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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손쉽게 하와이를 손에 넣었다
2017-10-04 우에스기


1893년 1월 16일, 호놀룰루(Honolulu) 만에 정박해 있던 무장순양함 보스턴에서 163명의 미 해병과 선원이 상륙했다. 대열을 갖추고 아이올라니(Iolani) 궁을 지나면서 2층 베란다에 서 있는 하와이 여왕에게 경례했다.


이 부대는 개틀링(Gatling) 기관총과 야포까지 갖춰 3곳에 자리 잡았다. 미 영사관 정문에 경비 한 명, 대사관저에 경비 40명을 경배치하고 나머지 병력은 무력시위 후에 몰몬(Mormon) 예배당으로 사용 중이던 아리온(Arion) 홀에 들어갔다. 아이롤라니 궁 바로 반대편이었다.



아이올라니 궁



병사들은 잠을 청했지만, 잠들지 못하고 긴장의 밤을 보냈다. 근처에는 여왕에게 충성하는 수백 명의 하와이인이 무장한 채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하와이장관(대사와 비슷한 직위) 존 스티븐슨(John Stevens)은 여왕이 새 헌법을 인증하면 미국의 재산과 생명이 위험해진다며 무장병력을 불러들였다. 실제로는 쿠데타를 후원했다. 그가 후원하는 13명의 보안위원회(Committee of Safety)는 6년 전에 이미 왕정에 반역을 저질렀었고 여왕이 자신의 사업(사탕수수농장)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



존 스티븐슨



이튿날 보안위원회는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 여왕에게 퇴위를 요구하는 편지를 내밀었다. 여왕은 답장을 썼지만, 보안위원회가 아닌 미국에 모든 권한을 양도한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가 사실을 파악하는 대로 쿠데타를 무산시키고 자신을 다시 복위시킬 것으로 믿었다.


그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3명의 보안위원회



당시 미국은 강대국 대열에 합류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때라 하와이는 더없이 귀중한 전략요충지였다. 그리고 하와이는 서양 탐험가가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종교,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미국화되고 있었다.


1778년 1월 18일, 영국 제임스 쿡(James Cook) 대위가 열대 섬을 처음 발견하고는 샌드위치 공작 존 몬타구(John Montagu)의 호칭을 따서 샌드위치 제도(Sandwich Islands)라고 불렀다. 쿡은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출항선 HMS 레졸루션(Resolution)과 MHS 디스커버리(Discovery)를 몰고 타히티(Tahiti)로 향하던 중이었다.


약 4,350km를 항해하다가 처음 보는 제도를 만났다.

 

섬은 기이한 새와 식물로 가득 찬 정글이었다. 원시적인 관개시설로 곡식에 물을 대고 있었다. 하와이인은 지도자가 죽거나 화산 여신인 펠레(Pele)의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인신 공양을 했다. 남성은 침을 절대로 삼키지 않고 끊임없이 뱉었다. 여성과는 절대로 같이 식사를 하지 않으면서도 의외로 여성이 지도층 위치에 있었다.


사회신분 제도가 엄격하게 자리 잡아 귀족은 평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평민의 그림자가 귀족이나 집에 드리워지면 때려죽이기도 했다.


혈통을 매우 중요시했다. 서양인의 혈통을 받기 위해 영국 선원을 유혹했다가 이와 성병에 걸렸다. 쿡이 섬을 일주하자 수천 척의 카누가 몰려나와 환영했다. 쿡은 하와이 전체 인구를 300,000명 정도로 예측했다.


그는 북동쪽으로 계속 항해하면서 북미의 서부해안을 측정했다. 1779년 2월, 쿡은 하와이에 되돌아왔다가 신의 계시라고 생각한 섬 주민에게 맞아 죽었다. 섬 주민은 인육을 잘라내고 뼈를 모아 종교의식에 사용했다.



 화산 여신 펠레(Pele)



카메하메하(Kamehameha)라는 유명한 전사가 쿡의 기함 레졸루션을 방문하고는 영국 화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물물교환으로 화기를 손에 넣고 선원 2명에게서 사용법을 배웠다. 선원은 그 대가로 높은 직위, 아내와 땅을 얻었다. 하와이 귀족이 서양인을 측근으로 고용하는 계기가 됐다.


카메하메하는 머스킷 총, 이층 카누에 거치한 대포, 미신과 외교로 제도의 경쟁 부족을 모두 제압하고 1810년에 처음으로 하와이를 통일했다.


