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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일본이 조선어 말살을 위해 벌인 행위들

  • 입력 2017.10.02 13:56
  • 수정 2021.08.30 13:10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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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어학회 회원들. 조선어학회는 1926년 조직된 조선어연구회를 확대 개편한 조직이다.

1942년 10월 1일, 일제는 ‘민족의식을 고양했다’는 죄목으로 한글을 연구하는 조선어학회 소속 학자들을 검거 구속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 1942년 10월 1일부터 이듬해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의 한글 학자들이 검거됐고 증인으로 붙잡혀간 이들도 48명에 이르렀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빌미는 아주 단순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한국말을 하다가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창씨개명, 안정묵)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일제는 이미 1938년 ‘국어 상용화’ 정책으로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고 있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일제의 사상통제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에 이어 1941년 <문장(文章)> 등 한글 잡지도 폐간된 뒤였다. 1941년 12월 하와이의 진주만 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제의 사상통제는 마침내 한글 연구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중일전쟁(1937~45)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벌어진 사상 통제의 일환으로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 이어 1941년에 ‘조선사상범예비구금령’이 공포되면서 일제는 조선에서 일체의 반일사상을 탄압하고 사상범을 감시하고 있었다.

박정옥을 통해 일경은 교사 정태진(1903~1952)으로부터 민족정신을 지키도록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정태진을 추적했다. 그 무렵 조선어학회는 <큰사전> 편찬위원 정태진 등이 엮은 <조선말 큰사전>을 대동출판사에서 인쇄하고 있었다.

일경은 정태진의 배후를 조사하면서 조선어학회가 민족운동 단체라는 억지 자백을 받아냈고 조선어학회의 한글 학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검거와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일제는 또 사전 편찬 원고와 수십만 장의 한글 자료를 압수하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했다.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사한 두 한글학자

사건을 맡은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를 한 사람들, 기타 협력한 33명을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았다.

일제, 조선어학회를 민족운동 단체로 조직

그러나 이 가운데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양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한징, 정열모, 장지영, 장현식 등 16명은 기소, 12명은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기소돼 예심에 회부된 사람들은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됐다. 그러나 고문후유증 등으로 1943년 12월에 이윤재(1888~1943)가, 1944년 2월에는 한징(1886~1944)이 옥중에서 순국했다. 장지영과 정열모가 공소 소멸로 석방돼 최종 기소된 이는 12명이었다.

이들에게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 (함흥지방재판소의 예심종결 결정문)”라 해 ‘치안유지법’의 내란죄가 적용됐다.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까지 9회에 걸쳐 계속된 재판 결과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가 각각 선고됐다.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해방되고 나서야 풀려났던 한글학자들. 이극로는 남북협상 때 북으로 갔다.

실형을 받은 사람 중 정태진은 복역을 마치는 것이 오히려 상고보다 빠르다 해 복역을 마치고 1945년 7월 1일 출옥하였다. 이극로(1893~1978), 최현배(1894~1970), 이희승(1896~1989), 정인승(1897~1986)은 판결에 불복, 바로 상고했으나 같은 해 8월 13일자로 기각됐다. 그러나 이틀 뒤에 해방되면서 8월 17일 이들은 석방됐다.

다수의 3·1 운동 참여자(이윤재)와 대종교 신자(이윤재),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참여자(이극로, 김법린), 신간회(장지영, 안재홍), 대한민국 임시정부(윤병호) 등 각종 민족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모여 있던 조선어학회는 민족주의자들의 ‘소굴’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한글운동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려 한 조선어학회를 주시하던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사건이었다. 1940년대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면서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지식인층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한 대상으로 조선어학회를 선택한 것이었다.

조선어학회, 한글연구의 요람

1921년 조직된 조선어연구회를 확대 개편한 조선어학회는 일제 강점기 한글 연구의 요람이요 본산이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날의 전신인 가갸날(1928)과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제정(1933)했고 ‘조선어 표준어 사정안’(1936)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1940)을 발표해 한글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숙원인 <조선말 큰사전>을 간행을 앞두고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주요 구성원인 한글학자들을 치안유지법으로 엮어 구속함으로써 이 조직을 궤멸시키려 했다. 그러나 3년이 채 되지 않아 일제는 패망했고 조선어학회는 복원됐다.

조선어학회는 1947년에 <조선말 큰사전> 1권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했고 이후 1957년까지 마지막 6권을 펴냄으로써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분단이 되면서 남한의 조선어학회는 1949년 ‘한글학회’로 개편됐다.

▲ 조선어학회(한글학회)가 펴낸 <조선말 큰사전>

▲ 서울 율곡로 3길에 있는 조선어학회 터 표석

주시경의 제자들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를 기반으로 했던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남북의 분단에도 불구하고 남북 언어의 이질성이 커지지 않는 데 이바지했다. 해방 이후 남북의 언어정책을 담당했던 두 한글학자 최현배와 김두봉(1889~1961)은 한글 전용을 주장했던 주시경의 제자로 그의 문법이론과 언어 민족주의를 같이 배웠다. (관련 글: [562돌 한글날] 우리말,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해방 이후 김두봉과 최현배는 각각 북한과 남한에서 언어 정책의 뼈대를 세우고 틀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남북 모두 한글쓰기와 가로쓰기, 형태주의에 입각한 맞춤법 등 언어정책의 기본 골격이 같았으므로 한자의 세계를 한글의 세계로 바꾸는 ‘언어 혁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복역했던 이극로는 1948년 김구의 남북 협상 때 민간 대표로 북으로 가 거기 남아 김두봉과 함께 북한의 어문 정책을 기획하고 특히 ‘문화어 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문화어 운동은 이념적인 요소만 제외하고는 남한의 ‘국어 순화 운동’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비록 해방 이후 민족은 정치적으로 분단됐지만, 대한제국 시기의 주시경과 식민지 시기의 조선어학회가 이룬 활동의 성과는 현재 남한과 북한 공동의 유산으로 계승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분단 70년을 앞두고 정치 군사적 분단이 언어 문화적 분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멈추기 위한 특단의 노력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두산대백과사전>

- 국사 콘텐츠 '조선어학회'

- 고영근, 조선어학회 수난과 민족어 수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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