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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은 산이의 트로피가 아니다

  • 입력 2017.10.19 14:52
  • 수정 2017.10.19 14:56
  • 기자명 고함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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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가 아이린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혀를 내밀었다. 사전에 계획된 행동이 아니란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깜짝 놀란 아이린이 표정을 굳히다 이내 머쓱히 웃은 것이다. 지난 14일 두 사람이 공동 진행자로 출연한 특집 한국·베트남 수교 25주년 우정 슈퍼쇼>에서의 일이다.

아이린의 팬들은 즉시 분노했다. 트위터에 #산이_사과해 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했고 당시 상황이 담긴 영상과 사진이 함께 공유됐다. 이어 인사이트와 위키트리, 허핑턴포스트 등이 이 사건을 보도하며 논란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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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여성)이 산이(남성)의 트로피?

논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논란의 여지는 없다. 산이의 행동은 잘못됐다. 당사자(아이린)의 동의 없이 신체접촉을 감행했으며 그 신체접촉을 빌미로 그녀가 인사하던 팬들을 조롱했다.

동의 없는 신체접촉이 성희롱의 초기 단계라는 건 이제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건 팬들을 향한 산이의 조롱이다. 그 자신의 아이린 희롱을 매개로 이루어진 조롱이 사건을 더 끔찍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왜 굳이 혀까지 내밀어 가며 팬들을 곯린 걸까. 우리는 거기서 영웅심과 과시욕, 위악 등이 뒤섞인 어떤 심리를 쉽게 읽어낼 수 있다. 말하자면 너네는 이런 거 못 하지?”

이때 산이의 저 혀는 아이린을 이런 거 못 하지이런 거로 전락시킨다. 이는 동등하게 MC로서 앉아있는 아이린을 과시욕의 객체로 만든다는 점에서 우선 문제가 있다. 동시에 그 욕구가 여성을 트로피(보상)화하여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는 남성들의 오랜 호모소셜리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넓은 범위의 젠더폭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문제는 또 있다. 같은 행사에서 산이는 자신의 곡 <못 먹는 감>을 부르며 진행자석으로 와 아이린을 가리키며 노래를 불렀다. <못 먹는 감>은 여성을 음식 감에 비유해 성적 대상화 곡으로 이미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못 먹는 감 가사 중 일부

두 번의 행위를 통해 산이와 아이린 사이엔 모종의 관계가 성립한다. 산이에게 아이린은 자기 노래 가사처럼 못 먹는 감(그러나 먹고 싶은 대상)이거나, 때로는 아무나 못 먹는 감에 손 정도는 올릴 수 있는 연예인으로서의 자신을 과시할 수단이다.

한편으로는 산이의 이러한 행동이 놀랍지 않다. 그는 자주 여성을 동등한 주체가 아닌 혐오나 성적 대상화나 비하의 용도로 자신의 노래에 사용해왔다. [관련기사][킬-조이] 나쁜 년? 산이는 전혀 트렌디하지 않다

산이와 함께 다시 등장한 여성혐오

아이린도 거부 안 했는데 왜 니들이 뭐라 그래?”,

빠순이들 ㅂㄷㅂㄷ 거리네

별게 다 불편하다

누군가는 산이를 비판하는 팬들을 오히려 프로불편러 혹은 과도한 팬심의 빠순이라 지목한다. 여기에도 주목해야 할 이슈가 담긴다. 사건을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하고 비판자들을 오히려 몰아세우는 이 반응들에는 여성 아이돌에게 강요되는 감정노동의 문제와 여성 팬들을 향한 오랜 혐오가 섞여 있다.

우선 아이린이 가만히 있는다고들 하던데 그 자리에서 아이린이 더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아이린이 만약 화라도 냈다면 어떤 반응이 뒤 따라올 것인가? 숱한 여성 연예인을 매질해 왔던 태도 논란이 연상되는 건 나뿐일까?

