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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의 윤동주, 1945년 오늘 지다

  • 입력 2017.02.16 10:03
  • 수정 2020.02.14 15:18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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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우지강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도시샤대 학우들과 함께 찍은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1943)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간도 출신의 조선 청년 윤동주(1917~1945)가 스물일곱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1943년 7월, 귀향길에 오르려다 일경에 체포된 이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돼 이듬해 3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일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통보했지만 윤동주는 학창시절에 축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건강했다. 건장한 20대 청년이 수감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돌연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은 쉬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의문의 주사와 생체실험

40여 년 전, 그의 아우 윤일주와 후배 정병욱의 증언으로 그가 일제의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됐고, 이는 2009년에 SBS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됐다. (관련 영상: ‘윤동주, 그 죽음의 미스터리’)

윤동주는 복역 중 일제로부터 정기적으로 의문의 주사를 맞아야 했는데, 이는 당시 규슈제국대학에서 실험하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으면서 ‘바닷물’을 실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의문의 주사는 결국 청년 윤동주의 목숨을 앗아갔고 3주 후에는 함께 복역 중이었던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마저도 쓰러뜨렸다.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은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의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을 통해서 확인됐다. 이 실험을 소재로 한 소설이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이다.

▲ 1945년 5월 추락한 미군 B29 폭격기의 승무원 11명은 포로가 되어 규슈제대의 생체실험의 대상이 됐다.

▲ 고향에서 친지들과 어울려 찍은 윤동주의 사진(1942). 앞줄 중앙이 같이 희생된 고종사촌 송몽규다.

규슈제대의 실험을 감안하면 윤동주가 맞았다는 주사 역시 ‘바닷물’이었을 것이다. 약리학자들은 인체에 바닷물을 주입할 경우, “바닷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 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실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다. 암산은 ‘신경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라는 것이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으로 희생되었다는 점을 사실로 다루고 있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2015)에는 이 암산테스트 장면이 나온다. 이 흑백 영화는 “후쿠오카 감옥에선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1800여 명이 사망했다”는 자막이 흐르면서 막을 내린다.

윤동주는 간도 용정에서 간도 이주민 3세로 태어났다. 19세기 후반에 그의 증조부가 함경도에서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던 것이다. 기독교 장로였던 조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윤동주는 아버지가 교사로 재직했던 명동학교에서 고종사촌 송몽규(1917~1945), 문익환(1918~1994)과 같이 공부했다.

창씨의 부끄러움, 시 '참회록'

그는 숭실중학을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다녔는데 1939년 연전 2학년 재학 중 <소년>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았다. 1941년 연전 문과를 졸업하면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교토 도시샤대학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의 시비. 그는 1942년 10월에 이 대학에 편입하였다.

윤동주는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에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 유학 준비 과정에서 부득이 창씨개명 하여 히라누마 도쥬가 됐는데 그는 이를 두고두고 부끄러워했다. 시 ‘참회록’은 이때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그린 작품이다.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 시 ‘참회록’ 중에서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을 다닐 무렵부터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돼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1943년 3월, 일제가 개정병역법을 시행하면서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 일본 유학생들에게도 징병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 해 7월, 윤동주는 귀향길에 오르려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체포돼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됐고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은 윤동주가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 송몽규도 여기서 옥사했다.

이듬해인 1944년 3월, 교토지방재판소 제1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판결문)을 한 혐의였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윤동주의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었다. 3월에 장례식을 치른 후 윤동주는 고향인 간도 용정에 묻혔다. 조부 윤하현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그의 비석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 윤동주의 장례식.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3월에 고향인 간도 용정에 묻혔다.

▲ 북간도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무덤. 조부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돌로 비석을 썼다고 한다.

▲ 유고시집(정음사, 1948)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뒤에 조국은 해방되었다.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추도회가 열렸다. 그리고 1948년 1월, 마침내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간행됐다.

1941년 연전을 졸업할 때 이루지 못한 시집 발간은 7년 후 유고시집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62년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한국문인협회에서 그의 시 정신을 기려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하였다.

그의 시를 읽거나,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나는 거기 각별한 울림이 있다고 느끼곤 한다. 특히 ‘별 헤는 밤’에서 느껴지는 울림은 아주 특별하다. 스스로에게 가혹할 만큼 엄격한 시인의 태도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진정성 같은 것을 느끼는 까닭이다.

그와 그의 시가 국민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는 것도 그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진정성과 고결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는 짧은 삶을 살면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그의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그는 삶과 세상의 모순에 맞서면서도 그 고통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소박한 시어로 삶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되 거기에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깊고 그윽한 자기성찰을 담았다.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그의 시의 진정성이 가슴에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 서가엔 1994년에 나온 윤동주 시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꽂혀 있다. 1994년, 복직하던 해 구입한 정음사의 개정판 18쇄다. 윤동주의 72주기를 맞으면서 그의 시집을 뒤적여 ‘쉽게 씌어진 시’를 읽는다.

‘쉽게 씌어진 시’는 윤동주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에 쓴 작품이다. ‘육첩방(다다미 여섯 장을 깐 일본식 방)은 남의 나라’는 그가 처한 상황의 단적 표현이다. 육첩방이란 생활공간은 그를 옭매고 있는 구속과 부자유의 은유다.

그는 그 안에서 시를 쓰며 살아가는 자신의 운명을 ‘슬픈 천명’이라 말하고, 부모의 도움으로 대학을 다니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식을 습득하는 고여 있는 삶에 회의하면서 그 우울한 삶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런 삶 자체가 그에게는 또 다른 부끄러움이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움만으로 끝나진 않는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그는 그려내기 때문이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체념하지 않고 그는 스스로에게 손을 내민다. 그것은 그가 또 다른 자아와의 화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인 것이다.

▲ 이준익 감독의 흑백영화 <동주>(2015) 포스터

올해는 윤동주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된다. 영화 <동주> 덕분일까. 제작비 5억의 저예산 영화였지만 100만이 넘는 관객을 모은 이 흑백영화는 72년 전, 한 청년의 고뇌와 시를 통해 식민지 시대를 환기해 주었다. 윤동주 100년에 그의 삶과 죽음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전언은 과연 무엇일까.

직썰 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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