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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오늘, 청와대 습격 1·21사태 일어나다

  • 입력 2018.01.22 10:23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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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태 후 김신조(맨 왼쪽)의 기자회견. 그는 '박정희 목 따러 왔'다고 말해 온 국민을 경악시켰다. ⓒ경향신문

1968년 1월 21일 일요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 124부대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 이른바 ‘1·21사태’(김신조 사건)가 일어났다. 서울 세검정 고개에 이른 이들은 경찰에게 저지당하자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고 뿔뿔이 도주했다.

이들 공작원이 정찰국장으로부터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1월 13일이었고,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기지를 출발한 것은 사흘 후인 1월 16일 밤 10시였다.

이들은 17일에 한국군 복장으로 수다에프(PPS-43)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의 미군 제2보병사단 구역의 군사분계선을 넘었고, 18일에는 꽁꽁 얼어붙어 있던 임진강을 걸어서 건넜다.

이들은 18일 오후 2시에 경기도 파주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나무꾼들을 만나면서 정체가 드러났었다. 그러나 이들은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게 번거롭다는 이유로 그들을 살려주었고 나무꾼들은 즉각 이 사실을 신고했다.

그런데도 이들이 별다른 검문을 받지 않고 서울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방첩대’(CIC, 뒤에 보안사로 개편) 마크 덕분이었다. 군복의 방첩대 마크를 내보이면서 방첩대만 언급하면 경찰이고 군부대고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경기도 고양시 삼봉산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들은 1월 20일 파주시 고령산 앵무봉을 통과하여 북한산의 비봉(碑峰) 승가사(僧伽寺)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탔다. 이들이 청와대 전방 2Km 지점인 세검정파출소 관할 자하문초소에 닿은 것은 1월 21일 밤이었다.

공작원들, 닷새 만에 청와대 부근에 닿다

자하문초소에 닿은 31명의 공작원은 첫 검문을 당했다. 이들은 ‘CIC 소속 대원’이라며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이라고 둘러댔지만, 대규모 병력 이동을 보고받지 못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은 이들의 전진을 저지했다.

때마침 시내버스 2대가 다가오는 것을 본 공작원들은 경찰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뒤에 생포된 김신조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다고 오인한 것이었다.

현장에서 종로경찰서장이 전사하고 경찰관 1명은 중상을 입었다가 치료 중 숨졌다.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으며 버스에 던진 수류탄으로 버스 승객 3명이 사망했다. 이 첫 전투에서 경찰에게 생포된 공작원 1명은 압송 중 숨겨둔 수류탄을 이용해 자폭했다.

1명 생포, 28명 사살, 2명 도주로 종료

공작원들은 흩어져 인왕산과 비봉산, 의정부 등지로 도주했다. 군과 경찰은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가 이들 공작원 소탕 작전에 나서 22일, 인왕산 아래 세검정 계곡의 독립가옥에서 은신하고 있던 김신조를 생포했다.

북악산 소나무에 남은 당시의 탄환 자국. ⓒ위키백과

얼마간 교전 끝에 군이 회유하자, 김신조는 순순히 수류탄 내려놓고 투항했다. 이후,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하여 31일까지 28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작전은 종료됐다. (자료마다 도주자를 1~2명으로 보고 있으나 이 글은 <민족문화대백과>를 따랐다.)

당시 도주한 2명의 공작원 가운데 하나가 2000년 9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용순 당 중앙위 비서를 수행해 송이버섯을 전달했던 박재경 대장으로 그는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었다. 투항 생포된 공작원 김신조는 이름을 바꾸고 남한에서 개신교 목사로 살고 있다.

124군부대 군복. ⓒ 나무위키

이들 무장 공작원들이 갖춘 무기는 기관단총(PPS) 31정(1인당 1정씩 휴대), 실탄 9,300발(1인당 300발씩 휴대), TT권총 31정(전원 휴대), 대전차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방어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단도 31정(전원 휴대)이었다.

우리 쪽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민간인 7명이 죽었고, 교전 중 전사한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 등 23명의 장병이 전사했으며 52명이 다쳤다. 자하문 쪽에서 이들을 막은 경찰서장과 경찰관은 현장 부근에 동상과 추모비를 세워 희생을 기리고 있다.

“박정희 목 따러 왔시요.”

최고 권력자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기조차 쉽지 않았던 독재정권 시대,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기자회견장에서 생포 공작원 김신조는 내던지듯 그렇게 뱉었다. 그 한마디는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안보 위협’을 새삼스레 환기해 줬다.

그래서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사태 이후 적지 않은 변화가 잇따른 것은 당연했다.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의 창설을 서두르게 되었고, 박정희는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 상태를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했다.

예비군 창설에 사병 복무기간 연장까지

안보 우선주의는 노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향토예비군(1968.4.1.)과 육군3사관학교(1968.10.15.)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1969) 실시로도 이어졌다. 박정희는 실미도에 특수부대인 684부대(1968.4~1971.8)를 비밀리에 창설하여 보복성 공격을 꾀했으나 이후 미소 간 ‘데탕트’가 조성되면서 불발에 그쳤다.

무엇보다도 현역 복무 중이던 병들의 복무기간이 연장된 것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 사태를 계기로 정부는 육군·해병대 복무기간을 다시 6개월(36개월), 해군과 공군은 3개월 연장(39개월)했다. 이 복무기간이 다시 준 것은 병역 자원이 넘쳐난 1977년이 되어서였다.

이 사건으로 ‘김신조 루트’로 불리던, 경기도 양주시부터 서울 우이동까지의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 6.8km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됐다. 이 길은 41년 후인 2010에야 민간에 개방됐다.

또 북한산 우이령길은 북한산 둘레길의 한 코스로 제한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이 길을 걸으려면 인터넷이나 전화로 탐방 하루 전에 예약해야 하며, 탐방할 때 본인 확인이 가능한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예전과 같은 형태의 도발은 없지만, 남북을 오가는 공기는 여전히 차고 맵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모처럼 남북 간에 불고 있는 훈풍은 이 얼어붙은 공기를 얼마만큼이나 녹이게 될까. 그러나 남북한 단일팀 구성과 단일기 입장에 대한 여론의 호응도 예전 같지 않다. 지난 보수정권 9년의 공백 탓일까, 분단의 세월이 쌓은 망각의 켜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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