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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오늘, 김지섭 의사 일본 궁성에 폭탄을 던지다

  • 입력 2017.01.05 10:55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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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섭 의사의 의거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 1924년 4월 25일자 2면.

▲ 김지섭(1884~1928)의사

1924년 1월 5일 오후 7시 김지섭(金祉燮, 1884~1928)은 일본 궁성의 다리인 니주바시 부근에서 궁성의 문인 사쿠라다몬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가슴에 품은 폭탄 무게를 가늠해 보면서 자신의 동선을 계산했다.

김원봉의 의열단이 1924년 초 도쿄에서 제국의회가 열려 일본 수상을 비롯한 고위 관료와 조선총독이 참가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은 1923년 12월이었다. 의열단은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구들을 처단하고 일제의 만행을 온 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김지섭, 폭탄을 품고 석탄선을 타다

결사대원으로 선발된 김지섭은 12월 20일 상하이 푸둥에 정박 중인 미쓰이 화물 소속의 석탄선 텐조야마마루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하기로 했다. 아편밀수업자인 나카무라 히코타로 신분을 위장한 그는 폭탄 3개를 행낭에 숨긴 채 배의 밑창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는 그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결의를 한시 한 수에 담았다.

평생에 품은 뜻

표연히 이 한 몸이 천릿길 떠나갈 때

배 안엔 모두 원수이니 벗할 이 뉘 있는가.

기구한 나라 앞길 촉보다도 험난하고

분통한 겨레 마음 진나란들 더할쏘냐.

오늘날 몸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은

그 몇 해를 참으면서 와신상담을 하였던가.

이미 걸은 이 걸음은 평생의 뜻이기에

다시는 고국을 향해 돌아갈 길 묻지 않으리.

그는 볕 구경도 못 한 채 하루 한두 번 주는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열흘을 버텼다. 상하이를 떠난 배가 일본 큐슈 후쿠오카의 야하타 항에 닿은 것은 10일 만인 12월 31일이었다. 김지섭은 바로 도쿄로 향하지 못하고 며칠 동안 현지에 머물러야 했다. 그가 가진 것 가운데 돈 될 만한 것을 팔아 자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1924년 1월 5일 새벽 도쿄에 도착한 김지섭은 이미 기차 안에서 의회가 휴회 중이고 또한 의회가 언제 개회될는지도 모른다는 신문보도를 읽고 거사 계획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됐다. 원래 계획은 제국의회에 돌입해 정부위원석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조선 강점의 원흉들을 일거에 폭살하려는 것이었다.

터지지 않은 3개의 폭탄

그러나 여비도 넉넉지 않은 데다 언제 개회할지 모르는 제국의회를 무작정 기다릴 순 없었다. 차선책으로 그는 일본 궁성에 잠입해 일왕을 폭살하면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세상에 알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거사 대상을 변경하기로 했다.

▲ 김지섭 의사의 거사가 이루어진 니주바시 전경. 일본 궁성 앞 다리다.

김지섭은 일본인 관광객을 따라 니주바시 앞으로 나아갔다. 궁성 경비 경찰이 다가와 밤에는 궁성 관광을 금하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일본인은 돌아섰으나 김지섭은 현장에 그냥 남아 있었다. 수상하다고 여긴 경찰이 누구냐고 묻자 김지섭은 폭탄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지고 쏜살같이 다리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다리 저편에서 군인 한 명이 나와 총을 겨누고 길을 막았다. 김지섭은 이내 두 번째 폭탄을 니주바시 한복판인 정문 석책 밖에 던졌지만, 역시 불발이었다. 김지섭은 군인과 격투를 벌이며 남은 폭탄 하나를 던졌으나 그것마저도 불발이었다.

김지섭은 곧 체포됐고 그의 밀항을 도운 일본인들도 잇달아 검거됐다. 그는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거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그는 무죄면 무죄, 사형이면 사형이지 무기징역이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공소를 제기했다.

▲ 지바(千葉)형무소. 김지섭은 1928년 2월 20일, 여기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925년 8월 도쿄 공소원 판결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1927년에는 20년으로 감형됐다. 김지섭은 1928년 2월 20일 지바 형무소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4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는 의열단원이자 고려공산당원이었다

김지섭은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의 풍산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호는 추강(秋岡).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라 학문에 출중했다. 21세 때에 경북 상주보통학교 교원을 거쳐 금산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지섭은 김원봉, 곽재기 등 동지들과 교유했다. 그는 국내보다 해외로 나가 구국 활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20년에 중국 만주로 들어갔다. 연해주, 북경, 상해를 돌며 독립의 길을 모색하던 그는 1922년 여름 상해에서 의열단원이 됐다.

김지섭은 같은 해 4월에 장건상과 상의해 소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이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충당할 의도로 고려공산당에 가입해 당원이 됐다. 같은 해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했으며 그 뒤 국민대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 금산법원 서기 시절의 김지섭 부부

▲ 김지섭과 고향의 친구들

그의 본격적인 의열단 활동은 1923년 3월 국내 일제 기관들을 파괴하기 위해 폭탄을 반입하는 것으로 전개됐다. 폭탄 36개를 상해에서 톈진으로 수송해 이를 국내로 가져오기 위한 이 작전에는 김시현, 유석현, 황옥 등이 참여했다. (영화 <밀정>의 중심 소재가 된 거사다.)

조선총독부와 경찰서 등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이 거사는 사전에 일제에 탐지돼 3명의 동지가 검거됐다. 김지섭은 교묘한 변장술로 위기를 모면하고 중국으로 피신했다. 같은 해 12월에 다시 국내에 잠입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니주바시에 폭탄을 던진 거사가 기획된 것은 1923년 9월 도쿄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 시기의 조선인 학살 때문이었다. 대지진으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일제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우리 동포 6,600여 명이 학살했다.

▲ 경북 안동시 영호루 앞에 세워진 '추강 김지섭 선생 기념비'

그러나 사전 준비도, 훈련도 없었던 이 거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으로 밀항하는 과정에서 열흘 동안 바다의 습기에 노출된 폭탄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일제에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이 의거는 일본인에게 신성불가침적 존재인 천황에 대해 폭살을 기도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을 경악시켰다. 일제는 내각이 사퇴하고 새 내각이 들어서면서 책임 관료를 징계하고 경찰 수뇌부를 파면했다.

궁성 공격은 이봉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의 상징인 일왕에 대한 한국인의 공격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는 8년 후 이봉창(1900~1932)의 의거로 이어졌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사쿠라다몬 부근에서 히로히토 일왕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다행히도 수류탄은 불발에 그치지 않았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수류탄 폭발로 마차가 부서지고 일본 고관대작 두 명이 부상했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 청년이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사건은 이후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관련 기사: 1928년과 1932년 오늘, 조명하와 이봉창의 순국)

일제 강점기 내내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등이 조직해 낸 의거들 가운데 폭탄 불발로 실패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거사의 성패와 무관하게 그것은 영화 <암살>의 명대사처럼 ‘끝까지 싸우고 있다’는 걸 우리 자신과 일제에 끊임없이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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