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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컬러TV의 보급을 막은 뜻밖의 이유

  • 입력 2017.12.02 11:48
  • 수정 2020.07.23 22:20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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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12월 1일 첫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면서 이른바 '총천연색 안방극장' 시대가 열렸다.

1980년 12월 1일 한국방송(KBS) 이 수출의 날 기념식 생방송을 시작으로 하루 3시간 동안의 컬러텔레비전 시험방송이 시작됐다. 1980년 8월 2일 컬러TV가 국내 시장에 처음 선보인 4개월 만에 TV 방송이 첫 전파를 띄운 1956년 5월 12일로부터 무려 24년 만이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이, 말하자면 삼라만상이 제가 가진 본래의 빛깔로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어서 이른바 ‘총천연색 안방극장’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일상에선 천연색 세계를 만나다 텔레비전을 켜면 흑백으로 퇴행하는 시간이 바야흐로 끝나고 있었다.

12월 22일부터는 한국방송(KBS) 2TV와 문화방송(MBC) 이 컬러 방송에 합류했다. 그리고 완전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은 1981년 1월 1일부터 시작됐다.

박정희의 '애민'과 컬러TV

TV와 방송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였다. 1964년 민간방송인 동양방송(TBC) 이 상용방송을 시작했고 1969년에는 문화방송(MBC)이 개국했다. 이어 1973년에 한국방송공사(KBS)가 주식회사로 세워져 3년 후 본격적으로 방송 전파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텔레비전 방송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텔레비전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의 TV는 귀한 물건이 보관된 장식장처럼 문짝이 달리고 문짝에는 열쇠까지 달려 있었다. 몸체를 받치기에는 다소 허약해 뵈는 다리도 달려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경제개발 5개년계획, 새마을운동 등으로 소득수준이 향상되면서 흑백텔레비전의 보급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컬러텔레비전의 생산은 1974년 아남전자가 일본 마쓰시타전기와 합작해 한국내쇼날의 이름으로 2만 9,000여 대를 생산하면서 시작됐다. 1977년부터는 금성사와 삼성전자도 컬러TV 생산에 참여하면서 11만 대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 1970년대 한국은 컬러TV를 생산했지만 국내에 보급하지 않고 수출만 했다. TV조립 장면 ⓒ국가기록원

그러나 컬러TV를 생산해 수출까지 하면서도 컬러TV 방송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고집 때문이었다. ‘흑백TV도 없는 사람이 많은데 컬러TV가 나오면 없는 사람이 더 비참해진다’는 게 그가 컬러TV 보급을 반대한 이유였다. 그러나 ‘소비를 조장하고 국민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TV VD-191 ⓒ 나무위키

그것이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저임금과 저곡가 정책으로 희생되고 있었던 시대, 개발 독재자의 ‘애민(愛民)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또 권력의 비호 아래 자본이 노동을 수탈하던 시대의 웃지 못할 삽화였다.

컬러TV 보급을 막은 것은 박정희뿐만 아니라 당시 신문사의 이해도 한몫을 했다. 1975년 10월 박정희는 한국전자박람회 개막식에서 가전업체 사장들 앞에서 ‘컬러TV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못을 박았으며 신문사들 역시 광고시장을 컬러TV에 빼앗긴다는 우려를 내세워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실제 컬러TV의 보급을 막은 것은 유신정권이 서구와 일본에서 밀려들어 올 퇴폐문화를 막으려는 의도였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 권력은 총천연색으로 외국 문물들이 소개될 경우 사회 분위기나 정권에 불만을 갖게 될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걸 우려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컬러TV가 국내에 보급될 뻔한 일이 없지는 않았다. 한국이 국내에서는 팔지 않는 컬러TV를 수출하는 데 대해 미국과 무역 분쟁이 일어나 미국이 연간 수입물량을 줄이면서 수출길이 가로막히기 시작했다.

1980년 4월 이한빈 경제부총리가 삼성전자에 수출하지 못한 컬러TV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걸 보고서 컬러TV 방영을 허락하는 쪽으로 정책전환을 시도한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컬러TV 불가론을 이어받은 최규하 대통령은 이를 백지화해 버렸다.

전두환 정권, 컬러TV 시판 허용부터

그러다가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과 유럽의 수출 규제로부터 국내 가전업계의 숨통을 틔워 줄 필요가 있었던 신군부는 금성사와 삼성전자, 양대 업체의 의견을 수용해 8월 2일부터 컬러 TV 시판을 허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4개월 후 마침내 시험방송의 형식으로 하루 3시간 동안의 컬러TV 방송이 시작된 것이었다. 컬러 방송 당시 정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전두환의 정장 색깔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른바 ‘땡전뉴스’가 출현하게 되는 시기도 멀지 않았다.

컬러TV 방송은 한편으로 신군부가 꾀한 이른바 ‘3에스(S) 정책’의 일부로 해석되기도 한다.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의 머리글자를 딴 이 우민화 정책은 반정부 활동이나 정치·사회적 이슈 제기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시행한 것이었는데 컬러TV도 그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3S정책과 컬러TV, 언론통제의 시대

저예산 에로영화가 범람하게 하고 정권의 주도로 서울올림픽 유치 성공(1981), 프로야구(1982), 프로축구(1983) 등의 프로스포츠를 권장하는 등의 이 정책의 성공에 컬러 방송은 필수적인 구실을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나라별 컬러 방송 시작연도를 보면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늦게 컬러 방송을 시작한 나라에 포함된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필리핀(1966), 대만(1969), 홍콩(1970)은 1970년 이전에, 말레이시아(1972), 태국·중국(1973), 북한·싱가포르(1974), 몽골(1975), 파키스탄(1976), 인도네시아(1977), 베트남(1978), 인도(1979) 등은 80년 이전에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와 같은 해 컬러 방송을 한 나라는 가나·시리아·우루과이·방글라데시·자이르 등이고 알바니아·파라과이·남예멘·터키는 1981년, 루마니아(1983)와 요즘 쿠데타로 조명을 받는 짐바브웨(1984)가 맨 꼴찌다.

컬러로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됐지만, 신군부의 독재가 이어지던 1980년대의 언론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른바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이 시작된 것은 컬러TV 방송 개시 바로 전날이었다. 그 때문에 동양방송(TBC) 는 문을 닫아야 했다.

전두환이 설치한 신군부의 ‘언론반’은 언론인을 회유하고 언론사의 논조를 민주화 여론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한 언론 공작을 수행했고 언론 통폐합 조치는 그 마지막 공작이었다. 각종 미사여구로 분칠했지만 이 조치의 본질은 정치 권력을 통해 언론 기관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제 정책은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까지 이어졌다. 컬러TV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안방극장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대를 이은 군부독재의 음험한 세월로 한국의 1980년대는 그렇게 우울한 서막을 열고 있었다.

<참고 자료>

- 위키백과

- 경향신문 ‘어제의 오늘-1980년 컬러TV 국내 첫 출시’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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