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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나쁜' 간호사를 만들고 있나

  • 입력 2017.10.25 13:55
  • 기자명 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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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쫓겨 먹지도, 싸지도 못하는 간호사들

오늘도 간호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병원에 갓 들어간 신규 간호사의 고충이요.

간호학과 졸업 후 병원에 입사하면,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극심한 '역할 변화'를 겪습니다. 빠듯하게 굴러가는 임상 현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덩치가 큰 병원일수록 무수히 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공장에 가깝습니다. 이 공장에선 오직 '톱니바퀴를 속도에 맞춰 제대로 굴리는지'가 중요하지요.

ⓒ모던타임즈

전국의 중환자란 중환자는 모두 모인다는 기업 병원의 종양내과에서 6년 차에 접어든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는 신규 간호사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길 줄도 모르는데 일어나 걸으라 하고, 간신히 걸음마를 떼면 뛰라고 하고, 허덕이며 뛰기 시작하면 날아다니라 하고..."

병원마다 다르겠지만 대형병원 병동에서는 보통 1~2개월 만에 신규 간호사를 독립시킵니다. 일반 회사로 치면 사수 역할을 하는 선임간호사(프리셉터, preceptor)가 끼고 가르치다가 '이제 혼자 하세요'하고 놓아주는(?) 겁니다.

얼마 전까지 학생이었던 사람이 1~2개월 만에 실무에서 제 역할을 해내기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그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체계적인 교육이 이뤄지는 것도 아닙니다. 적은 간호사가 많은 환자를 감당해야 하는 한국에서, 자기 몫으로도 바쁜 프리셉터에게 신규 간호사는 무거운 짐이지요.

태움? 개인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

ⓒSBS스페셜

'태움 문화'('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사용)는 간호사 개인이 사악해서, 당신의 프리셉터가 나쁜 사람이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간호사가 너무도 힘든 환경이어서 그렇습니다.

궁지에 몰렸을 때 나오는 극단적인 행동입니다. 누군가 코를 막고 숨을 못 쉬게 한다면, 아무리 온순한 사람일지라도 폭력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가끔 방송에서 '태움'을 간호사들의 유별난 문화인 것처럼 다룰 때가 있는데, 근본적으로는 개인을 궁지로 모는 열악한 시스템 때문입니다.

그래서 1~2년 차에는 선배 욕을 그렇게 하다가도, 내 밑으로 신규 간호사가 들어오면 사뭇 태도가 달라집니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으로 대해준 선배에게는 '이렇게 힘든데 날 어떻게 가르쳤을까' 존경심마저 듭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데 신규 간호사는 순진한 얼굴로 나만 바라보고, 환자 보호자 응대하랴 신규 간호사에게 설명해주랴 목이 아파옵니다. 먹고 쌀 시간도 없는데 교육이라니! 신규 간호사만큼이나 프리셉터도 엉엉 울고 싶지요.

ⓒSBS스페셜

아직 임상에 있는 친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병원에서 신규 간호사들 면접 볼 때 말이야, 왜 우리 병원에 오고 싶냐고 물어보면 안 돼. 그만두면 안 되는 필사적인 이유가 있는지 물어봐야 해."

간호사가 되고자 하는 이유, 병원에서 날 뽑아야 하는 이유, 어떤 부서에 가고 싶은 이유, 그 어떤 이유보다 우선하는 '그만두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야 오래 다닌다고 합니다. 농반진반이지만 일리가 있습니다. 학자금을 갚아야 한다거나,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거나, 부모님의 기대를 절대 저버릴 수 없다거나, 대형 병원의 타이틀이 간절하게 필요하다거나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계속 다니려면, 퇴사를 막아줄 강력한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그만두고, 계속 뽑고... 돌고 도는 악순환

ⓒSBS스페셜

2016년 7월 31일에 방영된 'SBS 스페셜' <나는 어떻게 나쁜 간호사가 되었나>를 보신 분이라면, 이 모든 걸 감내하고 꼭 임상에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것입니다.

학생 때는 막연하게 '힘들다, 무지 힘들다'는 얘기만 듣다가, 실제 현장을 경험하고 나면 전인적 간호와 백의의 천사는 신기루임을 알게 되지요. 간호사 양성 과정은 우리나라 교육제도와 무척 닮았습니다.

학벌만을 위해 달리는 입시 경쟁에서, 학교 선생님들은 대학만 잘 가라고 합니다. 학생 개인의 삶보다는 상위권 대학으로의 진학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간호학과 교수님들도 '큰 병원에 취업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빅 5’ 병원으로의 취업률이 학과를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만이 정답이고 최선이라고 배운 학생들은 임상에서 좌절합니다. 저를 포함한 대학교 동기 9명이 같은 병원에 입사했는데, 1년 뒤에는 단 한 명만을 남기고 모두 퇴사했습니다. 엄청나지요?

물론 큰 병원에 다녀보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될 수는 있습니다. 입사 동기였던 제 친구는 '떨어지면 임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공무원 시험에 매진해 4개월 만에 합격했습니다. 임상에 대한 공포가 초능력을 부른 케이스입니다. 또는 막상 가봤더니 생각보다 잘 적응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든 후자든 일단 겪어봐야 아는 것이지요.

ⓒSBS스페셜

하지만 많은 간호사가 입사해도 과반수가 그만두고, 버티더라도 언젠가는 또 그만둡니다. 경력자들은 다니면서 퇴사를 준비하고, 전국의 간호학과 학생들은 또다시 대형 병원으로 몰려듭니다. 사회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부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병원의 근로 환경을 개선해야 하지만 방향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인력이 부족해? 그럼 더 많이 배출하자!'하고 간호학과를 증설하고 정원을 늘렸습니다.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간호사가 임상을 떠나고 한국을 탈출하고 있습니다. '간호대란'이라 부르면서도 나라에서는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간호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동단결하여 전국적으로 파업이라도 해야 할까요?

간호사는 왜 희생해야 할까

ⓒSBS스페셜

간호사도 직장인일 뿐입니다. 업무에 필요한 책임감 외에 희생을 강요당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병원을 그만둔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너 그만두면 뭐할 건데?" 협박하더라도 겁먹지 마세요.

많은 사람이 전공과 관계없는 일을 합니다. 간호학과를 나왔다고 해서 모두가 평생 간호사를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안정적인 전문직을 생각하며 간호사가 되지만, 불안정한 멘탈을 부여잡고 사직을 꿈꿉니다.

간호사라는 틀에 자신을 욱여넣지 않았으면 합니다. 학과 공부를 하는 것만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 공부했으면 합니다. 열심히 딴짓하고, 더 많이 그만두고, 더 많이 한국을 떠나고, 더 많이 새로운 걸 하셨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취미를 놓지 마세요. 일 외에 좋아하는 걸 끝까지 하세요.

간호사 출신 개발자, 간호사 출신 사업가, 간호사 출신 소설가, 간호사 출신 기자, 간호사 출신 방송인, 간호사 출신 강사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버티는 거라고도 하지만, 억지로 살기엔 너무 소중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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