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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많은 정치 배신자를 기다리는 이유

  • 입력 2017.11.15 13:48
  • 기자명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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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포탈에서 장세동 씨를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의리’가 뜬다. 사람들은 장 씨를 ‘의리의 사나이’로 부르기도 한다. 전두환 등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이에 가담한 그는 5공 시절 청와대 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을 지내면서 당대 최고 실세로 불렸다.

남 다른 충성심을 자랑했던 장세도 ⓒTV조선

1988년 5공 비리 청문회 때 그는 역사의 심판대에 섰다. 그는 청문회장에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차라리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리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의리의 사나이’라는 별명은 이때 생겨났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서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주동이 돼 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 내부의 남로당 관계자 색출, 즉 숙군(肅軍)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얼마 뒤 박정희 소령이 헌병대에 체포됐다. 남로당 가입 혐의였다. 수사과정에서 박정희는 형(박상희) 친구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것이 사실로 확인됐다.

한편 당시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 주도하던 군 지휘부에서 박정희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인품과 능력이 아깝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박정희를 살릴 묘안을 하나 생각해냈다. 박정희로 하여금 군부 내의 남로당 인맥을 폭로케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협조의 대가로 숙군 회오리 속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런 박정희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배신자’라고 부른다.

최근 국정농단사건과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의 적폐청산을 둘러싼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배신자’ 논란이 일고 있다. 그 시작은 최순실 씨의 조카 장시호 씨.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 강요 혐의를 받는 장 씨는 특검 수사 때 혐의를 대부분 인정하고 수사에 협조했다. 그런 장 씨를 두고 ‘특검 도우미’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8일 검찰은 장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의 비교적 낮은 형량을 구형했다)

박근혜 정권 시절 국정원의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을 둘러싼 수사 과정에서도 그런 얘기가 다시 나왔다. 문고리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검찰 조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돈을 건넨 사람으로 지목된 남재준 전 국정원장 역시 “청와대 지시로 매달 5000만 원씩 특수활동비를 전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배신자’의 자백 덕분에 검찰은 이제 청와대로 건너간 돈의 용처를 밝혀내기만 하면 된다.

2012년 대선 당시 국군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공작과 관련해 당시 국방부장관을 지낸 김관진 전 청와대 안보실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했고 또 이 전 대통령이 두 차례에 걸쳐 사이버사 군무원 증원을 직접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 전 실장의 폭로로 검찰 수사는 이제 이 전 대통령에게로 향하고 있다.

최근 광주지역에서는 5.18민주항쟁 관련 재조사를 벌이고 있으나 진상규명에는 애를 먹고 있다. 시위대에게 총을 쏘고 사망자를 암매장한 사실은 분명한데 당사자들의 고백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 발생한 숱한 의혹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양심고백 한 마디면 바로 밝혀질 일이 수십 년째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최근 몇몇 언론 보도와 인터넷 공간에서 전 정권의 비리를 ‘자백’한 사람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자기가 살기 위해 모셨던 상전을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비판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사람은 의리도 중요하다. 그러나 상전의 범죄사실을 실토하면 배신자, 함구하면 의리파라는 이분법식 평가는 옳지 않다.

흔히 정보기관 사람들은 재직 당시의 일을 무덤 속까지 비밀로 가지고 가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흑역사가 어디 한둘이 아니다. 장세동은 의리파가 아니라 역사의 죄인이다. 적폐청산을 위해 더 많은 ‘배신자’의 출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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