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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핑크 의자' 졸업기

  • 입력 2017.02.22 11:45
  • 기자명 BIG 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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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뭐가 힘들다고 노약자석에 오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또 들었다. 첫째 때도 전철 탈 때마다 들었는데 둘째 때도 또 듣고 있다. 그럴 때마다 임산부 배지를 더 잘 보이도록 꺼낸다. 허나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나 젊었을 때는 임신하고도 밭을 맨 할머니들’이 이미 전철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를 임신한 뒤 첫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의정부 경전철을 이용한 날이 있었다. 노약자석 세 자리 중 가운데가 비어 있었다. 끝자리에 앉으면 나도 앉아 갈 수 있고 유모차도 붙잡을 수 있어서, 끝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에게 자리를 한 칸만 옆으로 가주실 수 없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자신이 유모차 봐 줄 테니 가운데 자리에 앉으라 했다. ‘유모차가 경전철 설 때 밀릴 수가 있어서 계속 잡고 있어야 하는데요.’라고 했더니 안 밀린다며, 자신이 잘 보고 있다가 밀리면 잡아준다며 그냥 가운데 자리에 앉으라 했다. 한 칸 옆으로 가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그 날은 자리에 앉는 걸 포기하고 서서 올 수 밖에 없었다.

△ 한 칸 옆으로 가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본인촬영)

작년 9월 초였다. 한낮 기온이 24도까지 올라간 날이었다. 첫째 문화센터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경전철을 탔다.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데, 6개월 차에 들어서는 임신부가 유모차까지 밀고 타니 노약자석에 앉은 아저씨 아주머니들로서는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 들었던 걸까. 대뜸 시비가 걸려왔다.

아니, 애를 반팔을 입히면 어떡해요? 감기 들게?

지금 기온이 24도에요. 반팔 안 입히면 더워서 울어요.

내 손자는 어제 반팔 입혀서 감기 걸렸다니까? 반팔을 왜 입혔어?

한여름에 태어난 아이라 더위를 심하게 타서 오늘 같은 날 반팔 입혀야 돼요

아. 나는 한낮기온 24도에 내 아이에게 반팔 입힌 죄로 등산복 입은 아저씨의 오지랖을 고스란히 받아줘야 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옆에 있는 아주머니 차례였다.

얘 배고파하는데?

방금 먹고 왔어요. 졸려서 그래요.

이거 손수건 물고 있는데 빨리 빼요!

이 나려고 간지러워서 그러는거에요. 괜찮아요.

나는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일어나기 싫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다 참다, 그 날은 도무지 짜증을 참기 힘들어서 보건소로 직행했다. 더 큰 임산부 배지를 받기 위해서였다.

△ 항공사에서 받은 작은 배지에서, 보건소에서 주는 큰 배지로 바꿨다.(본인촬영)

그렇게 받은 커다란 배지를 착용하고 전철을 이용한 날이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핑크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저 한 정거장만 더 가면 갈아타요. 앉으세요.”라고 했고, 학생이 “그래도 앉으세요.”라는 말을 하려고 ‘그.래.도’까지 발음한 순간...우린 발견했다. 핑크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어머나!’ 소리가 나왔다. 그 짧은 순간에 어디서 나타나서 앉으셨는지.

△ 비상상황이 생길까 두려워 전철을 혼자 탈 때마다 남편에게 미리 연락해놨다.

그 모습을 보며 3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운이 좋은지 노약자석에 자리가 있었다. 앉아서 간지 5분 정도 됐을까. 공포의 순간이 왔다. 술 취한 아저씨가 내 앞으로 다가온 것. 역시나 표적은 나였다. 그는 내게 일어나라고 눈치를 주느라, 일부러 내 다리에 짐을 내려놨다. 그 순간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곤 전화번호 하나를 주문처럼 외우기 시작했다.

'1544-7769. 1544-7769. 1544-7769. 저 아저씨가 시비를 걸다가 혹시라도 내 배를 때리면 바로 문자해야지 그런데 문자할 시간이 있을까? 미리 써놨다가 전송되게 해놔야지. 그것보다 차라리 서서 가더라도 옆 칸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순간, 반대편 노약자석에 자리가 났고 술 취한 사람은 그 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개 “에이~ 설마 그 정도겠어?”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하지만 진짜다. 전철을 10번 타면 8번 정도는 이런 일이 발생한다. 그래도 이런저런 캠페인 덕에, 최근에는 인식이 많이 개선됐지만 그것도 젊은 사람에 한해서다. 자리 전쟁은 ‘임산부 vs 비임산부’의 몫이 아니라 ‘임산부 vs 노인’의 구도가 된 지 오래다.

△ 휠체어도 유모차도 매번 한참을 기다려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유모차를 가지고 전철을 탈 때마다 매번 혀를 차게 되는 곳이 있다. 엘리베이터다. 전철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려 하면 항상 몇 대를 보내고 타야 한다. 유모차도 휠체어도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한데, 언제나 엘리베이터 앞은 빨리 올라가려는 노인들이 먼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는 계단을 올라가기 힘들어서 그렇겠지 하고 말지만, 노인들이 휠체어와 유모차를 마구 밀어내며 앞으로 나서는 엘리베이터 앞의 아수라장은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나보고 세대 간의 갈등이 극심한 곳을 뽑으라고 하면 전철이라고 답하고 싶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핑크의자나 교통약자석을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도 말해주고 싶다. 인식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임산부든 장애인이든 모두 '노인'에 치일 수밖에 없으니까.

이런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다시 '핑크의자'를 졸업하게 된 소감은 한 가지다.

다시는 핑크의자에 앉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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