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친문은 왜 분노했나

  • 입력 2017.05.19 10:53
  • 기자명 임예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진보언론과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 사이의 충돌이 예상보다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은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등 ‘한경오’로 지칭되는 진보 언론이 노무현 정부 때부터 반노 경향의 논조로 노무현 정부의 실패, 나아가 노무현의 죽음에까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지자들은 영부인 김정숙 씨를 ‘김정숙 씨’라 지칭했다는 점이나, 기사 제목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라 칭하면서 문 대통령은 ‘문’이라고 칭한 점, 한겨레21이 대선기간 중 유력 후보였던 문재인 당시 민주당 후보를 표지모델로 쓰지 않았던 점 등이 진보 언론이 허니문 기간에조차 문재인을 홀대하는 증거라고 지목합니다.

노무현 정부는 지역주의나 권위주의, 검찰, 언론 정책 등에 있어 개혁적인 면을 보였으나, 노동 정책 등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인 면을 보였고 FTA를 추진하는 등 시장과 개방을 중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초기 유했던 진보언론과의 관계는 급속히 경색되었는데, 특히 노동정책이나 개방정책은 당시 진보계층의 역린과도 같았죠.

노무현 퇴임 이후 서거에 이른 국면에서 검찰과 국정원은 빨대처럼 피의사실을 언론에 흘렸고, 개중에는 ‘논두렁 시계’와 같이 악의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사실 보수언론 뿐 아니라 진보언론도 마찬가지였고, 소위 ‘친노’ 성향 지지자들의 언론에 대한 반감 또한 맥락상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지지자들의 눈으로 보자면, 언론이 까다 까다 심지어는 죽음에까지 몰아간 셈이니까요.

친문의 분노

하지만 아무리 노무현의 친구, 마지막 비서실장이 대통령으로 다시 청와대에 돌아왔다 해도 – 지지자들이 선제적으로 진보언론을 타격하는 건 의아한 데가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잘 하고 있고, 언론과의 허니문도 큰 이상이 없습니다. 갑자기 십 년 전 노무현 정부 시절의 언론과의 긴장관계를 상기해, 언론 길들이기에 나설 이유가 마땅찮습니다. 심지어 악의적인 보도를 일삼은 조중동 등 보수언론도 아니고, 진보언론을 상대로요.

몇 가지, 두드러지게 보이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일부 팟캐스트를 위시한 극단적인 지지자들의 선동 같은 것이죠. 하지만 뭔가 불충분합니다. 어느 정치인 지지자들이든간에 – 자유당이든, 민주당이든, 정의당이든 – 극단적인 그룹은 있고, 그들의 목소리가 꽤 힘을 얻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런 극단적인 목소리가 힘을 얻고 상당수의 문재인 지지자들 가운데 공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 걸리는 지점이 있긴 합니다. 두괄식으로 얘기하자면, 사실 문재인 지지자들의 분노는 십 년 전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보다, 바로 지금의 문재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문재인이 언론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이 노무현을 역으로 상기시킨 것이죠. 따라서 – 사실 십 년 전 언론이 노무현에게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맥락을 상기시킨들 이 분노는 가라앉지 않을 겁니다.

친문패권주의

문재인은 2012 대선 때 본격적으로 정계에 호출되었죠. 안철수와의 후보단일화 과정부터 계속해서 문재인을 괴롭힌 단어가 하나 있었습니다. 한때는 친노패권주의라 불렸고, 지금까지도 친문패권주의라 칭하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모호합니다. 2012 대선 후보 단일화 논의 때 문재인이 패권적인 행태를 보였다기엔 안철수 측의 억지도 결코 덜하지 않았고, 결국 선대위를 맡았던 이해찬은 물러나기도 했죠. 당시 민주당 의원이 안철수 측으로 탈당하며 쏠린 동정표가 오히려 문재인에게 도움이 되었을 정도였구요. 패권주의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국이었습니다.

문재인이 실제 당대표로서 권한을 쥐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자들은 당시 만들어진 시스템 공천을 문재인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꼽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공동지도체제는 패권주의란 말과 어울리지 않고, 혁신위 활동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돌아갔죠. 오히려 자체적인 혁신안과 혁신전당대회를 밀었던 반문 측의 행보가 패권이란 말의 정의에 더 잘 어울릴 겁니다.

친문패권주의는 정치권만의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언론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는 사람들은 안다고 합니다. 문재인을 둘러싼 구 운동권 정치인들의 뺄셈의 정치를 지칭한다고도 하고, 지지자들의 광적인 행태를 제지하지 않는 것이 친문패권주의를 증명한다고도 하죠.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실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친문패권주의와 그에서 비롯되는 소위 ‘확장력 낮은’ 문재인의 한계, 문재인 지지율의 이른바 ‘박스권’ 문제가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개념이 호출됩니다.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를 언론의 ‘프레임’이라고 보았습니다.

프레임

언론이 ‘친문패권’이라는 프레임을 설정해놓고 일어나는 사건을 거기에 끼워맞추고 있다는 것이죠. ‘친문’과 ‘반문’이라는 프레임, 안희정과 이재명은 ‘반문’이라는 프레임, 문재인은 ‘박스권’이라는 프레임, 문재인은 ‘확장력이 낮다’는 프레임, 대선은 문재인 대 안철수의 ‘양자구도’라는 프레임…

프레임이라는 용어가 무분별해보일 정도로 계속해서 소환됐습니다. 지지자들은 언론이 설정한 이 단어들을 불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갖기 시작한 불신은 반지성주의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친문패권주의는 실체가 모호했고, 소위 식자들은 ‘아는 사람들은 뻔히 아는 문제’라 말할 뿐 이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패권적인 행태는 좀 있었을지 몰라도 친문패권주의란 없다’는 더 모호한 얘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경마식 저널리즘

대선 레이스가 본궤도에 접어들며 갑작스런 안철수의 부상으로 언론은 안철수에 대해 긍정적 또는 중립적인 뉘앙스의 보도를 양산했습니다. 어떤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것이 안철수를 문재인의 대항마로 키우기 위한 언론의 조직적인 공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주장에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긴 해 버렸죠.

