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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홍 잠수사 1주기, 산 자는 여전히 부끄럽다

  • 입력 2017.06.16 19:41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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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죽음에도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그 죽음을 아파하게 될 유족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하기도 하지만 때로 망자의 삶이 환기해 주는 어떤 삶의 진실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때로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선 자리와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확인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실종자 수색에 참여했던 민간 잠수사 김관홍(1973~2016)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2016년 6월 17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아내와 세 아이를 남겨두고 마흔셋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김관홍의 진실과 산 자의 부끄러움

김관홍은 세월호 참사 발생 7일 만에 수중 선체 수색 작업에 합류해 실종자 수색에 참여했다. 그는 바다 밑 48m 세월호 주변, 심야에 10㎝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25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는 2015년 12월,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1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수습 현장의 문제점을 증언했다. 그는 당시 청문회에서 정부 관계자들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계속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시 생각이 다 난다. 잊을 수도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고위 공무원들은 왜 모르고 기억이 안 나나.”

그는 형식적으로는 세월호 참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세월호의 비극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가라앉은 세월호 주변 캄캄한 바다에서 숨져간 아이들을 수습하면서 그가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친다’고 말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 김관홍의 죽음을 추모하는 <경향신문> 김용민 화백의 만평

그는 참사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가슴 아파하고 수색이 잘 이뤄지기를 응원하는 것으로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사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도 전국에서 진도 앞바다로 달려간 다른 잠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김관홍의 부인 김혜연은 남편이 왜 거길 갔냐는 물음에 ‘세 아이의 아빠라서’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그는 잠수사였고, 세 아이의 아비였고,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수색 작업으로 얻은 잠수병 때문에 잠수할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위해 대리운전을 하면서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 온 것도 그래서였다.

(관련 기사: 거길 왜 갔냐고요? 세 아이의 아빠라서요)

“희생자들은 극심한 공포와 낮은 수온과 그리고 수압에 의해서 아주 아주 고통스럽게 사망하셨습니다. 이 얘기는 제가 이 자리를 빌려 처음 말씀드리나 저희 잠수사들이 수중에서 보아 왔던 희생자들은 눈으로 본 게 아니지만 머릿속으로 만져지고 느끼고 냄새로……. 그들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한 구 한 구 엉켜서, 저희 손으로 한 구 한 구 달래 가면서 한 구 한 구 안아서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 김관홍,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의 국민안전처 국정감사(2015년 9월) ‘참고인 증언’ 중에서

잠수사들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한테 하는 것처럼 ‘어머니한테 가야 되지 않느냐. 아버지한테 가야 되지 않느냐’고 달랬을 때야 비로소 시신들의 엉킨 손이 풀렸다고 했다. 바닷속에서 시신을 수습한 잠수사들은 단순히 잠수 기능을 갖춘 전문가이기 이전에 아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아비들이었다.

민간잠수사의 이바지에도 트라우마만 남았다

잠수사들은 자발적으로 모였지만, 목숨을 걸고 수색에 참여해 세월호 희생자 가운데 292구를 수습하고 현장을 떠났다. 이들은 산소 공급 줄 하나에 의지해 위험한 작업을 도맡았지만, 그들의 이바지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도 못한 채 ‘돈 벌러 갔다’는 주변의 오해에 시달렸고 잠수병 등 트라우마를 앓아야 했다.

민간 잠수사 한 명이 잠수 중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검찰은 민간 잠수사 가운데 최선임 잠수사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형사 고발했다. 292명의 시신을 수습해 놓고도 이 잠수사는 1년 4개월간 재판을 받아야 했다. 법원이 그의 무죄를 밝혀 주긴 했지만, 참사 발생 후 7시간 동안 행적을 숨겼던 당시 대통령이나 검찰은 도긴개긴이었다.

“(……)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 아닙니다.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었으면 우리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번밖에 들어가면 안 되는 그 수심에서 많게는 네 번, 다섯 번…. 법리 논리 모릅니다. 제발 상식과 통념에서 판단을 하셔야지, 법리 논리? 저희가 간 게, 양심적으로 간 게 죄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타인한테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됩니다.”


