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가끔은 우리 모두 '자연인'이 되고 싶다

  • 입력 2017.11.25 13:09
  • 수정 2017.11.25 13:29
  • 기자명 낮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알게 된 것은 아내가 가끔 그걸 즐겨 시청하는 걸 보고서다. 동물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즐겨 보던 아내는 어느 날부턴가 ‘대자연 속 힐링 여정을 담는 자연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나는 자연인이다’(이하 ‘자연인’)에까지 관심을 넓힌 것이었다.

잠깐씩 들여다본 장면으로 미루어 그게 대충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알았지만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쳐 버렸다. 그러나 리모컨을 눌러대다 보면 여러 채널에서 ‘자연인’을 만날 수 있었으니 ‘자연인’은 이미 일정한 시청률을 확보한 듯했다.

ⓒMBN

MBN의 6년 차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

처음 나는 아내의 시청에 동참하는 형식으로 ‘자연인’을 보았다. 내가 스스로 이 프로그램을 찾아서 시청하게 된 건 올 하반기 들어서인 것 같다. 무슨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글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나는 자연인이다'를 시청하면서 나는 뜻밖에 이 프로그램이 꽤 흥미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확인해 보니 ‘나는 자연인이다’는 종편 MBN에서 만들고 매주 수요일 밤 10시에 방영된다. 2012년부터 방송을 시작했으니 6년째, 꽤 장수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우리 집 텔레비전은 JTBC 외의 다른 종편은 채널을 지워 놓아서 나는 ‘자연인’을 다른 채널에서 재방송으로 시청한다.

‘자연인’은 깊은 산, 외딴섬에서 전기와 수도, 가스 같은 도시생활의 이기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MBN

이 프로그램에서 ‘자연인’이란 깊은 산중이나, 외딴 섬에서 전기와 수도, 가스 같은 도시생활의 이기와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물론 그들은 그런 친환경적인 삶을 긍정하면서 불편 속에서도 나름의 안빈낙도를 추구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고매한 사상가가 아닐 뿐 이들의 삶의 태도는 헨리 소로(Henry Thoreau)나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같은 이의 그것과 무어 다르겠는가.

속속들이 사연이 드러나지 않지만 이들은 도시에서의 삶을 버리고 고립적인 삶을 선택한 이들이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가정이 깨어져서 도시를 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픈 몸을 치유하고자 산으로 들어온 이도 있다. 그러나 그게 그들이 자연으로 돌아온 궁극의 이유는 아니다.

자연인, 경쟁적 삶 떠나 욕망을 내려놓은 사람들

정도의 차는 있을지라도 그들은 모두 도시에서의 경쟁적 삶, 오직 세속적 욕망으로 마멸된 자신의 삶을 깨달은 이들이다. 따라서 떠난 도시의 삶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선택한 자연 속에서의 외로운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행복을 편리-불편의 관계로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들의 선택은 최악의 것이다. 이들이 사는 지역은 깊은 산중이거나 외딴 섬, 당연히 그들의 의식주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제법 번듯하게 집을 지은 이도 있지만 대부분 오두막이나 오래된 빈집에서 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재래식 난방과 취사로 일상을 유지해 간다.

이들은 대부분 자급자족의 삶을 지향한다. 대체로 중년을 넘긴 남자들이지만 이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김치는 물론이고 각종 장류를 손수 담가 먹는다. 산나물과 약초도 이들의 식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다. 이들은 때로 동물성 단백질을 얻기 위해서 닭과 같은 가축을 기르기도 한다.

닭은 달걀과 고기를 제공해 주고, 집 지킴이로 기르는 개는 외로운 산중생활의 벗이 되어 준다. 궁하면 통하는 법, 이도 저도 아니면 이들은 단백질을 얻기 위해 개울이나 강에 통발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한다. 어떤 자연인은 저자에서 생선을 사와 처마 밑에 걸어서 말려두었다가 이를 조리하여 단백질을 섭취한다.

속속들이 사연이 드러나지 않지만 자연인들은 도시에서의 삶을 버리고 고립적인 삶을 선택한 이들이다. ⓒMBN

전기와 수도, 가스 같은 이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재래식으로 살아가는 일의 불편은 ‘전원생활’ 같은 낭만적 환상을 간단히 무화해 버린다. 하루해가 유달리 짧은 산중 생활에서 먹고 사는 일은 '유유자적'과는 거리가 멀다. 자급자족을 위해서 하루 종일 몸을 움직여야 하지만 그들은 그런 생활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도시를 떠난 자연 속의 고립된 삶

저마다 사연도 깃들인 곳도 다르지만 출연자들은 ‘자연인’이라 묶을 만한 굵직한 공통점이 있다. 좀 젊거나 좀 나이 먹었고, 사는 규모가 조금씩은 다르지만 이들이 삶을 바라보는 눈높이는 비슷하다. 그들은 모두 세속적 욕망을 벗거나 내려놓았고, 결코 다시 도시의 삶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같은 사람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들의 삶은 번갈아 출연하는 진행자인 개그맨 윤택과 이승윤의 방문으로 소개된다. 출연자의 신변 안전과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이들이 사는 곳은 공개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따로 이들 ‘자연인’을 찾아서 이틀을 묵으면서 말벗이 되어 그들의 삶을 드러내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구실을 한다.

