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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민간인 86명을 학살한 건 한국군이었다

  • 입력 2016.12.23 10:24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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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양민학살 위령제 모습. 사건의 진상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서 간신히 밝혀졌다.

1949년 12월 24일, 정오께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서 국군 병사들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 발생했다. 군인들은 카빈 소총과 수류탄, 바주카 포 등으로 마을 주민 136명 가운데 어린이 9명과 여성 44명을 포함해 모두 86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날, 경북과 태백산 지역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벌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원 70여 명은 석달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모은 뒤 주민들이 공비들에게 부역했는지를 추궁했다. 주민들이 이를 부인하자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 공비에 의한 학살로 조작

희생된 사람은 젖먹이 3명, 초등학생 9명을 포함하여 남자 43명, 여자 43명이었다. 부상만 입은 주민들은 '확인 사살'되었다. 부상을 입었지만 시체 밑에 깔리는 바람에 남자 5명과 여자 7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군인들의 방화로 마을의 27가구 중 23호의 가옥이 불타 버렸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 학살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듬해 1월 신성모 당시 국방부장관이 헌병과 장갑차의 호위를 받으며 현장을 찾아 유족들을 위로하고 돌아간 뒤, 이 사건은 공비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당시 문경경찰서장과 산북지서 주임이 ‘공비 출몰 총살’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 당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문경양민학살 사건의 전모는 <시사저널>이 입수한 기밀문서를 정희상 기자(현재 <시사인>)가 보도하면서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남아 있는 사건 당시 한국 경찰의 조사 보고서를 포함해, 주한미군 임시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사건 관련 비망록 등이었다.

위 기밀문서 세 건은 사건의 진상은 물론,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은폐하려 했던가에 대한 조사 보고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하 정희상 기자의 기사 ‘문경 양민 학살 전모 밝혀졌다’에서 인용]

<주한미군 육군 무관이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장에게 보낸 1950년 1월11일자, ARMA 10호 전문>

이하는 한국 경찰 수사 결과 획득된 사건 보고서이다. (49년) 12월 24일 12:00께 25연대 3대대 7중대의 2개 소대는 정찰 중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 부락(좌표 1118-1542)에 들어갔다. 군대는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공산주의자들에게 부역했는지를 추궁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자 군대는 도발당하지 않았는데도 무조건 사격을 개시하여, 카빈 소총·수류탄·바주카 포 등으로 민간인들을 몰살했다. 부상만 입은 것으로 판명된 주민들은 소총 사격으로 확인 사살했다. 군대가 살해한 총인원은 젖먹이 3명, 초등학생 9명, 남자 43명, 여자 43명이었다. 죽은 시체 밑에 누워서 확인 사살을 피했던 부상 남자 5명과 여자 7명은 현재 입원 가료 중이다. 27가구 중 23호의 가옥이 불탔다.

한국군 학살 책임자는 유진규 소위와 하사 2명이다. 중대장은 문경경찰서장과 공모해 군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공비 70명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허위 보고했다. 정황에 따르면, 마을 주민들은 경찰에 협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찰은 비밀리에 수사했으며, 파문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수사 결과를 육군에 통보하지 않았지만, 국회의원 8명에게 은밀히 정보를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군은 사건을 인지했으며 현지에 독자 조사반을 보냈다. 의심할 여지없이 가해자들은 기소되어 처형될 것이다.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KMAG)의 조사 보고서(문경 양민 학살에 대한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비망록)>

1949년 12월 25일 한국군 3사단 25연대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에 보내왔다. “대략 70명의 공비들이 석달마을을 습격했다. 공비들은 가옥 24호를 태우고 마을 주민 86명을 학살했다.”

이 보고서는 공비들의 전술이 (민간인 학살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에 임시군사고문단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즉각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 결과 드러난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마을에는 가옥이 총 27호 있었고, 주민은 모두 1백39명(남자 77명, 여자 62명)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한국군에 의해 사실상 전멸되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공비들에게 편의와 위문품을 제공하는 것으로 의심받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마을은 경찰과 군대의 작전에 두 번이나 조력했다.

1949년 12월23일 16:00시에 한국군 3사단 25연대 7중대의 2소대와 3소대가 각각 점촌과 예천(좌표 1142-1534)을 출발했다. 이들이 받은 명령은 현 주둔지에서 이동해 12월24일 10:00시까지 상선암동에서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연합 부대는 이후 석봉산·달비산·단산에 대한 정찰 활동을 수행했고, 12월 24일 18:00시에 갈평리에 도착했다.

석달 부락은 정찰 경로 가운데에 위치했다. 2개 소대는 지정된 시각인 10:00시에 합류했고, 석달 부락으로 이동해 14:00시께 도착했다. 이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 백여 명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나서 군은 주민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추궁했다. 주민들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2개 소대는 더 이상의 확인 조처 없이 곧바로 바주카 포·수류탄·소총·카빈총 등으로 무차별 사격을 개시했다.