- 김관홍,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의 국민안전처 국정감사(2015년 9월) ‘참고인 증언’ 중에서

세월호는 21세기 한국에서 가장 아픈 이름이고 가장 부끄러운 이름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나라의 국민이 스스로 살길을 찾는 이른바 ‘각자도생’의 교훈을 깨우쳐 주었던 어처구니없는 참사였다.

세월호, 가장 아프고 부끄러운 이름

사고 직후에 나라는 사실상 구조를 포기했다. 사고의 최고 사령탑이어야 했으나 7시간 동안 묘연했던 행방을 끝내 밝히지 않고 마침내 감옥에 갇힌 권력도 자신의 책임을 포기했다. 오직 스스로 참사 현장으로 모여든 민간 잠수사들이 부여받지 않은 사명을 다 했을 뿐이다.

원래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부끄럽다. 물론 아무도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뿐더러 그런 형식의 책임을 져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책임을 우정 생각한다. 그런 게 있기나 할까 싶지만,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스스로가 마음에 새긴 책임 말이다.

▲ 가훈 앞에 선 김관홍의 부인과 아이들. 언제쯤 아이들에게 '살 만한 세상'이 될까 ⓒ한겨레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김관홍의 부인 김혜연이 한 마지막 말이 가슴에 여운으로 남는 까닭도 비슷하다. 불이 난 원룸에서 사람들을 깨워 피신하게 해놓고 정작 자신은 피하지 못하고 희생된 학생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11살 난 김관홍의 딸아이가 제 엄마에게 물었다고 했다.

“아빠도 의인이라고 그러던데, 그게 좋냐고요. 자기는 의인이 되기보다는 가족들이랑 함께 오래 사는 게 더 좋은 것 같다고요.”


- 위 ‘기사’ 중에서

우리는 정말 그런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남편을 보내야 했던 아내의 답변은 현명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너무 포장해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남편이 ‘그냥 있는 그대로, 단순 무식하지만, 정이 많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앞으론… 좋은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인터뷰어의 말을 받은 그의 마무리 발언도 우리를 다시 부끄럽게 만든다.

“좋은 일이 많아질까요? 세상이 이런데… 우리 애들은 좀 살 만한 세상이면 좋겠어요.”


- 위 ‘기사’ 중에서

부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김관홍에게, 지금도 앓고 있는 잠수사들에게, 무엇보다 진도 앞바다 심해에서 가라앉았던 열여덟 소년 소녀들에게 정말 빚이 많다. 가훈 ‘참 향기로운 가족’ 앞에 선 엄마와 세 자녀의 사진 앞에서 더더욱 그렇다.

김관홍의 장례를 앞둔 추모의 밤 행사에서 유경근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협의회 집행위원장은 “국가가 버린 김관홍 잠수사를 이제라도 우리가 함께 지켜내면 좋겠다”고 “4.16가족협의회는 고인이 가시는 길은 물론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늘 함께할 것”이라고 한 까닭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지난해 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열린 고 김관홍 잠수사 추모식 광경 ⓒ오마이뉴스

김관홍이 떠난 뒤 세월호 특위는 강제 종료됐고 박주민 의원이 발의한, 민간 잠수사를 세월호 피해자로 포함하는 내용의 ‘김관홍잠수사법’(세월호참사 피해지원특별법 개정안)은 여전히 상임위에 계류돼 있다.

불행에 대한 슬픔과 연민이 왜곡되지 않는 나라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약속한 ‘나라다운 나라’란 간단하다. 그것은 ‘국민을 버리지 않는 나라’이고, ‘국가가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는 나라’다.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불행과 비극에 대한 슬픔과 연민이 왜곡되지 않는 나라다.

김관홍이 간 지 1년, 박근혜 탄핵에 이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세월호 과제의 극복’을 약속했다. 마흔셋, 세 아이의 아비였기 때문에 진도 앞바다로 갔던 한 잠수사의 1주기가 그나마 서글프지 않은 것은 촛불이 선사해 준 ‘희망’ 때문이다. 거듭 세월호 의인, 고 김관홍 잠수사의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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