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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오늘, 의열단원 최수봉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 입력 2016.12.27 10:46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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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원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1심 재판기사를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 (1921. 1. 20.)

1920년 오늘 오전 9시 30분께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 스에지로는 직원 19명을 서내 사무실에 모아놓고 훈시를 하고 있었다. 남쪽 유리창이 깨지면서 폭탄 하나가 날아와 조선인 순사부장 쿠스노키 게이고의 오른쪽 팔에 맞아 굴러떨어졌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지만,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또 한 발의 폭탄이 경찰서 현관에서 터지면서 현관문, 마루, 벽 일부와 서류함이 파손되었다. 왜경들은 폭탄을 던지고 달아나는 청년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밀양경찰서를 폭탄 공격한 청년 최수봉

청년은 추격하는 왜경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인근의 민가로 들어가 품속의 단도로 복부를 그었다. 칼은 그의 배를 20cm 길이와 1.5cm의 깊이로 갈랐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됐고 부산 도립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은 뒤 일제에 의해 기소됐다.

폭탄 투척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석 달 전 박재혁(1895~1921)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 공격을 이은 거사에 일제는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부산경찰서에서는 경찰서장 등 세 명이 죽었고 박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옥중에서 자결했다. 1년 전 3·1 만세운동 이후 계속되는 의열 투쟁에 일제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 밀양경찰서에 거사를 감행했던 최수봉 의사

부산의 박재혁에 이어 인근 밀양에서 거사를 감행한 이 열혈 청년이 바로 최수봉(崔壽鳳, 1894~1921) 의사다. 수봉은 이명이고 호적상 이름은 경학(敬鶴)이다.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한문서당을 거쳐 1905년에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인 교사가 조선 역사를 가르치면서 한민족 시조인 단군을 일본의 스사노미코토(대화족의 시조로 추앙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남동생)의 아우라고 말하자 최수봉은 스사노와 단군의 생존 연대가 맞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구두시험 때 그는 스사노가 단군의 손자의 손자라고 답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일본 왕실을 모독한 불온 학생으로 찍혀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는 밀양의 동화학교, 부산의 명정학원, 평양 숭실학교에서 공부했다. 불온학교라 해 숭실학교가 폐교되자 최수봉은 평안도에서 날품팔이와 우편 집배원 생활을 하다 1918년에 밀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3월 13일 밀양 장날 윤세주(1901~1942) 등과 함께 밀양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최수봉은 일경의 감시와 검거를 피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듬해 6월 그는 동향인 약산 김원봉이 윤세주와 함께 조직한 의열단에 가입한 뒤 다음 달 밀양으로 돌아왔다.

▲ 의열단을 조직한 김원봉, 윤세주는 최수봉의 동향인이었다.

일본 고관을 암살하고 중요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한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에 따라 밀양과 진영에 폭탄을 반입하려다 적발되어 곽재기, 이성우 등의 동지들이 검거된 것은 1920년 봄이었다. 8월 중순에 그는 자신을 찾아온 의열단원 임태호가 밀양경찰서 공격을 제의하자 쾌히 승낙했다.

한 달 뒤에는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파 쾌거가 있었다. 12월 26일 최수봉은 임태호로부터 두 개의 폭탄을 건네받고 이튿날 거사에 준비했다. 다음날 경찰서장이 전 직원을 소집해 연말 치안 유지를 위한 특별 지시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최수봉은 밀양경찰서로 진입했다.

끝내 성공하지 못한 작전, 그리고 사형선고

폭탄이 제대로 터지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지만, 최수봉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검사의 항소로 이어진 대구복심법원의 2심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아 상고했으나 기각됐다. 그리고 1921년 7월 8일 오후 3시 대구형무소에서 최수봉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집행 13분 만에 그의 숨이 끊어졌다. 향년 27세. 장례를 준비한 밀양 청년들이 대구형무소에서 직접 시신을 운구해 와 상남면 마산리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이때 장례에 참여한 30여 명이 허가 없이 기부금을 모집하고 반역사상을 칭찬했다 해 기소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 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어귀에 세워진 최수봉 의사 추모 기적비

일제에는 경미한 피해밖에 입히지 못한, 사실상 실패한 의거였지만, 일제는 최수봉의 목숨을 빼앗았다. 자신의 실존을 걸고 나아가는 것은 그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무겁고도 무겁다. 그러나 어떤 이의 죽음은 널리 기억되고 또 어떤 이의 그것은 쉬 잊히곤 한다.

최수봉의 의열투쟁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거사는 석 달 전 박재혁 의거와 함께 이듬해(1921년)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상해 황포탄 의거(1922), 종로경찰서 투탄(1923) 등으로 이어지는 의열투쟁의 맥을 잇고 있다.

정부는 1963년 최수봉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마산리의 공동묘지에 봉안됐던 유해는 1969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이장됐다. 그의 의거를 기려 고향 마을 입구에 추모비가 건립됐고 매년 7월 8일에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그나마 고향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는 시방도 살아 있는 것이다.

* 최수봉 의거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을뿐더러 내용도 상이한 부분이 많다. 이 글은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의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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