개그맨으로서 지닌 이들의 유머 감각은 첫 만남의 서먹서먹함을 해소해 주고 ‘자연인’들이 편하게 자신의 삶을 드러낼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이들의 구실은 무엇보다도 ‘자연인’의 삶을 긍정하고 때로 격하게 거기 공감하면서 흘리는 눈물을 통해 그 공감을 시청자에게 옮겨주는 일이다.

프로그램을 갓 시작했을 때의 영상은 보지 못했지만 아마 이들 개그맨은 다소간 어정쩡했을 것이다. 생업이라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자연인’들을 ‘별난 사람’ 이상으로 바라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햇수로 6년, 이들은 이제 자연스레 출연자들의 삶을 진실로 이해하고 긍정하려 애쓰는 게 보인다.

자연인이 애잔한 슬픔을 토로할 때, 말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건네주는 낯선 먹거리를 주저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작업에 진심으로 동참하는 이들의 모습은 프로그램에 아주 편안하게 녹아 있다. 출연자들의 삶을 평가하지 않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이들의 모습은 진행자로서 흔치 않은 미덕이다.

진행자는 ‘자연인’의 삶을 긍정하고 때로 격하게 거기 공감하면서 흘리는 눈물로 공감을 시청자에게 옮겨준다. ⓒMBN

어쨌든 ‘나는 자연인이다’는 뉴스 외에는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나를 텔레비전 앞에 불러낼 만큼 흥미로운 프로그램이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은 2016년부터는 닐슨코리아 기준 5% 중반대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JTBC 뉴스룸이 끝난 뒤 자리에 들면 우리 내외는 약속한 듯 채널을 돌려 ‘나는 자연인이다’를 튼다. 나는 밤 9시 이후에 이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채널 두 개를 알고 있다. 한 채널에서 이 프로그램이 끝나 다음 채널로 옮겨가면 거기서도 이 프로그램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내외는 말없이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굳이 말로 그들의 삶에 대한 공감을 나눌 필요가 없어서다. 가끔씩 혼잣말처럼 나누는 이야기는 대체로 그런 것이다.

“저렇게 사는 것도 괜찮겠네.”

“그러게. 그런데 그러고 싶어도 비빌 언덕이 없구먼.”

산나물이나 약초를 캐는 장면에서 화면에 떠오르는 ‘출연자 소유의 산에서 촬영’ 또는 ‘채취’하였다는 자막을 보면서 우리는 문득 지상에 땅 한 평 갖지 못한 우리 처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들의 용기와 결단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

공감하고 부러워하긴 하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에겐 결코 그런 삶을 감행할 용기가 없다는 것을. 설사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 해도 아무나 그런 삶을 결단하지 못한다는 것을. 단지 그들의 삶을 건너다보면서 객쩍은 논평이나 던지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모두란 것을.

‘나는 자연인이다’를 즐겨 시청하는 이들이야 뻔하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에 바빠서 그런 가외의 삶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마음이 젖는 이들은 결국 중장년층일 수밖에 없다. 산과 시골에서의 삶을 겪어본 이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고 고단한 삶을 내려놓은 그 무욕의 삶을 동경하는 것이다.

행복을 편리-불편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이들의 선택은 최악이다. 의식주 모두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MBN

대부분의 중장년들은 이 프로그램을 알고 즐겨보는 듯하다. 아내는 자기 또래의 친구들과 그 남편들도 모두 이 프로그램을 넋을 놓고 시청한다고 했다. 아마 그들도 우리처럼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을 아련한 눈길로 바라볼 것이다.

단순히 세속의 관점에서 본다면 산골 오두막에서 반문명적(?)으로 꾸려가는 자연인의 삶이 동경의 대상이 될 일은 없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원시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그걸 동경하는 것은 무엇으로 해석해야 할까.

부러워하면서 우리는 자기 삶을 바꾸지 못한다

그걸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한 불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 온당치 못하다. 누구나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사는 법이니까. 그런데도 그 원시적 삶을 대안처럼 바라보는 것은 고단하게 지켜온 현재의 삶이 가진 '불완전성'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나는 자연인이다’가 절찬리에 방영되는 것은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며 바라보되 결코 자기 삶을 바꾸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바꾸는 대신 자연인의 삶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얻고 마음으로만 그 몽환의 세계를 오가는 이들 말이다.

주변에 퇴직해 귀촌한 친구들이 적지 않지만 나는 한 번도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정말로 부럽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내 존재 조건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지레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고 말해야 옳다.

그런데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면서 귀촌 생활은 어쩌면 현재의 도시생활과 자연인들의 자연 생활의 가운데쯤에 있는 삶의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좀 소박하게나마 그런 생활을 꿈꾸는 게 영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멋쩍게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사족: 눈치챘겠지만 이 글은 프로그램을 평가하거나 그 완성도를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프로그램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의 삶에 대한 소회를 두서없이 늘어놓았을 뿐이다. 실제 그들의 삶은 포장된 것과는 아주 다를 수도 있다는 것도 밝혀둔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