그 후 60년 동안 카메하메하 왕정은 서양인이 가져오는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819년 카메하메하가 죽자 케오푸올라니(Keopuolani) 왕비가 처음으로 남녀의 혼식을 허용했는데도 펠레는 화를 내지 않았다.


뉴 잉글랜드의 칼뱅파 선교사가 1820년에 주민교육과 함께 본격적인 선교에 나섰다. 하와이어 철자를 만들고 성경을 출간하고 학교를 세웠다. 1834년에는 문맹률 0%로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자랑했다.



카메하메하



하와이 국기도 서양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미국기와 비슷한 배치에 좌측상단에는 영국 유니언 잭(Union Jack)이 자리 잡았다 백, 적, 청색의 수평선은 8개 주요 섬을 상징했다. 1839년, 하와이 최장수 군주인 카메하메하 3세가 권리장전(Declaration of Rights)을 수용했고 1840년에는 의회와 사법부을 규정하는 헌법초안을 만들었다.


어촌이었던 라하이나(Lahaina)와 호놀룰루도 다문화의 큰 도시로 성장해 포경선과 상선 수백 척이 몰려 들었고 선원은 종교인과 마찰을 빚었다. 인플루엔자, 홍역과 다른 질병도 밀려 들었다. 1800년대 중반이 되자 하와이 인구는 질병과 전쟁으로 겨우 80,000명 수준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1890년에는 40,000명 수준으로 멸망 직전에 몰렸다.



하와이 국기



포경과 단향속(Sandalwood) 사업이 침체하자 사업가는 중국, 포르투갈, 일본인을 이민시켜 사탕수수농장에 투입했다. 왕정은 커피와 소고기 등으로 경제를 다각화시키려고 했지만, 여전히 설탕이 압도적이었다.


독일계 미국인 클라우스 스프렉켈스(Claus Spreckels)와 같은 농장소유주는 선박, 철도와 정유소를 사들이고 설치해 사업을 수직화했다. 기업도시를 조성하고 엄청난 양의 물을 사용하며 하와이의 생태계를 크게 바꿨다.


사탕 재벌은 왕정에 자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는 것을 빌미로 자신에게 우호적인 정치인을 의회에 밀어 넣었다.

 

외국 선박이 들리면서 국제분쟁이 자주 벌어졌다. 1843년 2월, 영국 조지 파울렛(Geroge Paulet)은 26문의 프리킷함 HMS 캐리스포트(Carysfort)로 카메하메하 3세를 위협해 사업과 외교이익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는 5개월 동안 하와이를 볼모로 잡았다가 영국 태평양함대(Pacific Station) 사령관이 도착해 카메하메하 3세를 다시 복귀시켰다.


1849년 8월, 프랑스 대표단이 다시 카메하메하 3세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가 거부당하자 프랑스 해병이 호놀룰루 요새를 점령하고 일대를 약탈했다. 하와이에 100,000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조약 때문에 런던은 개입할 수 없었다.


카메하메하 3세는 미국의 조건부 보호를 요청했고 먼로주의(Monroe Doctrine, 구세계와 신세계의 엄격한 분리. 유럽의 북미간섭불가)를 태평양까지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미국신문은 신의 뜻(Manifest Destiny)으로 하와이까지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헌법 개정에 따라 1873년에 루나릴로(Lunalilo)를 왕으로 선출했다. 미혼이었던 왕은 1년 후에 죽었고 카메하메하 4세의 엠마 칼레레오날라니(Emma Kaleleonalani)를 여왕으로 추대했지만, 의회투표에서는 경쟁자 데이비드 칼라카우아(David Kalakaua)가 선출돼 국민투표를 무산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국민이 호놀룰루 의회에 난입했다. 의원 한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선출왕 칼라카우아는 바로 미국 전투범선 투스카로라(Tuscarora)와 포츠머스(Portsmouth), 영국 전투함 테네도스(Tenedos)에게 진압해달라고 요청했다. 해병과 선원은 합동으로 의회와 광장을 장악했고 8일 동안 거리를 순찰했다.


