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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매드맥스: 분노의 트랙터

  • 입력 2016.11.27 16:05
  • 수정 2016.11.28 10:18
  • 기자명 박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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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전봉준 투쟁단’은 전봉준 선생의 생가가 있는 전북 고창을 지나 이평면 말목장터에 진입했다. ⓒ이대종

인터뷰/촬영 박다영

선두에는 높이 2.8m의 대형 트랙터가 섰다. 1톤짜리 쌀가마니를 거뜬하게 들어 올리는 트랙터의 무게는 2톤이 넘는다. 뒤로는 100여 대의 소형 트럭들이 따른다. 트럭마다 ‘박근혜 퇴진’이라고 쓴 붉은 깃발이 펄럭인다. 100여 대의 트랙터, 트럭 군단이 경기도 안성 도심에 나타나자, 길을 걷던 시민들은 멈춰 서 손을 흔들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등이 주최한 트랙터 상경 시위는 ‘전봉준 투쟁단’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15일부터 시작됐다. 동군은 전남 해남, 서군은 경남 진주에서 트랙터와 트럭을 몰고 올라왔다. 출발지인 해남에서 출발한 트랙터는 많지 않았으나, 정읍과 고창을 거치면서 크고 작은 10여 대의 트랙터가 합류했다.

트럭에는 농사짓다 말고 상경한 흔적이 그대로

입장 휴게소에 속속 도착하는 전라 지역의 농민들. ⓒ박다영

지난 25일, 충남 천안시 인근 입장 휴게소에서는 10일을 달려온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와 트럭을 탄 전라도 지역의 농민들이 합류했다. 휴게소에는 포대에 담긴 쌀 나락과 볏짚을 실은 트럭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포대 위에는 붉은 스프레이로 글씨를 쓰고, 깃발은 트럭 창문과 연결해 투명 박스 테이프나 하얀 플라스틱 끈으로 꽉 죄었다. 이들의 구호는 단순 명료하다.

‘박근혜 퇴진’

호두과자를 받아 든 농민들의 표정이 환하다. ⓒ박다영

진격 10일차, 서울 입성을 하루 앞둔 25일 아침 입장휴게소에서 그들을 만났다.

“기운 내세요.”

한 여성이 호두과자 5봉지를 농민들 손에 쥐여줬다. 그는 “정읍농민회 깃발을 보고서 전봉준의 후예라고 생각했다”며 “직장 일 때문에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힘내시라는 의미로 선물했다”고 말했다. 농민들은 예상치 못한 환대에 얼떨떨해하면서도 기분 좋은 눈치다. 호두과자를 입에 물고서 연신 웃는다.

“아이고 정말 좋죠. 이렇게 알아주니깐”

이대종 씨는 땅 농사만큼이나 ‘아스팔트 농사(정치 활동)’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박다영

트랙터 대신 파란 트럭을 몰고 나온 이대종(49) 씨와 동행했다. 그는 1989년 서울에 있는사범대학을 다니다, 국어 교사의 꿈을 접고 농민 운동을 위해 고향 고창으로 내려갔다. 그해 가을, 콤바인 옆구리에 붙어 마대를 잡는 것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쌀과 밀, 보리 등을 짓는다. 그의 트럭에는 농사짓다 말고 상경한 흔적이 그대로다. 보조석 바닥에는 낫과 실톱이 뒹굴고, 새참으로 까먹은 볶은 땅콩 껍질이 수북하다.

아직은 농한기가 아니다. 살을 에는듯한 칼바람 부는 계절에도 농민들은 농사일에 쉽게 손 놓지 못한다. 올해는 가을 강수량이 많아, 11월 말인데도 밀과 보리를 파종하는 농가가 많다고 한다. 고창만 해도 고들빼기와 미나리 수확이 한창이다. 농번기, 농한기 상관없이 농민들은 하루라도 손을 놀릴 수 없다. 그 일을 다 제쳐두고 농민들은 어렵게 상경을 결정했다.

트랙터를 움직이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전봉준 투쟁단’이 전북 고창 흥덕면을 통과하고 있다. ⓒ이대종

비 내리는 아침, 논길을 헤쳐가는 와중 트랙터 행렬을 발견한 노인이 손을 흔든다. ⓒ이대종

대형 트랙터의 최고 시속은 40km이지만, 주행과는 거리가 먼 트랙터의 특성상 평균 시속 20km로 달렸다. 하루 두, 세 개 도시를 통과했다. 달리는 내내 의자가 덜컹거리니 승차감은 좋을 리 만무하다. 연신 귀를 자극하는 소음도 예삿일이다. 밭 대신 도로를 달리는 난데없는 트랙터 행렬을 발견한 노인들은 ‘어디로 가냐’고 묻기도 했다. 이대종 씨가 “청와대로 간다”고 하자 “청와대?”라고 반문하고는 환히 웃었다고 한다.

