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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 주장처럼 ‘태화관’은 룸살롱이었을까?

  • 입력 2017.03.17 10:50
  • 수정 2017.03.17 11:30
  • 기자명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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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 씨가 한 강의에서 독립선언을 한 태화관을 ‘룸살롱’이라고 표현해 논란이 됐다. ⓒSBS뉴스 캡처

한국사 유명 강사인 설민석 씨가 3.1 운동 당시 태화관 독립선언에 대해 “룸살롱에 모여 낮술”했다고 발언하면서 논란이 됐습니다. 설민석 씨는 태화관의 성격과 민족대표 33인의 그 날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 있었습니다. 태화관이라고. 대낮에 그리로 간 거야. 그리고 거기서 낮술을 막 먹습니다.”

“(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하고 사귀었어요. 나중에 결혼합니다. 그 마담이 DC(할인)해준다고, 안주 하나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설민석 강사의 강의에 대해 민족대표 33인 후손들은 독립선언을 낭독한 장소를 룸살롱 술판으로,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을 술집 마담으로 폄훼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설민석 씨의 주장은 과연 타당할까요.

태화관은 ‘명월관’의 인사동 지점이었다

▲1919년에 명월관이 화재로 소실되자 주인 안순환은 고객에게 죄송하다는 사과 광고를 실었다.

당시 신문에는 명월본점, 명월지점이라고 되어 있다. ⓒ한겨레 고나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장소 ‘태화관’은 명월관의 인사동 지점이라고 봐야 합니다. 명월관은 1909년 안순환이 만든 유흥음식점입니다. 사장인 안순환은 광화문 명월관이 좁아지자, 이완용의 개인 집인 순화궁을 사들여 조선요리옥으로 바꾸었고, 사람들은 명월관 인사동 지점을 태화관이라고 불렀습니다.

“獨立宣言事件(독립선언사건)의控訴公判(공소공판) 一瀉千里(일사천리)로審問進行(심문진행) 最後(최후)의會議(회의)와明月舘宣言式(명월관선언식)의光景(광경)”

당시 동아일보 기사

독립선언사건 공판에서도 태화관이 아니라 ‘명월관’이라고 지칭한 부분이 나옵니다. 태화관과 명월관 인사동 지점이라는 표기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재정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명월관은 '호텔 연회장'처럼 사용됐다

▲춤을 선보이는 명월관 기생들.

설민석 씨는 태화관을 가리켜 ‘룸살롱’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생을 접대했던 공간이긴 하지만, 태화관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룸살롱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명월관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기생의 접대를 받으면서 궁중 요리를 먹는, 즉 왕과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명월관에서 열렸던 장로교 기념 축하 만찬 ⓒ동아일보

또한 명월관은 각종 모임과 만찬, 기자회견,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3월 1일은 유달리 청명한 날씨였다. 33인은 단정히 옷을 갈아입고 속속 뒤이어 명월관 지점(현 종로보안서)으로 모여들었다. 그 전날 손병희 선생의 지시로 김종규 씨가 특별히 진수성찬을 준비할 것을 명월관 주인한테 주문하여 두었다. 33인은 차례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중앙식탁에는 흰 보에 싼 독립선언서를 올려놓았다. (중략) 이윽고 정각 12시가 되자 만해 한용운 선생이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에 의하여 여기에 독립을 선언한다고 선창하고 저 유명한 독립선언서를 힘 있게 낭독한 후 일동이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중략) 무장한 헌병과 경관들이 오기는 그 후 한 시간만이었다. 문 복도 할 것 없이 앞뒤를 이중삼충으로 겹겹이 경관과 헌병 기마병이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그때까지 옆방에서 흥탕거리며 질탕이 놀든 노름꾼과 명월관주 안씨 등은 어느샌가 모두 어디로 도망을 치어 벌 둥지를 건드린 것처럼 소란스럽든 노름장소는 갑자기 심산유곡처럼 삼엄한 고요로 뒤 쌓여지고 말았다.”

全洪俊, 「己未運動과 明月館事件」,

축배를 들었으니 술을 마신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 시간 만에 경찰들이 왔기 때문에 흥청망청 술을 마셨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

설민석, “지나친 표현으로 상처받으신 분들께 깊이 사과한다"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이 일자 설민석 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페이스북

설민석 씨는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이 일자 자신의 페이스북에 “그 날 그 사건에 대한 견해일 뿐이지, 민족대표 33인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다. 또한 그 날의 사건만으로 민족대표의 다른 업적들이 희석되거나 가려져서도 안 되며, 그분들을 추모하여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계신 유족 여러분들께 상처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설씨는 “역사라는 학문의 특성상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존재한다”며 “민족대표 33인이 3.1 운동 당일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자발적으로 일본 경무 총감부에게 연락하여 투옥된 점과, 탑골공원에서의 만세 운동이라는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만세 운동을 이끈 것은 학생들과 일반 대중들이었다”면서 “그 날, 그 장소, 그 현장에서의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설민석 씨가 주장하는 요지는 간단합니다. 민족대표 33인이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자수를 했고, 지도부가 부재함으로 3.1운동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부분입니다. 그의 비판처럼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그 날 행적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변절했다?

3.1운동 관련 공판기사에 나온 민족대표 48인의 사진.

조금 더 ‘그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을 말할 때 ‘한용운을 빼고 모두 변절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을 포함해 3.1운동의 계획과 조직 등에 가담했던 민족대표는 총 48인이었습니다. 이 중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변절자는 최린, 박희도, 정춘수, 최남선, 현상윤 등 5명에 불과합니다.

물론 일부는 여전히 친일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친일이 논란된 인물과 친일 부역자는 구분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한 48인 모두를 ‘변절자’라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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