흔히 여자 아이돌에게웃음은 인성으로 직결된다. 우리는 방송에서 남성 패널들의 농담에 웃지 않거나 SNS에 쓴 댓글이 친절하지 않다며 태도 논란에 휩싸인 연예인들을 많이 봐왔다. 아이린 본인도 이미 태도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라디오스타>에 출연했을 때 잘 웃지 않고 반응도 미적지근하다는 게 이유였다.

▲과거 아이린의 라디오스타 태도 논란

상황이 이런데 여성 아이돌 당사자의 반응을 객관적인 지표로 삼겠다는 의식은 비겁해 보인다. 외려 아이린이 산이의 행동에 반응한 모습은 한국에서 여자 아이돌 가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여자 아이돌에게 웃음과 감정노동을 강요하는 구조에서 그들은 함부로 화를 낼 수 없고 애초에 화를 안 냈다고 해서 해당 상황에 담긴 젠더폭력의 지형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린 팬들을 향한 빠순이라는 용어는 또 어떤가. 빠순이라는 말엔 생각 없고 한심한 여성이라는 함의가 이미 오래전부터 담겨왔다. 잭스키스와 HOT를 거쳐 동방신기나 빅뱅, 최근엔 EXO까지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성들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여학생 시위대의 모습이 잭스키스 빠순이의 민폐 짓으로 조작되어 돌아다닌 건 유명한 사례다.

문제는 그것이 여성에게 한정된 젠더적 양상을 띤다는 점이다. 남성 팬들은 일반화된 비판에서 벗어난다. 팬질이 건강한 취미로 여겨지기도 하고 때때로 삼촌 팬 등의 용어로 미화되기도 했다. 남성 팬들이 안경에 몰래카메라를 달고 팬 사인회에 나타나도 몸매를 평가해도 성적으로 소비해도 역시 한심한 빠돌이라며 남성 팬의 젠더가 드러나는 비난은 없었다.

▲페이스북 댓글 캡쳐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다. 레드벨벳은 여성 아이돌이다. 팬덤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은 구조지만 문제를 제기한 팬 중에 분명 남성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대표하여 조롱하는 말로는 또 빠순이들이 나온다. 애초에 어떤 아이돌을 좋아하는 지보단 팬의 성별 자체가 문제였단 얘기다.

너 안 부러워

산이는 하는데 본인들이 못해서 (화낸다)”란 얘기도 있다. 거기에 아이린이 산이 어깨에 손 올렸으면 반응이 이럴 것이냐라는 식으로 역차별을 주장하기도 한다. 모두 틀렸다.

팬들이 화내는 건 산이가 아이린의 신체를 건드린 것이 부러워서도 지금이 여성 상위시대여서도 아니다. 동의 없는 신체접촉은 기본적으로 무례이며 그 정도와 맥락과 대응에 따라 성희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린을 자신이 획득한 트로피처럼 여겼다는 점 때문이다. 그게 역차별이라고? 아니다. 그 트로피화의 맥락 자체가 여성을 소비하는 이 사회의 세태를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아이린은 산이 어깨에 손을 올린 적이 없다. 이미 일어난 일 앞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굳이 상상하며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건 얼마나 무의미한가.

산이의 반응이 암울하다

대중의 페미니즘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다만 그것이 음악계에 적용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아마 이 비슷한 일도 또 일어날 거다. 여성혐오적인 가사가 나오고 김치녀가 싫다느니 순댓국 먹는 여자는 조금 그렇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나올 것이고 여성 아이돌의 팬 싸인회에 몰카를 들고 오는 사람도 있을 거다.

걸그룹 여자친구 팬싸인회 몰래카메라 사건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수 있다

산이 측의 반응을 보니 미래가 더 암울하다. 스타뉴스에 의하면 소속사는 이번 일에 대하여 영상에서도 보였지만 산이가 아이린에게 크게 문제가 될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근데 그거 당신들이 판단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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