농민들이 농사일을 손에서 놓고 트랙터 투쟁을 결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트랙터 가격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3천만 원에서 비싼 것은 억대를 호가한다. 다 빚으로 장만한 것들이다. 트랙터는 도로 주행과는 거리가 먼 기계라 타이어에 ‘빵꾸’라도 나면 손해가 막심하다. 타이어값만 수백 만원으로, 기름값은 비할 게 못 된다. 애초 트랙터 투쟁을 논의할 때도 ‘타이어 발통 나가서 못 한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대오를 정비하기 위해 멈춰 선 트랙터. 불과 15일 전만 해도 밭을 갈았을 농기계들이다. ⓒ박다영

뒷바퀴의 높이는 일반 성인 남성의 키와 비슷하다. ⓒ박다영

그런데도 농민들은 헌 땅을 뒤엎고 새 씨앗을 뿌리는 트랙터로 혁명을 하고 싶었다. 트랙터는 농민들이 매일 손에 쥐고 일하는 도구인 만큼 마음이 든든하다.

투쟁단의 선두에 섰을 때의 위압감도 잘 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선봉에 섰던 샌딩머신이 떠오른다. 당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고압으로 모래를 뿜어 철판의 녹을 제거하는 기계인 샌딩머신을 시위대의 맨 앞에 배치했다. 샌딩머신에서 분사된 모래알은 몇 미터만 날아가도 힘을 잃어 먼지 바람이 된다. 그런데도 전투 경찰들은 그 크기에 압도돼 도망치듯 철수했다.

11년 전, 서해안 고속도로의 ‘뼈 아픈’ 트랙터 투쟁

이번이 최초의 트랙터 투쟁은 아니다. 11년 전인 2005년에도 트랙터는 서울로 향했다. 2005년 11월 23일, 고창에서 출발한 트랙터 6대는 서해안 고속도로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농로를 달렸다. 그러다 농민들은 가드레일 나사를 풀어 고속도로로 트랙터를 진입시켰다. 3km를 달려 고창 나들목 부근까지 갔다.

“트랙터에 안 탄 농민들은 경찰한테 연행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는데, 그래도 고속도로 들어가니깐 기운이 펄펄 나잖아. 다 된 것만 같고. 그런데 갑자기 전화 한 통이 온 거여. 국회에서 방금 방맹이 두드렸다는 거야. 뭔 말을 하겠어. ‘집에 갑시다’ 했지. 그때 참 허무했어.”

그 날, 세계무역기구(WTO) 쌀 협상 비준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당시의 트랙터 혁명은 실패했다. 농민들은 정부에 부아가 치밀 때마다 ‘트랙터 싹 끌고 가서 길 막아 부리고 해야 헌다’고 탄식했지만 실현은 어려웠다. 11년이 지난, 2016년 11월 농민들은 다시 ‘전봉준 투쟁단’이라는 이름으로 우금티(현재의 공주시 인근)를 넘어 서울로 향했다.

나락과 볏짚은 왜 서울로 가면 안 됩니까?

오후 2시경, 법원이 경찰이 금지한 트랙터 상경을 허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 종로경찰서가 트랙터 등을 이용한 시위를 금지한 데 반발해 전농이 낸 집행정지 신청을 일부 허용한 것이다. 법원은 트랙터를 주정차하는 방법의 시위는 제한하지만, 트랙터를 이용한 상경과 전농의 집회 자체는 허용했다.

안성 나들목에서 볏짚과 나락은 집회 용품으로 등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은 투쟁단을 막았다. ⓒ박다영

하지만 투쟁단은 안성 나들목에서 경찰에 막혔다. 경찰은 볏짚이나 나락은 집회 용품으로 등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댄다. 농민들은 법원에서도 허용한 집회를 왜 가로막냐고 몸으로 맞섰다. 몇 차례의 몸싸움에도 어느 쪽도 물러나지 않았다. 경찰은 볏짚과 나락을 버리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리고 갑시다!”

이대종 씨는 경찰들 앞으로 볏짚을 쏟아부었다. 다른 트럭들에서도 쌀 나락이 쏟아졌다. 트럭에 맨 깃발까지 떼어내고 나서야, 마지못해 경찰의 바리 게이트가 열렸다. “저놈들이 원래 치사하게 집회 금지 물품 같은 거 들먹거리고 그래요. 가다가 분명 또 막을 거야” 이대종 씨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지만,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농민들의 상경 투쟁은 매번 가로막혔다. 지난 10월 5일, 쌀값 폭락에 분노한 농민들이 트랙터로 논을 갈아엎은 후, 트럭에 벼를 싣고 상경했다. 미리 신고한 합법 농민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남대교 남단에서 경찰은 농민들을 막아섰다. ‘도심에 쌀을 싣고 다니는 건 위법’이라고 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그 자리에서 쌀을 쏟아 부었다.

