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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늘 나를 자궁이라 불렀다

  • 입력 2017.01.03 13:25
  • 수정 2017.01.03 13:30
  • 기자명 유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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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천에 살면서 서울로 통근하는 30세 여성입니다. 취업한 지는 만 2년이 조금 넘었고, 아직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습니다. 결혼은 대출을 다 갚고 돈을 어느 정도 모은 2-3년 뒤에나 가능할 얘기고, 아이를 좋아하지만 낳아 키울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돈 때문이죠.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행정자치부 식으로 확 줄여 보죠. 저는 인천에 살고 있는 자궁입니다. 행자부의 ‘출산지도’를 참고하면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저를 포함해 99.516개의 자궁이 있더군요. 지역별 순위까지 매겨놓으신 덕에, 우리 동네가 전국 21위 규모의 자궁 보유 지역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친절한 가임기 여성 서식지 알림(...)

물론 '출산지도' 웹사이트에서 자궁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행자부는 꽤 억울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르겠습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 각자의 의사를 삭제하고 단지 ‘기능적으로’ 임신이 가능한 여성의 머릿수를 세어 놓은 지도가 ‘현재 이용 가능한 자궁의 수’를 알려주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저출산 현상을 해결하는 데 무슨 도움을 주는지.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적지 않았는지 행정자치부에는 ‘대한민국 출산지도’에 대한 항의가 빗발쳤고, 결국 웹사이트는 하루 만에 닫혔죠. 하지만 뒷맛은 영 찝찝했습니다. 이건 실수도 사고도 아니니까요.

표현만 달랐을 뿐, 대한민국 정부의 시선에서 여성이 아이를 담는 그릇 이상의 존재로 환원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닌가요?

올 여름에 불거진 ‘예쁜 가슴’ 논란을 볼까요.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국가건강정보포털 사이트는 여성의 가슴을 ‘제2의 성기’, ‘아기에게 생명의 정수를 물려주고 남편에게 애정을 나눠주는’, ‘여성으로서의 의미와 자존심이 표현되는 곳’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예 ‘예쁜 가슴’의 규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죠. 유두의 빛깔까지요.

한국인 여성의 아름다운 가슴은 한 쪽에 250cc, 보기 좋은 유두는 연한 적색...

누굴 위한 기준인가요?

이 문서에서 여성의 신체는 오로지 자녀나, 남편으로 퉁쳐지는 한 명의 남성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상적인 신체의 규격조차 남성 일반의 시각에서 ‘보기 좋은’ 기준으로 맞춰지죠. 남성의 성기를 ‘남성으로서의 의미’, ‘아내에게 즐거움을 주는 기관’, ‘생명의 근원’ 따위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차이가 명확해집니다.

서울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 문구도 같은 맥락에 위치합니다. 안정이 필요한 임산부를 위한 자리임에도, 안내 문구가 지칭하는 이 좌석의 실질적인 임자는 뱃속에 든 ‘미래의 주인공’이죠. 이 말대로라면 임산부는 약자로서 배려 받는 게 아니라, 귀한 ‘미래의 주인공’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그릇으로서의 대접을 받는 셈입니다.

얼마 전 논란이 된 출산장려 광고는 또 어떤가요.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기 전 양육비부터 걱정했다면, 위대한 두 모자는 역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는 문구에는 여성과 출산을 향한 정부의 노골적인 시선이 민망할 정도로 드러나 있습니다.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는 건 율곡뿐입니다.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지 않았다면 사라지는 건 그들의 모자 ‘관계’지, 신사임당이라는 인물이 아닙니다. 사임당이 소위 ‘현모양처’ 역할 이외에도 다양한 방면에서 능력을 증명해왔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예술적 위대함은 아이가 없었을 때 더 두드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의 존재가치를 율곡과의 모자관계에서만 찾는다는 건 지독하게 무지하고 평면적인 시각입니다. (생명 탄생의 가치를 단지 ‘위인 탄생의 가능성’에 건다는 점에서도 이 광고는 수준 미달입니다. 위대하게 자랄 아들딸을 낳기 위해 임신하는 건 아니니까요.)