칼라카우아의 17년 통치는 이렇게 강대국에 빚을 진 채로 시작됐고 그 빚은 계속 늘어갔다. 사치스러운 생활로 설탕 재벌에게 돈을 빌렸고 추문이 계속 이어지면서 정적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하와이 최초의 선교사 후손인 로린 써스톤(Lorrin Thurston)은 다른 서양인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을 만들고 칼라카우아를 압박했다. 민병대를 만들어 1887년 7월 6일에 150명의 민병대를 왕궁 근처에 집결시키고 왕에게 ‘총검헌법(Bayonet Constitution)’으로 알려진 헌법에 서명하라고 협박했다.


칼라카우아의 왕위는 인정하되 권한을 입법부와 행정부와 공유하는 헌법이었다. 그는 헌법을 수정하거나 내각을 해산시킬 수 없는 꼭두각시가 됐다. 신임행정장관이 된 써스톤은 부유한 미국인과 유럽인으로 내각을 구성했다.



로린 써스톤



당시 태평양은 강대국의 각축장이었다. 1880년, 프랑스는 타히티를 식민지로 합병했고 독일은 1885년에 마셜군도(Marshall Islands)와 마이크로네시아(Micronesia)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사모아에서 미국과 영국 후원의 파벌과 맞섰다. 일본도 하와이에 접근했지만, 미국인이 경제권을 장악했다.


1872년 해군정보부가 북태평양 최대의 항구인 펄(Pearl) 강 삼각주의 해도를 측정해 함대가 상주하려면 얼마나 준설해야 하는지를 알아냈다. 미국 외교관은 10년 동안 교섭한 끌에 1887년, 항구임차권을 따냈다.

 

1890년, 미 해군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Alfred Thayer Mahan)의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이 출판돼 제국이 해군전력 증강에 나서는 근거가 됐다.


마한은 해안방어와 상선보호 차원에서 벗어나 공격적으로 해상장악을 해야 하며 소함대를 원양전함 함대로 바꾸어 결전에서 가상적국을 압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해군은 증기선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 곳곳에 석탄보급창을 확보해야 했다.


마한의 주장은 확장주의자에게 더없이 감미로운 음악이 됐고 마한에게 명예학위를 선물하며 온갖 찬사를 보냈다. 독일의 빌헬름(Willhelm) 2세는 이 책을 번역해서 독일의 모든 해군도서관에 비치시키고 장교에게 필독할 것을 명령했다.




미 해군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그의 저서는 전 세계 강대국의 해군 필독서가 됐다. 



칼라카우아는 1891년에 사망했고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가 즉위했다. 오빠가 남긴 부채를 낮추기 위해 복권사업을 시작하고 하와이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의 아편수입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다.


그리고 총검헌법도 무력화시켜서 자신의 내각을 구성하려고 했다. 하와이 법학자의 도움을 받아 새 헌법을 만들고 고문의 교정을 기다렸다. 써스톤 무리는 여왕의 움직임을 크게 우려하며 미국을 불러들였다. 이렇게 해서 1893년 1월 12~17일의 결정적인 6일이 시작됐다.



릴리우오칼라니


 

1월 12일 목요일, 릴리우오칼라니는 국회가 내각을 불신임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이제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장관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됐다. 1월 14일 토요일, 그녀는 국회 임기 종료를 선언하고 새 내각을 궁전으로 불러 새 헌법에 발효시키려 했다.


써스톤의 코치를 받은 새 내각은 기존 헌법을 무시하는 결정이라며 서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몹시 화를 내며 논쟁을 벌였지만, 끝내 자신이 무리한 수를 뒀다고 인정했다. 1874년의 유혈사태를 떠올린 그녀는 더 이상 외국 전함과 해병이 개입할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써스톤은 이날 13명의 보안위원회를 구성하고 말을 타고 섬을 돌며 호응을 얻어냈다. 릴리우오칼라니는 16일 월요일 오후에 회의를 소집하고 궁전광장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냉정을 유지해달라고 간청했다. 근처에 있던 13인의 보안위원회도 자체회의를 소집하고 여왕을 비난했다. 스티븐스에게 편지를 보내 개입을 요청했다.


“외부 도움 없이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없으므로 미국정부군의 보호를 간청하는 바이오.”

 

길버트 윌체(Gilbert Wiltse) 대위는 3,240톤의 무장순양함 보스턴과 병력을 이끌고 오후 5시 30분경에 하와이를 점령했다. 릴리우오칼라니는 2배가 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동안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무력동원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뒀다.