이대종 씨는 “예전엔 동네 어귀도 못 나가게 했다”며 “지금은 그나마 고속도로를 타서 서울 근교까지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당한 것만 수십 년이다. 안성 나들목 톨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그는 트럭을 세우고, 다시 깃대를 고정했다. 박근혜 퇴진, 깃발이 다시 나부꼈다.

”야들은 맨날 깃발 떼라고 난리여. 이 깃발이 그렇게 무서운 갑제” 이대종 씨의 말이다. ⓒ박다영

농민들에게는 쌀이 전부다

농민들에게는 쌀이 전부다. 모판에 종자를 치고 모를 키워낼 때 까지만 해도 시간은 더디게 간다. 어린 모가 땅 맛을 알고 나락이라 불리 울 즈음이면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칠팔월 무더위 속에서 나락은 청년이 되고 어느새 모가지가 나왔다 싶으면, 금세 노란 물이 들어 가을걷이에 구슬땀 흘린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눈발 날리는 겨울이다. 이렇게 농민들은 한 해, 그리고 평생을 보낸다.

“박근혜가 대통령 후보 시절에 쌀값 21만 원 보장하겠다며 전국에 플래카드를 시뻘겋게 걸었다고. 그때만 해도 쌀값이 17만 원 선이었어요. 근데 취임하자마자 쌀 시장 완전히 개방해 부리고. 지금 쌀값은 10만 원 미만이에요. 농민들한테는 박근혜가 쌀값을 망가뜨린 주범이고 원흉이라니까”

올해는 유례없는 쌀 대풍을 맞았지만, 오히려 수확량이 최대 40% 증가하면서 쌀값은 끝없이 하락했다. 갈수록 곤두박질치는 쌀값에 농민들은 농산물 최소가격 보장과 쌀 국가 수매제를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무런 대책 없이 수수방관하고 있다. 농사지어봐야 제값 못 받고 팔아먹기조차 어려워, 농민들은 봄이면 모판 대신 ‘농민도 사람이다’라는 팻말을 심고 가을이면 추수를 앞둔 논을 갈아엎는다.

여기에 백남기 농민의 죽음도 농민들의 분노를 점화했다. 백남기 농민은 지난해 1월 경찰이 쏜 물대포 직사로 쓰러져 317일 동안 투병하다 사망했다. 쓰러질 당시 그가 입고 있던 하늘색 조끼에는 ‘밥쌀용 쌀 수입 반대, 보성군농민회’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쓰러지던 날 이대종 씨도 현장에 있었다.

“영상을 보면 그 양반이 뒤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잖아요. 밧줄을 잡고. 그 양반의 걸음은 농민들에게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어요. ‘밥쌀’ 지키겠다며 나섰던 양반이 그 자리에서 자기 인생을 바친 거잖아요. 주저 없이”

‘다시 우금티를 넘어, 서울로 간다

‘어지간한 논두렁은 그냥 타고 간다던’ 농민들은 네 번의 대치 끝에 양재 나들목에서 발이 묶였다. 지난 10월 한남대교 대치보다 11km 앞이었다. 전농 김영호 의장은 경찰이 휘두른 채증카메라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렸고, 3명의 농민이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36명의 농민은 공무집행 방해를 이유로 경찰에 연행됐다.

이대로 광화문까지 갈 수 있겠냐는 질문에 이대종 씨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꼭 갑니다. 농사꾼은 씨를 뿌리고 나락을 베어야 할 때를 잘 압니다. 쟈(박근혜 대통령)가 그냥 내려가겠습니까? 몇 사람이 나와서 치고 받아서 피 보자는 게 아니라, 군중의 힘으로 밀어붙여서 권력을 무력화 시켜야 할 거 아닙니까”

26일 오전 2시, 고속도로 갓길에서 농민들은 미리 챙겨 온 솥단지를 걸고 밥과 찌개를 나눠 먹었다. 잠은 트럭 위 침낭에서 청했다. 오전 10시, 농민들은 한남대교에 트랙터와 트럭을 두고, 맨몸으로 서울 광화문 광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나 전봉준의 이름을 걸고 땅끝 해남에서 340km를 달려온 대장 트랙터는 아직 평택에 있다. 오는 30일, 트랙터 상경은 다시 시작된다. 농민군은 이제 막 우금티를 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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