하고, SNS에도 글을 올리고 하니까 기자며 친구들이며 국회의원 보좌관들까지 파출소로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난 거죠. 신고한 집회인데 무슨 교통방해냐고.

그래서 한참 시끄럽게 되니까 경찰이 오더니 날 보고 이죽거리면서 “아줌마 발 넓으시네요” 하더라고요.”

그날 유미자 씨는 한나절 넘게 경찰서에 붙들려 있었다. 사정을 들은 변호사가 달려온 뒤에야 풀려나, 간신히 추모 집회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건은 아주 최근까지 유미자 씨를 괴롭혔다.

“집회한 게 5월이었는데, 9월에 검찰에서 그걸 갖고 재수사를 한다는 거예요. 일반 교통방해에 해당이 되질 않으니까 업무 방해로만 다시 엮어서. 송유관공사 직원들을 다시 불러다가 진술서도 재작성했다고 하고. 무슨 강력범죄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하더라고요.

업무방해라는 것도 이해가 안 됐어요. 정문 안쪽도 아니었고 송유관공사 들어가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일반 차들도 지나다닐 수 있는 도로였는데, 그 도로를 제가 막고 시위를 한 것도 아니고 거길 막고 있었던 건 오히려 직원들이란 말이에요. 나는 지나갈 생각이었고. 그런데 그게 어떻게 업무방해가 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쨌든 그걸로 약식기소가 됐다고 하더니 벌금 70만 원이 나왔더라고요.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분하고 억울해서 못 내겠더라고요. 내 딸 사건은 그렇게 엉망진창 만들어 놓더니 나더러 벌금을 내래요. 불복하고 정식 재판 청구를 했죠. 그걸로 2년 넘게 재판을 했어요. 어이가 없죠.

재판 내내 집회 신고 관련해서 형사랑 통화했던 기록, 직원들이 차 막아선 사진, 112 신고기록까지 다 제출하면서 항변했어요. 그래도 소용이 없었죠. 증인이라고 나온 송유관공사 경비랑 정보과 경찰은 내가 추모집회 하려고 했던 걸 안다고 했다가 모른다고 했다가… 그렇게 말을 바꾸는 건 모해 위증이라고 하던데 그런 건 다 넘어가고, 항소며 상고까지 다 기각됐어요.

그러고 나니 벌금 70만 원에 소송 비용 29만 7천 5백 원까지 내라고 고지서가 오더라고요. 나라가 이럴 수가 있나요.”

당시 사건의 공소장. 유미자 씨는 “신고된 집회를 하러 가겠다는데 그 길을 막아서 실랑이를 한 것이 어떻게 내가 고의로 출입을 방해한 게 되느냐”고 반문했다.

그사이 형량을 다 채운 범인은 출소해 사회 속으로 흔적 없이 섞여들었다.

“(범인이) 언제 출소했는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도 몰라요. 언제 나왔는지라도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놈이 벌써 세상에 나와 있다는 것만도 분통이 터지지만, 인희 외에 딸이 둘이나 더 있으니까 지금 그놈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게 더 무서워요. 내 근처를 맴돌아도 나는 모르는 거잖아요.”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을 수 있다면

피해자 유가족의 일상은 이토록 외롭고 참혹했다. 유미자 씨는 13년을 그렇게 보냈다. 어찌 보면 감옥에 갇혀 있는 것보다 더 괴로운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쉬지 않았다.

인희 씨 사건의 진실을 밝혀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넣어 8천여 명의 서명을 얻어내기도 했고, 광화문 1번가에 민원을 넣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과정을 SNS에 공유하고 중계했다. 서류를 모으고 발품을 팔며 하루 두세 시간씩만 자면서 홀로 해낸 일들이었다.

법률 전문가도, 사회운동가도 아니었던 그를 이토록 맹렬히 움직이도록 한 동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가지였다. 진실을 밝혀, 딸의 명예를 되찾아주고 싶다는 마음.

“원하는 건 정말 딱 한 가지예요. 범인, 송유관공사, 경찰… 우리 인희를 죽이고 억울한 누명까지 씌워버린 사람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 우리 딸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그런 사고가 났으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잖아요. 엄연히 사내 성폭력 피해자인 내 딸을 ‘내연녀’라고 몰아가기까지 하면서 다들 빠져나가기 급급했잖아요. 나는 이걸 용납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얼마 전에 한샘 (사내 성폭행) 사건도 터지고 또 비슷한 사건들이 계속 나오는데 다 사라져요. 하나도 끝까지 해결되었다고 하는 게 없어. 그러니 우리가 모르는 건 또 얼마나 많겠어요. 일반인은 정말 그냥 당해요. 대충 뭉개고 말 못 하게 하고. 한 번은, 정말 딱 한 번은 제대로 해결이 되어야 또 그런 일이 안 생기지 않겠어요? 내가 바라는 건 정말 그거 하나뿐이에요.”

황인희 씨 살인사건은 아래 팟빵 방송을 통해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대한송유관공사 살인사건 편 ( 1부 / 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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