무기가 없었던 마을 주민들은 아무런 방어도 못했다. 군대의 공격에 앞서 어떠한 도발도 없었음이 명백하다. 한국군은 다친 마을 주민을 점검해 소총으로 확인 사살했다. 이 잔학 행위에서 2개 소대가 사냥한 숫자는 무방비 상태의 마을 주민 백여 명이었다. 부상 남자 5명과 부상 여자 7명은 이웃 주민들의 시체 밑에 죽은 듯이 엎드림으로써 최후의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날의 잔학 행위에 직접 책임이 있는 한국군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유진규 소위(25연대 3대대 7중대 3소대), 김점동 하사(25연대 3대대 7중대 3소대), 안택효 중사(25연대 3대대 7중대 2소대).

7중대장 유응철 대위와 문경경찰서장 이의승 경감은 사건 당시 아무것도 알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한국군 대위는 경감에게 본부에 허위 보고를 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나서 대위는 자기 상관에게 공비들의 소행이라고 허위로 보고했다.

<한국 국립 경찰국 보안과 백한종 경감과 이구락 경위의 문경 양민 학살 사건 조사 보고서>

이 마을에는 23가구에 주민 1백39명이 살고 있었는데, 학살 당시에는 방문객 5명(남자 1, 여자 5)을 더해 모두 1백44명(남자 75, 여자 69)이 있었다.

7중대장은 유응철 대위(28)이다. 7중대 1소대는 문경에 주둔하고 있으며 2소대는 점촌에, 3소대는 예천에 주둔하고 있었다. 석달 마을을 공격한 부대는 2소대와 3소대이다. 2소대 지휘관은 안택효 중사(28)이고, 그의 소대에는 32명의 병사가 있었다. 3소대 지휘관은 유진규 소위(23)로서 그의 휘하에는 35명의 병사가 있었다.

이들은 M1소총·유탄 발사기·수류탄·총검으로 주민을 학살했다. 학살은 49년 12월 24일 13:00시부터 14:00시까지 이루어졌다. 공격하는 와중에 가옥 23채와 내부의 모든 가구가 불탔으며 1백44명 중 민간인 남자 43명과 여자 43명이 살해되었고, 민간인 남자 5명과 여자 7명이 다쳤다.

문경경찰서 정보과에서 파견된 형사 황영훈은 7중대장과 함께 있었는데, 소대 지휘관이 중대장에게 수상한 마을을 공격했다고 보고하는 것을 들었으며, 이 보고를 받고 중대장이 소대 지휘관에게 매우 화를 냈다고 말했다.

황 형사는 문경경찰서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다음날 한국 국립경찰은 현장에 나가 사진을 찍은 뒤 시체들을 가매장했다. 그때까지 다친 여자 3명과 어린이 2명이 시체더미에 생존해 있었다. 경찰은 부상자들을 김천도립병원과 점촌병원으로 후송했다.

중대장은 자신이 학살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단지 2개 소대에 12월 24일까지 정찰 임무만 마친 뒤 17:00시에서 18:00시 사이에 귀대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이상의 조사 내용은 군대를 현장으로 인도했던 민간인 2명과 부상자들, 황 형사의 증언을 토대로 했다.

사건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어진 이승만 정부의 독재 아래서 유족들은 침묵을 강요당하며 살아야 했다. 유족들은 4·19혁명 뒤에야 비로소 억울한 사연을 풀어달라고 호수할 수 있었다. 국회의 진상조사반이 학살의 진상을 파헤치고 보상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면서 사건은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 발생한 5·16 쿠데타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국회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진정했던 유족 대표는 포고령 위반죄로 체포돼 두 달간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이후 이어진 기나긴 군부독재 기간을 유족들은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유족들이 유족회를 결성하고 합동위령제를 지내게 된 것은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93년 5월이 되어서였다. 유족회를 만들고 이후 진상 규명을 위해 헌신했던 유족회장이 고 채의진(1936~2016) 선생이다. 그는 사건 당시 초등학교 4학년으로 하굣길 집단 학살 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사람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문경양민학살의 진상을 밝힌 것은 2008년, 참여정부 들어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서였다. 공식 결정 이후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8년 과거사정리위에서 진상 규명, 그러나…

1심과 2심 재판부는 유족들이 헌법소원을 낸 2000년 3월을 기점으로 손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5년,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2011년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진실을 은폐하고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조차 게을리 한 국가가 이제 와서 문경 학살 사건의 유족인 원고들이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며 시효 완성을 이유로 채무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판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3년 뒤 대법원은 ‘희생자에게 3억 원씩 주기로 한 돈이 많다’며 배상액을 깎아버렸다. 총 47억여 원의 배상금은 12억여 원으로 줄었고 배상금을 이미 지급 받은 유족들은 배상금 차액을 반납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법원은 ‘피해자의 목숨 값을 깎았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 한국전쟁 중 학살을 소재로 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

그리고 올 6월, 21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를 조직하는 등 오직 이 사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헌신해 왔던 채의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미국을 오가며 관련 비밀문서를 찾아 공개하는 등 진실을 찾고자 한 그의 헌신은 제6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치유되지 못한 학살의 기억들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영토를 보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자 했던 한국전쟁 기간 동안 무고한 양민들의 학살이 끊이지 않은 것은 역설이다. 이데올로기는 극단적 배제의 논리를 양산했고, 그것은 끔찍한 학살로 이어졌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반도에 드리운 끔찍한 학살의 기억은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진상규명은 물론이거니와 신원(伸冤)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무고한 죽음과 유족들의 고통이 치유되지 못하는 한 한국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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