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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떨어지는데 집 사라, 안 살 거면 나가라”

  • 입력 2018.01.17 11:06
  • 기자명 잡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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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엄동설한에 연거푸 이사를 두 번이나 하게 됐다. 지난 12월 22일 서울 사는 아들 자취방을 옮겼다. 6,500만 원에 전세 살던 원룸이었는데 2년 계약 기간이 지나자 집주인이 보증금 1,000에 월세 50으로 바꾸든지 아니면 이사를 하라고 했다.

다행히 그리 어렵지 않게 살던 집 근처에서 신축 원룸을 구했는데 전세 보증금으로 9,000을 달라고 했다. 기존보다 2,500만 원이나 올랐지만, 그래도 월세 부담 없는 게 어디냐며 마음을 달랬다. 아들 자취방 보증금 마련을 걱정하고 있을 때 작년 2017년 말로 계약 기간이 끝나는 내게 내가 살던 집의 주인이 연락을 해왔다.

집주인은 집을 팔려고 내놨는데 안 팔린다면서 “싸게 줄 테니(부동산에 알아보니 시세와 같았다) 집을 사든지 아니면 집이 팔릴 때까지만 살다가 팔리면 곧바로 비워주면 좋겠다”고 했다. 언제 집이 팔릴지 모르는데 그렇게 불안하게 살 수 없으니 계약을 2년 연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내가 사는 집은 2017년 봄부터 부동산 매물로 내놨지만, 연말까지 단 한 명도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공인중개사 이야기도 집주인이 내놓은 가격으로는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최소한 시세보다 2,000~3,000은 가격을 낮춰야 겨우 거래가 된다고 했었다.

집값 떨어지는데 집 사라, 안 산다니 나가라

아파트 값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대출을 끼고 집을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판단했다. 전세로 2년 정도 다른 집에서 더 살면서 집값이 더 내려간 후에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주인의 집을 사라는 요청은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남편하고 의논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혹시라도 집주인이 알겠으니 이사 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며칠을 보냈다.

며칠 후에 연락이 와서 “전세 보증금은 걱정하지 말고 이사 갈 집이 구해지면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집을 여러 채 가진 집주인은 이번엔 꼭 집을 팔려고 마음먹고 빈집으로 두더라도 전세로 내놓을 생각은 없는 것이라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결혼 후에 2년쯤 전세살이를 하고 그 뒤엔 작은 평수지만, 내 집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세입자가 겪는 설움 같은 건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막상 집주인이 자기 집을 비워달라고 하니 서운한 마음이 확 밀려들었다. 집주인이 날짜를 꼭 지키라고 조르지 않았지만, 계약 기간 끝나는 날에 맞춰 이사를 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생겼다.

2년 전 다시 전세살이를 시작할 때는 “작은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도 꼬박꼬박 재산세 내야 하는데 아파트보다 비싼 전셋집은 세금도 안 내고 참 좋다”며 만족스러워했었다. 그런데 막상 집주인이 자기 집을 비워달라고 하니 집 없는 설움이 이런 거구나 싶어 서글펐다.

그날부터 부랴부랴 전셋집을 찾아봤지만, 지금 사는 집과 같은 평수는 전세로 나온 집이 없었다. 한 달 넘게 집을 알아보던 차에 지금 사는 집보다 작은 평수 아파트가 하나 전세로 나왔다. 무작정 같은 평수 아파트만 기다리다 작은 평수 전세마저(월세는 더 큰 부담이라서) 놓쳐버릴까 걱정이 돼 계약했다.

계약 직전 집주인에게 “오늘 계약하면 1월 말에 이사하게 되니 보증금을 준비해 달라”고 연락했다. 집주인은 “이사 날짜 맞춰 보증금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이사준비 잘 하라”고 대답했다.

매사에 긍정적인 아내는 작은 평수로 옮겨가면서 남는 전세보증금으로 아들 자취방 보증금 인상된 걸 은행 대출 안 받고도 올려줄 수 있어 오히려 잘된 것 같다고 했다. 내심으로는 작은 평수로 옮겨가는 게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아내 말도 일리가 있다 싶어 계약서를 쓰고 이사준비를 시작했다.

지난 연말 서울 사는 아들 자취방을 옮기면서 저축 500만 원과 나머지 부족한 돈은 부모님께 빌려서 보증금을 올려줬다. 내가 사는 아파트를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남는 보증금 차액으로 부모님께 빌린 돈을 갚고 이사비용(이사, 부동산 중개료 등)으로 써야 하니 아내 말대로 잘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집 판다더니 두 달 만에 딴 사람에게 전세로 내놔

앞서 나는 집을 빼달라는 집주인에 대해 ‘집을 여러 채 가진 집주인은 이번엔 꼭 집을 팔려고 마음먹고 빈집으로 두더라도 전세로 내놓을 생각은 없는 것이라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내가 참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집을 계약한 뒤의 어느 오후 이사 갈 집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해놨던 부동산사무소의 공인중개사에게 전화가 왔다.

