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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대한민국'의 상징인 박근혜가 퇴장했다

  • 입력 2017.03.16 11:02
  • 수정 2017.03.16 13:33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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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유고(有故)다. 마침내 대통령 박근혜는 '전임 대통령'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지난 10일 11시 21분께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심판청구 사건 선고에서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다음과 같이 주문을 선고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네 어절의 문장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불리어 온 유례없는 '국정농단' 사건을 간단히 매듭지었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헌재에 탄핵소추 의결서를 접수한 지 91일 만이었다.

▲지난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 선고에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판결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헌재 선고 이후의 변화를 다투어 전하는 뉴스 가운데는 '군부대, 대통령 사진 철거' 소식도 끼어 있다. 국방부에서 "헌재 탄핵심판 선고로 박 전 대통령 임기가 끝났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사무실에 걸린 박 전 대통령 존영(사진)도 폐기하라"는 공문을 각 군부대에 하달했다는 소식이었다. (관련 기사: 군, 각급 부대 박 전 대통령 사진 철거)

군의 주요 지휘관 집무실과 대회의실 등은 물론이거니와 국방부 장관 집무실에 걸려 있던 대통령의 사진 액자를 철거한다고 한다. 사진이 걸려 있던 자리는 대선으로 새로운 군 통수권자가 선출될 때까지 당분간 비어있게 된다.

대통령의 '유고', 1979년과 2017년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한 장면.

헌재 선고가 있던 날에 시행된 이 조치는 마땅한 행정사항이긴 했지만 한편으로 '권력의 소멸'이 지극히 사무적인 절차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동시에 이 뉴스는 38년 전에 비극적으로 벌어진 또 다른 대통령의 유고를 떠올리게 했다. (관련 글: 12·12, 그리고 30년…)

1979년 10월 26일, 종신 대통령을 꿈꾸었던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을 맞고 절명했다. 그의 18년 독재는 심복이 쏜 총탄 몇 발로 간단히 막을 내렸다. 병사들은 이틀 후 이른바 '7대 군가'에서 '유신의 국군'을 제외한다는 <육군회보>를 통해서 권력의 무상을 확인했다.

또한 사제(私製) 식사를 즐겼다던 청와대 내부 경호를 담당한 66특전대대에 '짬밥'이 나오고, 결국 이 부대는 해체되었다. 지켜야 할 최고 권력이 없는 경호부대를 쓸 곳은 없었다. 66대대로 전출했던 특등사수 출신의 옛 동료들이 원대로 복귀하는 걸 보면서 병사들은 비로소 절대 권력의 유고를 실감했다.

38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 2017년의 유고는 당연히 1979년의 유고와 견주어진다. 하나는 죽음으로 다른 하나는 권력의 박탈로 끝났지만 두 유고는 '정치적 비극'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인다. 게다가 두 유고의 당사자가 혈연관계, 부녀 사이라는 점에서 이 비극이 드리우는 그늘은 더 짙을 수밖에 없다.

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는 삼선개헌으로 집권을 연장하다 마침내 1972년 영구집권을 위한 이른바 유신체제를 열었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절대 권력은 7년을 넘기지 못했다. 1979년 10월, 체제 붕괴의 서막 부마항쟁에 이어 한 달이 채 안 되어 그는 심복에게 살해되었다. (관련 글: 1972년 오늘, 1979년 내일-유신독재의 시작과 붕괴)

독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철권통치기에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국민은 절대빈곤을 극복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은 숱한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이는 그가 '보릿고개'를 없앴다는 '경제 신화'로 포장되는 기반이었다.

박정희, '향수'에서 '신화'로

▲경북 구미시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입구에 조성된 새마을운동 기념 브론즈 조형물

1970년부터 시행된 정부 주도 농촌 개혁 운동인 새마을 운동은 농촌과 농민을 동원했지만 대다수 농민은 자신을 주역으로 여기며 운동에 참여했다. 농민들은 누대에 걸친 가난을 벗어나고 고작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 데에 불과한 변화에 고무되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저곡가와 저임금 정책의 희생자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박정희는 비명에 갔지만,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의 경제 상황에 대한 반발과 함께 '박정희 (시대) 향수'로 되살아났다. 이 현상은 일종의 신드롬으로 불리면서 마침내 '신화'로 격상되기에 이르렀다.

부친의 죽음으로 12살 때 들어갔던 청와대를 나와 '영애' 박근혜가 신당동 옛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27살이었다. 그리고 18년, 숨죽이고 살던 박근혜는 1998년 정계에 입문함으로써 부친이 걸었던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전적으로 부친의 아우라에 힘입은 것이었다.

얼마간의 정치적 부침을 거쳐 그가 대통령이 된 것도 자신을 통해 박정희 신화를 불러내고 싶었던 사람들의 욕망 덕분이었다. 집권 뒤,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정과 무능, 불통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를 거두지 않았던 것도 그에게 박정희의 카리스마를 투영하고 싶었던 대중의 기대 때문이었다.

시대정신과 무관하게 그가 70년대식 비전으로, 개발독재의 주역이었던 부친의 복권을 위해 정치에 뛰어든 것부터가 비극이었다. 청와대에서 성장한 15년 동안, 죽은 모친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그가 배운 것은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한홍구 교수)였다.

