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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떨이’마저 모셔지는 박정희 삶과 역사의 평가

  • 입력 2017.06.23 11:11
  • 기자명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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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에 있는 '박정희 역사자료관'에 그의 유품으로 정체불명의 재떨이가 전시될 거라는 한심한 소식을 접하고서 그의 탄생 100년을 맞아 몇 자 적어둔다.

박정희 재떨이 모시는 200억짜리 자료관이라니, 오마이뉴스

올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째 되는 해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선산군 구미읍 상모리에서 몰락한 향반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박성빈은 무능하여 동네에 있던 아내(백남의)의 친정 집안인 수원 백씨의 위토를 빌려 겨우 입에 풀칠했다.

어릴 때부터 박정희는 머리가 좋았다. 구미보통학교(초등학교) 출신 가운데 제1호로 대구사범에 입학했다. 오늘날의 교육대학 격인 사범학교는 당시 가난한 집안의 수재들이 가던 곳으로 이곳을 나오면 10대 후반에 훈도(초등학교 교사)로 임명됐다.

1937년 봄 대구사범 4기로 졸업한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다가 1939년 만주로 가서 군관학교 시험을 봐 이듬해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가 일제에 '멸사봉공'의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를 썼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사 박정희는 한순간에 군인 박정희로 변신했는데 그는 평소 군인을 동경했다. 그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어릴 때 존경하는 인물로 나폴레옹과 이순신을 꼽았다. 박정희가 대통령 재임 시절 현충사 성역화, 광화문 이순신 동상 건립 등을 한 것은 이런 인연에서 비롯한 것이다.

박정희가 만주행에 오른 것은 몇 가지 사정이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출세욕 때문이었다. 그는 가까이 지낸 한 청와대 비서관에게 만주행의 배경을 두고 '긴칼 차고 싶어서'라고 밝힌 바 있다. 신경군관학교에서 예과 2년을 마치고 일본 육사 57기로 편입한 그는 1944년 7월 소위로 임관해 만주군 보병8단에서 근무하다가(1945.7 중위 승진)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듬해 5월 패잔병 몰골로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잠시 소일하다가 뒤늦게 서울로 올라와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로 입교해 다시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견습사관을 마친 후 일본군 상사 복장의 박정희

임관 후 춘천 8연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여기서 친형 박상희(김종필 장인)의 친구이자 당시 남로당 군사 총책이었던 이재복에게 포섭돼 좌익분자로 활동했다. 이 일로 여순사건 후 박정희는 군 방첩대에 붙잡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그의 능력과 인간됨을 높이 산 군 선배들의 도움으로 얼마 뒤 풀려났다. 당시 그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당시 육본 정보국장으로 숙군 총책임자였던 백선엽이었다. 그 후 백선엽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대사, 교통부장관, 국영기업체 사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박정희의 보은 인사라고 할 수 있다.

감옥에서 풀려나 군에 복귀한 뒤에도 그는 좌익전력 꼬리표 때문에 여러 차례 고통을 겪었다. 승진에서 불이익을 겪기도 했으며,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1963년 군복을 벗고 5대 대선에 출마해 윤보선과 맞붙었을 때는 선거 막바지에 소위 '사상논쟁'이 불거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박정희가 대통령 시절 반공을 강조하고 민주인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한 것은 정치적 목적 이외에도 '레드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바도 없지 않다. 그의 삶 전반부는 친일과 좌익전력으로 얼룩져 있다.

그의 18년 집권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실로 다양하다. 보수진영은 경제건설을 앞세워 그를 영웅시 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부정적인 편이다. 장기집권을 위해 철권통치를 하는 과정에서 자행된 무수한 야당 인사 탄압, 각종 조작사건 등 인권탄압은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또 그 시대의 경제성장이라는 것도 속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딴판이다. 오늘날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는 부의 편중과 양극화 현상은 박정희 시절의 재벌 위주 경제정책에서 기인한 바 크다고 하겠다. 겉으로는 평화통일을 부르짖으면서도 북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분단을 고착화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비판 거리 가운데 하나다.

5·16 쿠데타 당일 서울시청 앞에 선 박정희 소장. 왼쪽은 박종규, 오른쪽은 차지철, 둘 다 경호실장을 지냈다.

게다가 최근 그의 딸 박근혜의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그에 대한 평가 역시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 박근혜는 대통령 재임 시절 박정희 미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정교과서 편찬을 통해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역사 왜곡을 시도했고, 구미시와 경상북도에 거액의 혈세를 쏟아부어(무려 1,400억대) 박정희 영웅화 작업을 추진했다. 만약 박근혜가 탄핵으로 쫓겨나지 않았다면 올해 11월 박정희 탄생 100년을 맞아 대대적인 추념 행사를 치렀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계획은 탄핵으로 물거품이 됐다. 어쩌면 이것이 '역사의 정의'인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도 박정희 탄생 100년 기념 우표는 예정대로 발행된다고 한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당장은 권력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크게 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한 때 국부로 추앙받던 이승만의 동상이 4.19혁명 후 민중들에 의해 끌어내려진 후 종로 네거리 길바닥에 질질 끌려다니기도 했던 걸 우리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구미에 있는 박정희 동상이 영구히 서 있을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붓대를 잡은 역사가의 손목은 당장은 권력의 힘으로 꺾을 순 있지만, 영원히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에 이름 석 자를 올린 사람은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 그들의 후손과 후학들도 마찬가지다.

경북 구미에 있는 박정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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