“사장님 부탁하신 OO아파트 OO동 전세가 하나 나왔는데...혹시 이사 갈 집을 구하셨나요?”

“아… 예, 구해놓기는 했는데... OO동 전세가 나왔습니까? 몇 동 몇 호인데요?"

“부동산에서는 동·호수를 그냥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네 혹시 4층인가요?”

“네 4층 맞는데요...(말끝을 흐리고 당황해했다)”

“402호(내가 살던 집) 맞지요? 우리 집주인이 제가 사는 집 전세로 내놨나 보네요? 참 어이없네.”

공인중개사는 402호가 아니다 대답을 못 하고 얼버무리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통화하는 순간 배신감, 서글픔, 황당함 같은 감정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집을 팔겠다고 해서, 전세는 안 들일 거라 해서 어쩔 수 없이 살던 집을 떠나게 됐는데 그 집을 다시 전세로 내놓았다고 하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집을 팔려다가 못 팔아서 전세로 내놓은 집주인의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집 없는 세입자가 느끼는 서운하고 서글픈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밤에는 2년 전 지금 내가 살던 집을 소개해줬던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집주인이 매매를 전세로 바꿨는데 전세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집을 좀 보러 가고 싶다”는 거였다. 시간 약속을 정해 집을 보게 해달라고 했다. 짜증이 확 올라왔지만, ‘알겠다’하고 약속을 정했다.

나는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집주인은 새로운 세입자를 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손해고 집주인도 손해다. 나는 이사 비용과 부동산 중개수수료를 합쳐 300여만 원을 지출해야 하고 집주인도 80여만 원 중개수수료를 지불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배나 바닥 공사를 추가로 해줘야 할 수도 있다.

지은 지 12년이나 된 아파트라 나무 바닥이 매우 낡았다. 나야 2년 살았던 집이기 때문에 2년 더 그냥 살았겠지만, 새로 전세 입주하는 세입자는 낡은 나무 바닥 그대로 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냥 전세 기간을 2년 연장해줬다면 집주인도 손해를 보지 않았을 거다.

결국, 서로가 손해 보는 가장 나쁜 결과로 이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나중에 알고 보니) 집주인도 공인중개사가 권하는 대로 했던 것 같다. 집주인과 계약 기간 연장을 의논할 때 부동산에서 계약 연장이 어떻게 됐는지 묻는 전화도 왔었다.

“1월 초까지(두 달 정도) 집을 매물로 내놔보고 그때 가도 안 팔리면 전세로 내도 된다. 매매는 거래가 뜸하지만, 전세 아파트는 금방 세가 나가니 보증금 반환은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공인중개사 입장에선 그야말로 손해 날 게 없는 장사다. 집이 팔리면 더 많은 중개수수료를 받을 수 있고 그러다 안 팔려도 다른 세입자에게 전세를 소개하면 중개수수료를 한 번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공인중개사가 “어차피 시세 그대로는 집을 팔기 어려우니 전세 기간을 2년 연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면 나도, 집주인도 평소처럼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그렇게 되면 공인중개사에겐 아무런 수입도 생기지 않는 제일 나쁜 결과(!)가 된다. 앞서 내가 순진하거나 무지했다고 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아파트 시세의 2/3는 전세보증금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파트의 1/3은 집주인 재산이지만, 나머지 2/3는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맡긴 내 권리다. 그런데 계약 기간이 끝나면 기간 연장이든 보증금 인상이던 중요한 의사결정은 집주인 마음대로 다한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집값 2/3는 전세보증금... 내 권리도 있지 않을까?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전세 사는 사람들이 한 집에서 좀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전세보증금도 집주인 마음대로 올릴 수 없도록 물가인상률을 감안해 최저임금처럼 사회적 합의 기구를 만들어 정부가 인상폭을 결정하는 방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세입자에게 2회의 계약 갱신 청구권을 보장하는 법 개정안과 최소 기간을 3년으로 하는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라고 하지만, 집 가진 사람들,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으니 조만간 법이 개정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공인중개사 이야기로 내가 살던 집의 집주인은 아파트를 여러 채 소유하고 있다. 최근 지방 도시 집값이 많이 내려갔지만, 단 한 채도 싸게 팔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전세 기간도 연장해주지 않았고 2년 살던 세입자를 내 보내고 새로운 세입자를 들이기로 한 것이다. 집을 싸게 파는 것에 비하면 중개수수료 정도는 푼돈에 불과하니.

보름쯤 후에는 지금 살던 집을 떠나 작은 집으로 옮겨야 한다. 아내는 남는 돈으로 아들 보증금 올려주면 딱 맞다며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하지만,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그 집에 또 다른 세입자가 들어온다고 하니 왠지 서글프고 서러운 마음이 든다.

아~ 이 엄동설한에 이사를 가야 하는 집 없는 자의 설움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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