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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야, 슈퍼돼지 ‘옥자’를 부탁한다

  • 입력 2017.06.30 17:55
  • 수정 2017.07.17 15:55
  • 기자명 양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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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 후반부 스토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논란의 영화 <옥자>가 6월 29일 드디어 전국 70여 개 극장과 넷플릭스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봉준호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인 <옥자>는 미국 뉴욕의 도축시설로 끌려가는 유전자 조작 슈퍼돼지 옥자를 구출하기 위해 떠난 강원도 산골 마을 소녀 미자의 모험극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감수성으로 찍은 <괴물>이라고 할 정도로 기존 봉준호 영화의 세계관이 집약돼 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미야자키 하야오식 긍정적 판타지에 가깝지만, 공장식 도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겸비해 재미와 의미를 두루 갖췄다.

영화는 크게 한국에서 촬영한 전반부와 뉴욕에서 진행되는 후반부로 나뉜다. 특히, 초반부 수려한 강원도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우정을 쌓는 미자와 옥자의 모습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TV보다는 극장의 대형 스크린으로 볼 때 더 생생하게 다가올 장면이다. 이후 서울 골목과 지하상가, 트럭이 달리는 도로에서 펼쳐지는 긴박감 넘치는 추격전은 뛰어난 완성도로 꽉 찬 느낌을 준다.

뉴욕에서 진행되는 후반부는 한국 촬영분보다 구성이 다소 헐겁지만, 봉준호 감독 특유의 영상미와 예상치 못한 순간 다가오는 감동, 깨알 같은 잔재미가 살아 있어 전반적으로 2시간이 흡족한 제작비 약 600억 원의 웰메이드 영화다.

<옥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이질적인 두 세계의 결합’이다. 영화 시작 전 ‘넷플릭스 오리지널’ 로고가 뜨고 이 콘텐츠를 극장에서 감상하게 되는 순간부터 어색한 동거가 시작된다. 영화를 둘러싼 환경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도 마찬가지다. 봉 감독은 “서로 섞일 수 없는 아주 이질적인 것들을 한 화면에 섞어놓는 것을 좋아한다”고 밝힌 적 있는데 <괴물> <설국열차>가 그 맛보기였다면 <옥자>는 이러한 그의 철학을 극단으로 밀어부친 영화다.

첫째, 영화 외적으로 <옥자>는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결합이다. 정확히는 옛날 극장과 스트리밍 서비스의 결합이다. 넷플릭스가 개봉을 앞두고 주요 일간지에 일제히 실은 신문광고에는 ‘뉴-요크’, ‘특별 써-비스’ 등 옛날 포스터의 홍보 문구를 흉내 낸 단어들이 적혀 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극장들의 보이콧 속에 영화는 전국의 독립 예술극장과 개인극장에서만 개봉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극장이 올드미디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건이 됐다.

둘째, 강원도 산골과 뉴욕의 결합이다. 전혀 다른 세상이 만났다. 동양과 서양, 도시와 시골, 과거와 미래가 뒤죽박죽 섞인 느낌이랄까. 봉준호가 아니면 강원도 산골에서 소주 마시는 제이크 질렌할을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뉴욕에서 틸다 스윈튼과 자매처럼 보이는 무명의 안서현도 마찬가지다. 마치 비밀의 문이 열려 평소엔 오갈 수 없는 두 세계가 연결된 듯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현실이 됐다. 변희봉과 틸다 스윈튼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봉준호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에는 스윈튼과 질렌할뿐만 아니라 폴 다노,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릴리 콜린스, 스티븐 연 등 할리우드 톱배우들이 총출동하는데 폴 다노 정도만 매력적으로 등장할 뿐 다른 배우들은 이렇게 낭비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비중이 크지 않다. 오히려 4대 보험을 안 들어준다며 미란도 그룹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최우식이나 옥자의 똥을 맞고 보디샴푸를 찾는 윤제문이 신스틸러로 더 인상적이다. 배우의 유명세를 따지지 않는 캐스팅의 평등함은 봉준호식 이질성의 결합에 따른 결과물이다.