2대에 걸쳐 권력을 거머쥔 박근혜에 대한 열광을 배경으로 박정희는 '신격(神格)'을 갖추기 시작했다. 집권 1년 차에 이미 구미에서 박정희는 '반신반인'으로 추앙되고 있었다. 2009∼2017년 9년간 박정희 관련 예산은 총 4500억 규모였고 올해 구미시의 박정희 관련 사업 예산도 대폭 늘었다. (관련 글: 여론 '모르쇠'한 구미시, 내년도 박정희 예산 대폭 늘렸다)

▲박정희 생가 앞에 세워진 5m 높이의 동상. 2011년 11월 성금 6억 원이 투입됐다.

실정과 패착이 신화를 훼손하다

부친의 신화에 힘입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박근혜의 실정과 패착이 그 신화의 성채를 허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역설적이다. 지난해 9월, 미르와 케이(K)-스포츠 재단 설립에 비선 실세가 개입했다는 보도 이후에 전개된 '최순실 게이트'는 철옹성 같았던 박정희 신화를 바래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37주기 추도행사의 참석자는 예년의 3분의 1 수준이었고, 구미에서 열린 추도식의 참석자도 그 전년도의 절반에 그쳤다. 박정희 관련 사업들도 취소되거나 축소되고 있고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광화문광장에 '박정희 동상'을 건립하려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구미시에서는 28억 예산의 <박정희 뮤지컬> 제작 계획을 취소했고, 박정희 추모 홈페이지에서는 그의 '탄생 설화'가 삭제됐다. 반신반인 박정희의 '신격'이 또는 '신격화'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전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박근혜 효도 교과서'라 불린 '국정 역사 교과서'는 결국 모든 학교로부터 외면받아 도태될 지경에 이르렀다.

들끓는 민심은 박근혜의 지지율을 역사상 최저인 4%까지 떨어뜨렸고, 분노한 시민들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지난 11일 열린 20차 집회까지 전국 기준 누적 참가자 수는 1600만 명이 넘었고,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이 타오른 지 133일 만에 마침내 박근혜는 파면됐다. 18년의 칩거를 끝내고 정치에 입문한 지 다시 18년이 지나서였다.

박근혜의 유고는 스스로 부른 정치 행위의 결과라는 점에서 부친의 유고와 동질적이다. 그러나 부친의 유고가 비극적 죽음으로 끝나면서 신화의 단초를 마련한 것과는 달리 그의 유고는 절대 다수 시민들의 조롱과 야유에 묻혀 버렸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한 번도 진실로 인정하지 않았다. 환관들에 둘러싸여 진상을 끝까지 부인하고 모호한 태도로 검찰과 특검의 조사를 회피하는 등의 태도에서만 일관성을 지켰다. 반성은커녕 추종 세력들의 탄핵반대 집회를 즐기는 듯한 그의 태도는 한 번 더 국민들을 환멸에 빠뜨렸다.

탄핵을 반대하며 폭력적 언행을 불사해 온 소수의 지지자가 탄핵 불복을 공언하고 있는 상황도 그에겐 결코 이롭지 않다. 그들의 지지가 궁극적으로 헌법적 가치와 체제를 부정하는 형식으로 표출되는 한 그는 고립되고 그 고립은 더욱 심화될 뿐이기 때문이다.

"지 애비 얼굴에 똥칠을 한 기라..." 그나마 박근혜의 과오를 인정하는 영남 지역의 고령 지지자들이 한결같이 읊조리는 얘기다. 미욱한 딸이 아비의 영광을 훼손했다는 이들의 탄식에서조차 이미 퇴조하고 있는 '신화'의 기미가 읽힌다. 바야흐로 사람들은 딸을 통하여 그 아비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무책임과 무능, 불통으로 얼룩진 집권 4년의 결과는 참담하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위안부 합의와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각종 공약의 파기, 청년 실업 문제,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에서 야기된 탄핵정국을 통해 온 국민의 정치적 각성을 환기한 것이 유일한 그의 공이다. 그 수업료가 너무 비싸고 아프긴 하지만 말이다.

신화와의 '결별'과 새로운 시민의 '탄생'

▲'박근혜의 퇴장'은 광장 민주주의를 창조한 새로운 ‘시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오마이뉴스

박근혜 탄핵 정국은 '주권자의 무지가 죄악'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했다. 탄핵 정국은 '묻지 마 지지'가 얼마나 위험한 선택이었는지, 아둔한 인물에게 나라를 맡기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모험일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부친의 정치적 유산으로 집권한 박정희 주니어, 박근혜는 유신 시대의 인물인 김기춘을 통해 '박근혜식 유신 통치'를 집행해 왔다. 그는 21세기를 20세기 방식으로 사고하고 소비하려 한 지체(遲滯)의 정치인이었다.

탄핵은 그가 매달렸던 70년대식 패러다임의 마침표였다. 박근혜의 퇴진은 그가 역주행하려 했던 박정희의 유신 시대, 그 신화와의 결별이다. "'낡은 대한민국'의 상징"(심상정 정의당 대표)이었던 박근혜의 퇴장은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창조해 낸 새로운 '시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개발 독재의 유산, 박정희 신화는 이제 종언을 고하려는가. 이제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되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박정희 신화는 곧 우리 안에 도사린 '한강의 기적', '민족중흥'과 '역사적 사명' 따위의 이전 세기를 횡행했던 국가주의 망령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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