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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임청각’의 놀라운 역사

  • 입력 2017.08.16 11:40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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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로 국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살림집이다.

오늘 광복절 기념식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안동의 임청각(臨淸閣)과 석주(石州) 이상룡 선생 일가를 언급하면서 임청각에 사람들이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임청각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로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다. 아흔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이 난 모습 그대로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 손녀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임청각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 일제가 집 앞으로 중앙선 철길을 내면서 임청각은 70여 간만 남았다. ⓒ임청각 홈페이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과 임청각 군자정(君子亭)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다. 나는 항일의 땅과 인물이라는 석주 관련 기사를 썼고 임청각의 정자 군자정과 석주의 국적 회복에 대해서도 썼다.

공맹은 나라 되찾은 뒤 읽어도 늦지 않다

군자정은그의 삶과 함께 기억된다

77년만의 귀환-석주 이상룡의 국적 회복

▲ 임청각 석주 일가의 독립운동가 계보도. 임청각 홈페이지 자료를 기초로 재구성했다.

임청각의 사위들도 투사였다

문 대통령이 말한 아홉 분의 독립투사는 석주와 함께 간도 망명을 떠났던 당숙 이승화(이하 괄호는 건국훈장의 종류, 애족장), 아우인 상동(애족장), 봉희(독립장), 조카로 상동의 아들인 운형(애족장), 형국(애국장), 봉희의 아들인 광민(독립장), 친아들 준형(애국장), 친손자 병화(독립장).

그뿐 아니다. 임청각의 사위들 역시 독립투사였다. 조선 말기의 학자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해 안동군내 유림대표로 의병장에 추대된 김도화(애국장) 선생은 석주의 종고조부, 그러니까 고조부의 형제였다. 석주와 함께 만주로 망명해 이주 동포들의 정착을 도왔던 영덕 사람 박경종(애족장)은 그의 매부, 즉 누의의 남편이었다.

만주에서 한족노동당 설립과정에서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상주 사람 강호석(애족장)은 석주의 사위였고 김태동(애국장)은 동생 이상동의 사위였다. 불령선인으로 박해받았던 허국은 아들 준형의 사위, 그러니까 석주의 손녀사위였다. 참고로 불령선인이란 일제 강점기에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임청각 며느리들의 이바지도 눈물겹다

석주 일가의 여인들도 독립운동에 이바지했다. 남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할 때 처절한 심경을 읊은 망명 가사간운사(看雲詞)’를 썼던 석주의 부인 김우락(1854-1933)은 백하 김대락(1845∼1915)의 동생이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던 이 여인은 망명지 중국에서의 간난을 견뎠지만, 남편의 유골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김우락의 여동생 김락(1862~1929, 애족장)은 자정 순국한 유학자 향산 이만도(독립장)의 맏아들인 이중업(애족장)의 부인으로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군경에 체포돼 극심한 고문 끝에 양쪽 눈을 잃었다. 김락은 시아버지, 오빠와 형부, 남편과 두 아들 모두 독립운동으로 잃었다.

▲ 석주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

이상룡과 김우락의 며느리이자 이준형의 아내 이중숙(1875~1944)은 병약한 몸으로 아들과 딸을 데리고 시아버지 이상룡을 모시고 망명해 시어머니 김우락 여사를 도와 독립군들을 지원했던 여인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함께 석주의 유골을 안고 귀국했던 이중숙은 남편이 자결하고 난 뒤 광복을 1년 앞두고 파란 많은 삶을 마감했다.

이준형과 이중숙의 며느리인 허은(1907~1997)은 아들 병화의 부인이다. 허은은 왕산 허위(대한민국장)의 의병투쟁을 도왔던 그의 종질 허발(1872~1955)의 외동딸로 종고모 허길은 이육사의 어머니다.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만주 영안현으로 망명한 허은은 16세 때 이병화와 혼인, 임청각의 종부가 됐다. 그녀의 반평생은 시조부(석주)와 시부(이준형), 그리고 남편의 3대에 걸친 항일투쟁을 뒷바라지한 삶이었다. 귀국 후 만주 생활을 담은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펴냈는데 거기 남긴 통한의 말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독립운동 하는 어른들 뒷바라지하다 귀국하고 보니 나라의 운명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친정도 시가도 양쪽 집안은 거의 몰락하다시피 되어 있었다. 양가 일찍 솔가하여 만주벌판에서 오로지 항일투쟁에만 매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친일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호의호식하며 좋은 학교에서 최신식 공부도 많이 했더라. 그들은 일본, 미국 등에서 외국 유학도 하는 특권을 많이 누렸으니 훌륭하게 성공할 수밖에. 그러나 우리같이 쫓겨 다니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자손들의 교육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오로지 어른들의 독립투쟁, 그것만이 직접 보고 배운 산교육이었다. 목숨을 항상 내놓고 다녔으니 살아있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그 허허벌판 황야에 묻힌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데…… 불모지에 잡초처럼 살았지.”

독립투사들의 어머니와 아내, 며느리가 견뎌야 했던 모진 삶과 세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석주 일가 며느리 3대의 삶은 고단한 이 땅의 근대사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우리의 여성사이기도 했다. 이들 여인의 통한의 삶 앞에서 뒷사람들은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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