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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 미선이 사건'과 대중적 촛불집회의 본격화

  • 입력 2017.06.14 16:37
  • 기자명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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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지난 2002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그해 여름, 한일 월드컵 개최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광화문 네거리를 비롯해 전국, 심지어 해외까지 ‘붉은 악마’들의 응원소리가 넘쳐났다. 연말에 치러진 대선에서는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돼 기염을 토했다. 노무현 당선의 일등공신이랄 수 있는 ‘노사모’라는 정치인 팬클럽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15년 전, 월드컵 열기가 한창 뜨거웠던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경,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에서 불행한 사고가 발생했다. 친구 생일파티에 가던 여중 2학년생 신효순, 심미선 양이 훈련 중이던 미 2사단 44공병대 소속 장갑차에 깔려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고 후 인터넷에 나돈 사고 장면 사진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사건 당시 주한미군 2사단장이었던 러셀 아너레이 중장은 훗날 한 인터뷰에서 “37년간의 군 생활 중 가장 큰 비극으로 각인돼 있고 지옥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참혹한 사고를 당한 효순이(왼쪽)와 미선이 ⓒ민중의소리

이 사건은 폭탄 오발사고 같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장갑차 운전병의 부주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미군 법정은 장갑차 운전병 미군 2명에 대해 무죄 평결을 내렸다. 그러자 국민적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미군 병사를 한국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공무수행 중에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1차적 재판권이 미군 측에 있다는 규정 때문에 이 같은 요구는 관철되지 못했다.

결국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처음에는 사고 현장 인근에서 집회가 열리더니 점차 서울 도심으로, 나중에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당시 나는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시위 관련 뉴스를 연일 데스킹 했다.

11월 하순경 한 네티즌이 촛불집회를 제안하였다. 그 주의 토요일 저녁 무렵, 광화문 KT 건물 앞에서 몇 사람이 모였는데 당일 나는 집회현장엘 나가보았다. 한 청년이 화단에 올라서서는 자신이 촛불집회를 제안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날이 11월 30일이었는데 이것이 대중 집회 차원의 첫 촛불집회라고 할 수 있다.

그날을 시작으로 거의 매주 광화문 네거리에서 효순.미선이 추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추모집회는 점차 전국으로 번져갔고, 집회 현장에는 촛불이 늘 등장했다. 이후 촛불은 평화적 집회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됐고, 지난해에는 광화문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로 뜨겁게 타올랐다.

효순.미선이 사건이 발생한지 15년이 지났지만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SOFA 역시 자구 하나 손보지 못한 채 그대로다. 당시 중2 여학생이던 두 사람이 살아 있다면 지금은 서른 살의 숙녀가 되었을 것이다. 15주기인 금년 9월에야 겨우 추모공원이 들어선다고 한다.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스러진 두 꽃다운 청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 변에 건립된 '효순이미선이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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