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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오늘, 미시마 유키오 할복하다

  • 입력 2017.11.27 10:09
  • 수정 2017.11.27 10:47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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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25일,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소(지금의 일본 방위성 본성)에서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가 할복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질극 끝에 총감의 방 앞 발코니에서 기자들을 향해 미일 안보조약과 헌법 개정을 요구하고 자위대 쿠데타를 촉구하는 이른바 ‘이치가야 연설’ 5분 뒤였다.

그의 요구에 따라 자위대원 1천여 명이 집결한 가운데 미시마는 일본의 재무장을 금지하는 전후 헌법의 개정을 촉구하고 ‘자위대가 무사도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등 격정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자위대원들 가운데 그의 연설을 귀담아 듣는 이는 없었고 돌아온 것은 야유뿐이었다.

미시마 유키오, 명예롭게 죽지 못했다

12시 20분, 미시마는 총감실에서 무릎을 꿇고 단도를 꺼내어 두 손으로 잡고는 자신의 배를 찔렀다. 모리타 마사카츠(森田必勝)가 미시마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일본도로 그의 목을 쳤지만 목이 베어지지 않아 몇 번을 반복해야 했다.

미시마의 목은 결국 다른 동료가 베어야 했다. 이어서 모리타 마사카츠 역시 같은 방식으로 할복자살했다. 사무라이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 자살의식을 ‘셋푸쿠(切腹)’라고 하는데 미시마는 일찍이 여기 매료되었다. 그러나 절명하지 않고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현장은 피범벅이 되어 ‘무사(사무라이)의 명예로운 죽음’을 원했던 미시마의 죽음은 끔찍한 장면으로 끝났다.

미시마 유키오(1925~1970)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필명)의 본명은 히라오카 기미타케(平岡公威).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고 2차대전 패전 뒤의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대표작은 <가면의 고백>, <금각사(金閣寺)>, 신경숙의 표절로 유명해진 <우국(憂國)> 등이 있다.

동성애 소설로 알려진 <가면의 고백>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을 때 그는 고작 스물네 살이었다. 미시마는 소설 외에도 단편, 에세이, 희극, 시를 썼으며, 작곡, 배우, 감독, 모델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활동했다.

미시마는 일본인 작가로서 해외에 널리 알려져 국제적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독자가 있었고 대표작들은 대부분 영어로 번역됐다. 1965년과 1966년에 각각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노벨상은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에 돌아갔다.

미숙아로 태어나 허약했던 미시마는 격투기를 연마하며 폭력에 집착하였고 무사도에 매료되었다. 만년에 그의 우익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로 치달았고 자위대가 천황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며 쿠데타를 꿈꾸었다.

1969년 동경대에서 극좌학생조직인 전공투와 토론하고 있는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는 1968년 우익 정치단체 ‘다테노카이(楯の会, 방패회)’를 결성하면서 우익 정치활동에 본격 참여했다. 방패회(‘천황의 방패’라는 뜻)는 무장 투쟁 훈련을 하는 민병(民兵) 조직이었는데 이는 이후 일본의 신우익(新右翼)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69년 정치적 우파로 분류되는 자위대 출신인 에토 고사부로(江藤小三郞)가 분신자살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미시마는 1970년 11월 25일, 방패회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를 찾았다. 그는 일본도로 위협하여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을 감금한 뒤, 연설을 했고 할복한 것이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목숨을 버림으로써 일본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이해하고 동조하기를 바랐을 테지만 그의 죽음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그와 함께 할복한 모리타 마사카츠의 동료들을 중심으로 신우익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자민당 정권과 미국의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우익 세력의 한 축이 되었다.

작가의 세계관과 문학, 혹은 그 한계

미시마가 할복할 때 쓴 칼은 그와 검도로 친분을 쌓았던 2차대전 참전 군인으로 전설적인 백병전 전과를 올렸던 후나사카 히로시(舩坂弘 : 1920~2006)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미시마가 죽은 뒤, 이 칼이 돌아오자 후나사카는 그 칼에 ‘자살밖에 못하는 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한심한 작자 같으니라고, 차라리 이 칼로 야쿠자나 베지 그래? 뭣 하러 자살을 하냐?”

뒷날 반전운동가로 변신한 후나사카 히로시는 미시마의 극우적, 파시스트적 행보에 크게 실망했던 것이다. 후나사카는 1981년에는 펠렐리우와 코롤에 존재했던 일본군 위안소의 위치에 대해 증언하는 책을 쓰기도 했다.

금각사(1956)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한 1970년에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뉴스를 직접 보거나 듣기보다는 풍문으로 그의 자살을 전해들은 나는 그가 아주 ‘멋있게’ 죽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그 죽음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일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나는 문고본으로 그의 장편소설 <금각사>를 읽었다. 그러나 지금 그 소설에 관한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주인공이 금각사에 불을 지르는 장면만이 희미하게 남았는데 아마 나는 그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문학적 성취 때문이겠지만 그의 정치적 선택을 이해하거나 납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본에는 유난히 극우적 성향을 보여주는 작가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양의 계절>로 인기를 끌었던 작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1932~ ) 역시 끔찍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인물이지 않은가.

문학은 작가의 사상과 세계관의 집적이라 할 수 있는 바, 미시마 유키오 같은 정치관을 가진 인물이 일본 문단의 내로라하는 작가라는 사실은 혼란스럽다. 하긴 우리나라에도 일부 극우적 성향을 보여주는 작가들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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