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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에는 우리와 일본만 아는 비밀이 있다

  • 입력 2017.06.13 14:03
  • 수정 2020.11.05 09:31
  • 기자명 백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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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 섬

하시마 섬으로 들어가는 배 안에서 가이드는 여행객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자극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맑은 날에도, 이 섬은 쉽게 들어가지 못한대요. 갑자기 이 근처만 다다르면 파도가 세진다나? 아무래도 강제 징용된 우리 선조들의 분노한 영혼이 서려서 그런 걸까요?”

보통 이런 자연현상은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뻔하고 지루한 인과관계를 싫어한다. 하시마 섬 근처의 성난 파도를 두고, 조류가 어떻고 하는 말이 덧붙여졌다면 누가 그 설명을 귀담아들었을까. 굳이 비행기를 타고 이 작고 초라한 섬까지 찾아온 이유가 그저 새까만 폐 콘크리트 건물을 보고자 함은 아니었다.

“이 섬에서,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하루에 12시간씩 일했습니다. 일하다 죽고, 도망치다 죽고, 스스로 죽고. 섬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작은 배의 모터 소리를 뚫고 나온 가이드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지금으로 치면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 버스를 타고 2시간,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30분가량 걸리는 이곳까지 끌려와서 주린 배를 움켜잡고는 덥고 습한 탄광에서 기약 없는 노예생활을 해야 했던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배가 하시마 섬을 맴도는 내내 눈앞에 그려졌다.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고 와 지하로 처박은 덕택에, 물이 귀한 섬에서 메마른 콘크리트 건물 꼭대기에 수영장까지 설치하는 호사를 누렸을 사람들의 웃음도 같이 떠올랐다.

결국, 하시마 섬에 들어가지 못했다. 딱히 아쉬울 건 없었다. 보고자 할 것은 다 보았다. 어떤 사건은 우리가 기억을 공유하고 전수함으로써 비로소 역사로 확정된다. 80년 전, 이 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이곳을 방문했던 우리 모두가 기억한다.

세계 7대 소름 돋는 장소, 군함도

2012년 CNN은 세계 7대 소름 돋는 장소 중 하나로 군함도를 꼽았다. 외신의 눈에 들어온 이 유령 섬은 단지 인적이 끊겨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불과했을 거다. 그러나 이 섬에는 우리와 일본만 아는 비밀이 있다. 이 섬이 ‘소름 돋는 장소’인 진짜 이유는, 우거진 수풀 사이에 흉물스럽게 나신을 드러내고 있는 콘크리트 때문이 아니다.

하시마 섬은 1810년 처음 석탄이 발견됐고 1890년 미쓰비시사에 채굴권이 부여돼 본격적인 ‘석탄 섬’으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채굴량이 증가하자 사람들이 유입됐고 1916년에는 이 좁은 섬에 5,3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게 됐다. 도쿄의 9배나 되는 인구밀도였다.

높은 임금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된 노동을 피할 해법은 식민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돈으로 조선 사람들을 유인했다. 하지만 식민지를 향한 제국의 호의는 오래 가지 못했다. 무리하게 태평양 전쟁을 벌인 뒤 다급해진 일본은, 부족한 군수물자를 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조선 사람을 끌어다 하시마의 막장으로 처박았다.

전쟁을 핑계로 수심을 드러낸 일본은 걷잡을 게 없었다. 강제징용한 조선인에게 헬멧과 속옷만 입힌 채로 지하 1,000m의 갱으로 내려보냈다. 끌려간 노동자들은 길게는 16시간을 갱에서 버텼다. 처음에는 주먹밥이 손에 쥐어졌지만, 나중엔 이조차도 지급되지 않았다. 비료로 쓰이는 콩 찌꺼기를 먹으며 하루하루 버텼다. 지친 기색을 보이면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도망치는 이들도 허다했지만, 뭍으로 가기까지는 10km, 몸이 상할 대로 상한 노동자들이 거센 파도를 이기고 탈출에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가까스로 도망에 성공해도 그곳은 일본 본토였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희망이 아닌 차가운 총구였다.

하시마 섬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800여 명, 그중 사망한 사람은 134명으로 추정된다. 일본이 은폐하거나 미처 찾지 못한 사망자가 얼마나 더 될지는 알 수 없다. 수많은 조선인을 묻고 그들의 피를 거름 삼아 캐낸 석탄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2001년부터 그들만 자랑스러워하는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하시마 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고 2015년에 확정됐다.

하지만 그들이 기념하는 역사에는 끌려간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나 지옥 같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노동자의 이야기는 한 줄도 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산업화의 훈장, 하시마 섬의 민낯을 기록하기 위한 투쟁은 여전하다.

사라진 책임자들, 외롭게 남은 사람들

“일본이 뭐라는지 압니까? 자원해서 갔대요. 우리 노동자들이. 일단 들어가면 살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평생 상흔과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거길 누가 자원해서 갑니까?”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던 시절에 일어났던 많은 일이 그러하듯 일본은 이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서도 ‘자발적’이란 말로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책임을 면하려고 했다.

다행히도 2015년, 군함도가 유네스코에 등재되기 직전 한국과 일본은 이 강제징용과 관련해 극적으로 타협했고 강제노역을 시사하는 문구가 추가되긴 했다. “강제징용 된 노동자들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were brought against their will and forced to work under harsh conditions). 하지만 여기에는 강제징용 당사자에 대한 배상은 빠져있었다.

여기에 대한 책임은 한국 정부의 미온적 태도도 한몫한다고 한다. 이국언 근로정신대 대책 시민모임 상임대표는 작년 평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정부가 스스로 피해자들을 내팽개치는 것을 앞장서는 상황에서 미쓰비시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쓰비시는 중국 측에 화해안을 제시하고 1인당 10만 위안(1,800만 원)가량을 배상하기로 합의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국내 법원이 미쓰비시에 직접 배상을 명령하기는 했다. 지난 8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7부는 고 홍모 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14명과 그 가족 등 총 64명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해자 14명에게 각각 9,000만 원씩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하지만 동종의 판결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라는 점에서, 판결이 확정된다고 해도 미쓰비시에 배상을 강제하기는 사실상 힘들다는 점에서 실제 배상까지는 요원해 보인다.

제국의 식민국민, 제국의 노동자

하시마 섬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각자가 갖는 의미는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본에 수모를 당한 우리의 역사가 분해서, 어떤 사람은 탄광에서 ‘살고 싶다’고 읊조렸던 노동자의 삶이 애달파서 화를 내거나 눈물을 훔치거나 할 것이다.

어느 것도 거짓은 아니다. 식민지 국민으로서 제국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 여러 가지 ‘합법적’ 명분을 통해 가능한 한 최대로 착취당해야 했던 노동자. 어떤 것도 하시마 섬에 끌려간 노동자를 설명할 때 빼놓아선 안 된다.

2박 3일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나는 내내 창밖에 머리를 기대며 ‘조선인’과 ‘노동자’의 묘한 교집합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교집합의 반대편에는 각각 ‘제국’과 ‘자본’이 있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 둘은 크게 분리되지 않은 채 비슷한 모양으로 늘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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