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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민과 좋은 사장님

  • 입력 2017.05.11 16:10
  • 수정 2017.05.11 16:33
  • 기자명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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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픽션도 현실의 드라마를 이길 수 없구나 싶을 때가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알려지는 과정도 그랬다.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라는 역사를 만든 물건 태블릿 PC. 작은 기기 하나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남을 장면을 만들어낼 거라 짐작한 사람이 있었을까. 대선이 끝난 후 한겨레 김의겸 기자는 정권교체의 숨은 의인이라는 제목으로 긴 글을 썼다. 태블릿 PC를 방송사 기자에게 건넨 청담동 4층짜리 건물의 관리인 노광일씨. 그간 인터뷰이 보호를 위해 말하지 못했던 사연이다.


노광일 씨가 열어준 더블루케이 사무실 문 한겨레

한겨레: 최순실 게이트-탄핵-정권교체 ‘숨은 의인’ 입열다

만일 그가 더블루K가 입주한 건물의 관리인이 아니었다면,

만일 그가 손석희와 진보언론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만일 그가 한겨레 창간독자에 경향신문 배가운동을 했던 언론개혁 지지자가 아니었다면...

이 드라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작은 우연들이 필연처럼 만나 결국 역사가 되고 운명이 된다.

이 기사가 나오자 많은 독자들이 감동했다. 울컥했다는 사람도 많았다. 60세의 노인, 140만원을 받는 부자 동네의 가난한 경비원. 그 월급에서 10만원을 덜어 언론개혁과 민주주의를 위해 기부하는 삶. 정사가 기록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영웅의 위대함에 대한 찬사는 그 자체로 충분히 감동이다.

나의 언론인 친구는 그가 손석희를 믿었기 때문에 JTBC에 줬다는 대목에 주목했고, 또 다른 친구는 이를 기록한 기자에 주목했다. 관전 포인트는 달라도 이 사안의 드라마틱함에는 모두 충분히 감탄하고 감동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좋은 시민좋은 사장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바로 이 대목 때문이다.

-건물 주인은?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다음날 건물주인 사장님에게 사실대로 얘기했다. 제가 태블릿 피시 가져가는 데 협조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임차인과의 법적인 문제도 제가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더니 사장님이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큰일 했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열심히 근무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눈물 나게 고마웠다.”

-한 달에 봉급을 얼마나 받는데 10만원씩 내나?

4대 보험 해주고 한 달에 140만원씩 받는다. 명절이면 조금 더 챙겨주신다.”

60세 노인. 140만 원. 중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해서 40년 넘게 쉬지 않고 일한 경비노동자의 월급이다. 건물주인 사장님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인터뷰에서 그가 밝혔듯 사장님은 그의 행동을큰 일 했다고 지지해준 분이고, 해고를 각오했는데 오히려 격려를 해 준 고마운 분이다. 당사자가 눈물 나게 고맙다고 한 분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글을 읽으면서 그를 해고하지 않은 사장님이 나도 고마웠다.

2011년 한진중공업으로 향하는 희망버스를 탔다. 평범한 시민들을 많이 만나 인터뷰를 했다. 노동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든지, 막연하게만 지지하다가 이번에는 남 일 같지 않아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 중에는 정규직 귀족노조에 대해 소리 높여 비난하는 분도 있었고, 비정규직 해고 문제에 나서지 않는다며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를 욕하는 분도 있었다.

내가 조심스레 한진중공업도 쌍차도 정규직 노조인데요, 금속노조랑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투쟁기금으로 수십억을 썼는데요... 방어하듯 말하면 묘한 표정을 짓곤 했다.

전주에서 왔다는 편의점 사장님은 귀족노조 욕을 엄청 하셨다. 알바한테 가게를 맡기고 왔다고 했다. 나는 힘들어도 우리 알바한테 최저임금도 꼬박꼬박 챙겨주는 좋은 사장인데,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비정규직이 고통 받는데 금속노조는 뭐하고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최저임금조차 안 주는 사장들이 많아서 그거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장이라는 건지, 이 분의 기준에서 최저임금을 지키는 게 고용자로서 최상이라는 건지 묻지 않았다. 그 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든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멀리 부산까지 달려와 준 게 고마웠다.

최저임금은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 규율이다. 그걸 지킨다고 해서 곧 좋은 사장이 되는 건 아니다. 또 규율이 존재하는 것과 그 수준이 적절한가는 다른 문제다. 지금 한국의 최저임금은 너무 적어서 계속 문제다. 이번 대선에서는최저임금 1만원 시대공약이 많이 나오기도 했다. 영세한 자영업자들한테는 최저임금 문제가 생존을 위협하는 사안이어서 민감하다.

만일 희망버스를 탄 편의점 사장님이 자신이 지지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만 원을 주장한다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는 비정규직을 고용하고 당연한 최저임금을 주면서 노동운동 진영의 비정규직 대처를 비난한다. 그들에게 더 많은 임금과 좋은 일자리를 주기 위해 정규직 귀족노조가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민주시민으로서 희망버스를 탄 자신의 실천력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지만, 당장 자신이 고용하고 있는 알바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방법은 고려하지 않은 듯 하다. (비난의 의미가 아니다)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좋은 사람일 수 있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 같은 이념과 지향을 갖지 않았어도 민주주의를 위해 나선촛불시민으로 부를 수 있듯, 큰 사안에 대해 동의하고 행동하는 건 가능하다. 그런데 그게 정작 나의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까지 살펴보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40년 넘게 일한 60세 노동자는 은퇴하고 편안한 노후를 즐기는 세상이면 좋겠다. 혹은 경비 일을 하더라도 아직 은퇴하기에는 아까운 나이라 소일하듯 그 노동을 즐기는 세상이어도 좋겠다.

하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할 60세의 노동자가 한 달에 140만 원을 받는 세상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도시노동자의 평균생활임금에 못 미치는 심각한 저임금. 그 안에서 좋은 세상을 위해 또 10만원을 떼서 기부하는 노동자와, 그를 지지해 준 사장님의 시민정신에는 충분히 감동할 일이지만 이건 뭔가 잘못된 세상이다.

결국 시스템의 문제다. 좋은 시민과 좋은 사장님은 양립 가능하다. 적절한 임금과 양질의 일자리를 보장하도록 해야 하고, 고용주들에게도 경제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한 의무임을 말해줘야 한다. 서로 박탈감 없이, 갈등하지 않고도 좋은 시민이면서 좋은 사장님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당신과 나는 다른 처지에 있지만 이 문제에서 우리는 같은 의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한 발만 더 들어가 보면 우리의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언론을 개혁해서 노동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보도를 듣고, 내가 가진 편견과 현실을 성찰 해 볼 기회를 갖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입체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될 거다.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 그리고 좋은 시민으로서 의무가 허공에 떠다니는 지당한 말이 아닌 세상.

내 삶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정권교체의 숨은 의인들이 만들고 싶은 세상일 거라고 혼자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이 기적같은 드라마에 충분히 감동하면서도 이 다음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이 계속 머리끝을 잡아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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