아, 여성을 주체로 만들어준 적도 있긴 했죠. 피임에서요. 짐을 잔뜩 든 남성과 빈손으로 걸어가는 여성의 사진 옆에 ‘다 맡기더라도 피임까지 맡기진 말라’는 문구를 크게 써 놓은 공익광고가 ‘계몽’하고자 하는 상대는 명확히 여성입니다. 물론 아주 작고 흐린 글씨로 ‘피임은 남자 혹은 여자만의 의무가 아닙니다’라고 써 놓긴 했지만…주목도를 생각하면 이건 메시지라기보다는 면피성 문구에 가까워 보이네요.

언제는 다 맡아줬나요...?

25세~34세 사이 한국 여성의 52.5%가 콘돔 착용을 요구하지만(34.8% 여성은 상대 남성이 콘돔을 싫어하니 요구조차 못 합니다) 실제 콘돔을 사용하는 30대 한국 남성이 31.3%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하면 ‘다 맡기는’ 쪽이 누구인지는 명백한데도 말이죠.

(통계 참조: http://news.mk.co.kr/newsRead.php?no=225842&year=2016)

정리해봅시다. 대한민국 정부가 정의해 온 여성은 늘 남편(남성)이 보기 좋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아이에게는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애정을 ‘자연스럽게(이것이 중요합니다)’ 쏟아내는 성전이어야 하고, 성관계의 위험과 골치 아픈 부분은 남성이 신경 쓰지 않도록 알아서 처리하는 똑부러진 ‘자궁’입니다.

행정자치부의 기괴한 출산지도가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실무자 몇몇의 인식이 부족한 탓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이제껏 여성을 보아온 대로 행동하신 거죠. 다만 이번에는 조금 더 솔직했을 뿐입니다.

새삼 ‘나는 자궁이 아닌 사람이다’고 외치지는 않겠습니다. 여자들이 청소 안 하고 직장으로 나돌아서 비염이 증가한다고 회초리질 하시는 분들에게 이건 지나치게 현대적인 얘기니까요(분에 넘친다,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 주시면 딱 좋겠습니다).

다만 이런 것들로 절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정도는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데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현대 한국처럼 그 이유가 명확한 시대는 드물었습니다. 만약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고 계신다면, 캠페인 기획안보다 사직서를 제출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출산지도에 관한 보건복지부·행정자치부의 보도자료...예? 애 낳기 전국대회요..?

어쨌든, 저출산은 일종의 증상이고 그게 문제가 된다면 원인을 해결할 책임은 정부에 있습니다. 특산품을 생산하듯 지역별 출산 경쟁을 붙이는 게 아니라,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기반을 확립하는 게 우선이라는 얘깁니다. 그게 말처럼 쉽냐고요? 그러라고 거기 계신 겁니다.

물론 이제껏 그래 온 것처럼 ‘애 안 낳는 젊은 년들’의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게 간편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산지도 사이트를 하루만에 닫으며 실감하셨겠지만, 이제 그 방식도 잘 먹히지 않을 겁니다. 여성들이 사회로 뛰쳐나가며 얻은 게 비염뿐만은 아니거든요.

저는 제가 원할 때, 그리고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때 아이를 낳아 키울 겁니다. 전자는 제 선택이고 후자는 당신들의 숙제죠. 이외에 다른 변수는 없습니다. 아이를 안 낳는 게 비애국자라고 정의하면 저는 비애국자가 될 것이고, 양심 없는 년이라 욕하면 양심 없는 년이 될 겁니다. 하지만 국가의 경쟁력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아이를 낳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니 '저출산의 심각성'을 증명하는 통계는 제게 알려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부 문서로 공유하고 안에서 논의해 주세요. 대한민국의 인구 문제는 제 자궁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여러분의 능력에 달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며 글을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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