언론은 네거티브 선거를 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정당 간의 네거티브 공세를 계속해서 받아썼습니다. 문준용 씨의 채용 문제는 새로운 정황이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음에도, 정당의 네거티브 전략에 동원되면서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만큼이나 반복적으로 지면을 장식했습니다. 팩트 체크가 시도되긴 했지만 언론마다 참과 거짓이 갈릴 정도로, 팩트 체크 자체의 신뢰도가 낮았습니다.

스탠딩 무규칙 자유토론을 내세운 TV 토론은 형편없었습니다. 사실상 문재인 검증 쇼가 되어버린 토론회를 보며 언론은 유승민과 심상정을 계속해서 토론의 승자로 꼽았죠. 애당초 지지층이 약했기도 했지만, 두 후보는 실제 본선에서 가장 낮은 순위에 자리했습니다. 놀라운 것 하나는, 언론이 한 목소리로 토론회의 승자로 꼽아 마지않는 두 후보가, 실제로 어떤 정책을 추진할 것인지 – TV 토론만 봐서는 통 알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언론은, 정책 위주 선거가 되어야 한다며 준엄한 심판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동시에 경마식 저널리즘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언론 또한 지면을 팔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문재인 지지자들의 언론 불신은 이때부터 이미 폭발하고 있었습니다.

진보와의 선긋기

이 지지층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진보와의 선긋기를 대단히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즈엉이당’은 바른정당보다도 협치 파트너로서 논의할 가치가 없는 집단입니다. 몇몇 네임드 정치인들 외에는 실제 정책을 추진할 인력풀 자체가 매우 부족하고, 선전 구호만 요란할 뿐 이를 실현할 디테일은 날아가 있다고 보죠. 이는 사회 부조리에 그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저항했던 그들을 ‘입진보’라는 역설적인 별명으로 부르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진보를 ‘나중에’ 지지해야 하는 까닭은, 이번만은 양보해달라는 양보론, 차악론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진보가 ‘지금’ 무언가를 할 실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언론을 불신하면서 특히 한경오를 적대하는 까닭 또한 이런 맥락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문재인이 최저임금 만 원 공약을 포기한다면, 혹 정말 2020년에 가능할 정도로 저돌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한경오는 가장 첨단에서 이 문제를 타격할 겁니다.

그로부터 미리 방벽을 치자면, 선을 그어놓아야 합니다.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오글거리는 문구는 문재인이 내린 최선의 전략적 판단이 한경오 등 진보 엘리트의 융단폭격에 추진력을 잃고 좌초하는 걸 막아야 한다는, 지지자들 나름의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이건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모두 어차피 보수주의 정당이라는, 도긴개긴론의 반대쪽 얼굴일런지도 모르죠.

반지성주의

이 반(反) 진보언론 운동은 반지성주의처럼 보이면서도, 트럼프 당선 등을 초래한 반지성주의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민주당이라는 오래된 정당 시스템을 신뢰하고 급진적이거나 사회 갈등을 초래하는 변화에 거부감을 갖고 있죠. 예를 들어 이들은 성소수자를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기습 난입 시위는 잘못되었다고 보며, 홍준표와 같은 극단적인 목소리부터 먼저 가라앉혀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일단 민주파의 표를 최대한 끌어모으는 게 중요하다고 소위 전략적 판단을 중시하죠.

물론, 그렇습니다. 이상한 선동 또한 횡행합니다. 무슨무슨 팟캐스트 같은 것들 말이죠. 그들은 일방적으로 노무현 정부에 유리하게 쓰여진 맥락을 통찰이라 부릅니다. 제목 글자수가 어떻게 정해지는지 뻔히 알면서 십 년이 지난 불완전한 기억 속에 노무현은 마치 영화의 광해처럼 희생당한 성군으로 자리매김해 있습니다. 이를 한심하다 생각하고, 문빠라 조롱하고,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없는 양비론이지만, 저는 언론이 저질 ‘문빠’와 맞선 투사 노릇을 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의 역할은 불완전합니다. 언론이 적잖이 받아쓰던 어떤 정치평론가는 문재인 당선 이후 강의에서 노골적으로 문재인을 까내리다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죠. 우리는 그들보다 이성적이라며 임전태세를 갖추기보다, 무엇이 이토록 깊은 불신을 낳았는지를 성찰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엉뚱하게도 ‘씨’ 논란이나 ‘대통령’ 칭호 논란으로 터져나왔지만, 사실 이건 문제의 진짜 핵심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일정한 맥락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부인을 ‘씨’라고 지칭하거나 문재인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진보언론이 내심 그들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고 있기에 진보 언론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우습게도 진보언론은 최소한 보수언론에 비해서는 그런 의심에서 가장 자유로워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도 또한 없을 것 같습니다.

언론은 정말 불편부당했는가, 혹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했는가. 전 불특정 다수의 ‘지지자’들을 비난하기보다, 공적인 책무를 맡고 있는 언론의 자성을 먼저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 언론 종사자들이 SNS 등을 통해 ‘문빠’ 등 폄하하는 말을 동원하여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 또한 하고 있습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