써스톤은 밤새 여왕의 폐위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만들어냈고 다른 12명은 하와이 대법원 판사 샌퍼드 돌(Sanford Dole)에게 대통령 취임을 제안했다.


1월 17일 화요일, 돌은 대통령직을 승낙했고 보안위원회는 여왕의 퇴위를 요구했다. 그녀는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장관과 협의해 관련 문서를 작성할 시간을 원했다. 병력을 보내고 임시정부를 지지할 미국에 모든 권한을 넘기기로 했다.


돌은 이 내용을 승인했는데 하와이가 영원히 미국에 합병되는 미래를 알지 못했다. 벤자민 해리슨(Benjamin Harrison) 대통령은 미국의 태평양 확장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3월 4일에 취임한 그로버 클리브랜드(Grover Cleveland)는 왕비의 폐위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하와이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샌퍼드 돌. 합병 후에는 초대총독이 됐다. 



클리브랜드 대통령은 즉시 제임스 블라운트(James Blount) 하원의원을 하와이로 파견하면서 미국 시민과 군대에 대해 전권을 부여했다. 블라운트는 3월 29일에 도착해 정부청사에 게양된 미국기를 내리고 병력은 모두 보스턴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5개월 동안 머물면서 양측에게서 증언과 자료를 모았다. 그중에는 스티븐스의 편지도 있었는데 “하와이 배가 이제 완전히 숙성되었고 미국은 따기만 하면 된다”는 노골적인 내용도 있었다. 블라운트는 마지막 보고서에서 보스턴의 병력이 미국재산을 보호하기보다는 쿠데타를 지원했다고 밝혔다. 클리브랜드는 바로 스티븐스를 해임했다.

 

1893년 11월 중순, 미국 정부는 여왕에게 쿠데타 관련자를 사면하면 미국이 그녀를 복위시키겠다고 제안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13인의 반역죄 처벌을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는 다시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스티븐스를 교체한 앨버트 윌리스(Albert Willis)에게 쿠데타 음모자의 처형을 거듭 재촉했다.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는지 불확실하지만, 미국 언론은 상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2월 18일, 릴리우오칼라니는 클리브랜드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너무 늦었다. 그날 클리브랜드는 이 문제를 의회로 넘기겠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1894년 2월, 상원은 자체 보고서를 공개하며 쿠데타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사면한다고 밝혔다. 릴리우오칼라니는 포함되지 않았다. 5월, 상원은 여왕의 복위에 반대하는 성명을 채택했다. 7월 4일, 임시정부는 하와이공화국과 돌 대통령으로 하와이 왕정 시대를 끝냈다.

 

1895년 1월 6일, 호놀룰루 경찰은 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적발하고 3일 동안의 총격전 끝에 왕당파를 해산시켰다. 릴리우오칼라니 관저를 수색해서 무기와 관련 문서를 압수하고 그녀를 체포했다.


돌 대통령은 정치 문제를 우려해 관련자 모두를 감형시키고 릴리우오칼라니를 2년 가까이 가택 연금하다가 사면했다. 그녀는 석방과 동시에 재산을 모두 저당 잡혀 자금을 모으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지세력을 모으려 했다. 쿠데타세력을 비난하는 자서전을 출간하고 하와이합병에 반대하는 자료를 미상원에 보냈다.


왕당파는 섬을 오가며 하와이합병 서명을 가로챘고 1897년 합병조약은 발효되지 못했다.

 

왕당파는 승리를 축하했지만 1896년 미국 대통령선거로 거대한 변화가 생긴 것을 깨닫지 못했다.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테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와 같은 팽창주의자가 정책을 주도했고 마한의 대양해군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1898년 2월 15일, 쿠바 하바나(Havana) 항에서 미 해군 메인(Maine)이 침몰하면서 왕당파는 최후를 맞이했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발발했고 하와이 합병은 더 이상 선택안이 아니었다. 상원은 7월 4일에 합병 청원을 승인했고 매킨리는 3일 후에 합병 서명했다.


아이올라니 궁 밖에서는 합병축하연이 열렸다. 8월 12일, 양복과 드레스를 입은 하와이인이 기독교예배에 참석했고 순양함 필라델피아(Philadelpia)의 백기를 내렸다. 하와이 왕실군악대와 필라델피아군악대가 하와이국가 하와이 포노이(Hawaii Ponoi)와 미국국가를 연주했다. 그렇게 하와이는 미국에 합병되고 만 것이다.



필자 우에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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