셋째, 사람과 돼지의 결합이다. 덩치 큰 옥자와 미자가 서로를 안아주는 투 샷은 관객을 행복하게 한다. 특히 미자가 옥자에게 귓속말할 때 모든 사운드가 정지되면서 영화는 신비로운 기운을 내뿜는다. (사실 이 장면은 통역이 필요 없다.)

옥자는 미자에게 친한 자매이자 포근한 엄마 같은 존재다. (미자가 엄마의 무덤 앞에 있다가 옥자의 부재를 알게 되는 장면은 옥자가 미자에게 엄마 역할을 해왔음을 암시한다. 게다가 옥자는 옛날 엄마들의 흔한 이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돼지를 이처럼 인간과 가까운 것을 넘어 아예 가족 구성원으로 그린 영화가 또 있었나 싶다. (<꼬마돼지 베이브> 정도가 떠오르는데 이 영화의 베이브는 애초부터 가족이 아니었다. 양 치는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인간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도시 문명을 거부한 미자는 또래 소녀들과 다르다. 그는 모험을 통해 성장하거나 내면적인 갈등을 겪지 않고 오로지 옥자만을 향해 달려간다. 옥자 역시 마찬가지다. 위기에 처한 동족을 구하러 가는 대신 미자와의 안온한 삶을 택한다. 그래서 이들은 최후의 낙원으로 도피한 연인처럼도 보인다.

많은 관객에게 충격을 안길 영화의 마지막 장면(그래서 미국에선 TV-MA, 17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에서 영화는 공장식 도축을 홀로코스트 학살에 비유한다.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수많은 슈퍼돼지 중 부모로 보이는 한 커플이 새끼를 구하기 위해 보여주는 행동은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빠가 등장하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숭고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삼겹살 생각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시인의 시구처럼 영화 '옥자'는 경계에서 피어난 꽃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세상에 없던 새로운 콘텐츠가 탄생했다.

전혀 다른 것을 섞겠다는 아이디어는 떠올리는 것보다 실행이 더 어렵다. 충실한 기본기가 갖춰지지 않으면 안팎에서 수많은 충돌을 겪으며 실패하기 십상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의 크로스오버, 기업의 컬래버레이션, 자동차의 하이브리드카, IT의 컨버전스, 유통의 숍인숍, 음식의 퓨전요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광 뒤에 숨겨진 초창기 실패의 역사를 떠올려 보라. 경계는 늘 불안하다. 그 불안함이 꽃을 더 강하게 만든다. 경계에 핀 꽃은 실패의 무덤 위에 자라난 결과물이다.

다행히 봉 감독의 마법의 손은 '옥자'라는 다국적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옥자>는 이질성의 결합을 완성도로 승화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끊임없이 충돌시킨다. 그 과정에서 캐릭터를 구축하고 정서적 유대감을 키워 간다. 예를 들어, <옥자> 초반 30분가량의 만듦새는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다. 나무를 캐고 가마솥에 밥을 짓던 변희봉이 산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마이크를 잡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미자는 얼른 귀가해 같이 식사하기 바람”이라고 말할 때 극장은 기분 좋은 웃음바다가 된다. 또 시골 소녀 미자는 박문도(윤제문)의 노트북을 보자마자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외쳐 뜻밖의 유머를 만들어낸다. 두 장면 모두 비문명과 문명이 만난 결합의 순간이다. (이처럼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소품을 활용한 깨알 같은 반전 유머는 <괴물>의 오징어 다리, <살인의 추억>의 수사반장 등 봉준호 감독의 특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앞의 장면을 뒤집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미자는 옥자와 함께 낭떠러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또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옥자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처럼 이질적인 것들이 단순히 만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충돌하고 그 반작용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영화는 추진력을 얻는다. 이를 바탕으로 2시간 내내 질주하는 영화가 바로 <옥자>다.

영화의 만듦새와 별개로 <옥자>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당장 29일 영화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자마자 불법 파일이 유출되며 고비를 맞기도 했다. 경계에서 핀 꽃 옥자가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 사이에서 새로운 영화 문화를 만들어 나아가는 출발 주자가 될 수 있을지, 멀티플렉스 극장을 막 뛰쳐나온 옥자의 모험이 기대된다.

옥자 ★★★★

이질적인 두 세계가 만나다. 당분간 삼겹살은 못 먹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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